어느 날 아침 '염(厭)'자를 들여다보던 중 글자의 구성에서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厭'이 영화 'Old Boy'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가! 염은 '굴 엄(厂)' '날 일(日)' '육달 월(月)' '개 견(犬)'으로 나눌 수 있다. 月은 일반적으로 '달 월'이지만 '육달 월'이라고 하여 '고기 육(肉)'을 변(邊)으로 쓸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肰(연)'은 개고기가 된다. 개고기 밑에 '불 화(火) 발(灬)'을 붙여서 개고기를 불에 굽는다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럴 연(然)'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개고기를 무척 좋아한 듯하다. '불에 구운 개고기가 맛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연유로 然이 '그럴 연'자가 되었다. 유사한 글자로 '구운 고기 자(炙)'가 있는데 '犬'이 빠져있으므로 개고기 뿐 만 아니라 구운 여타 고기를 일컫는다.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다'는 말에서 ‘膾炙'는 바로 '날 생선과 구운 고기'를 가리키며 매우 맛있어서 사람 입에 오르내린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猒'은 이렇게 맛있는 개고기도 매일 먹는다는 의미에서 날 일(日)을 붙여놓은 것인데 매일 먹으면 물릴 수밖에 없으므로 '물릴 염'자가 된다. 厭은 굴 엄(厂)으로 인해 이런 해석이 가능해 진다. 즉, 굴에 가둬둔 채 매일 억지로 개고기를 먹게 하는 뜻으로 '싫어할 염'이 된다.

'염세(厭世)'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쓰임새를 가진 단어를 사용할 때 '싫어할 염'자를 쓴다. 영화  'Old Boy'에서 주인공이 이유도 모른 채 감금되어 15년 동안 줄 곳 만두만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아무리 맛있는 만두라고 해도 며칠 계속해서 먹으면 물릴 수밖에 없는데 15년 동안 강제로 먹었다면 그 기분이 어땠을까?

'厭'자는 바로 그런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厭'자는 비슷한 의미인 '누를 압'자로도 쓰였는데 후에 '싫어할 염'과 구별하기 위하여 '흙 토(土)'를 붙여서 '압(壓)'으로 사용되었으며 흔히 쓰이는 한자(漢子) 중 하나이다.

한자야 말로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만들어진 문자이다. 각각의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따지면 배우는 것도 재미있을뿐더러 옛사람들의 지혜를 얻게 된다. 한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다양한 환경과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문자를 만드는데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자를 만드는 여섯 가지의 원칙(육서(六書):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에 따라 새로운 문자가 제시되고 다듬어졌으며 복수의 것 중에 살아남은 것과 탈락한 것이 있었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참여해 만들어가는 웹기반의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형성과정은 한자가 만들어진 과정에 비견될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웹기반으로 진행됨으로써 짧은 시간 동안에 엄청난 성과를 얻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경우, 1768년 초판이 3권으로 구성되었으나 1985년 이후 판본이 32권으로 되어 내용이 200여 년 동안 10여배 늘어났다.

위키피디아의 경우는 하루에 100만개가 넘는 항목이 새로이 추가되거나 수정되고 있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는 발전 속도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는 웹기반 덕에 한자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하급수적인 팽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뿐 만아니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모두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집단지성은 '다양성과 독립성을 가진 집단의 통합된 지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사회성을 가진 곤충들의 경우 개체수준에서 보면 지적능력이 미미해 보여도 집단차원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에서도 집단지성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융합과학이야말로 마땅히 집단지성의 하이라이트여야 한다. 더욱이 인터넷 시대에서 집단지성적 접근을 하였을 때의 문제해결 잠재적 능력은 이전에 인류가 경험한 바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소비재 제조·판매를 하는 다국적 기업인 P&G는 제품의 기획과 개발에서 인터넷을 이용한 집단지성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본격적인 융합과학을 위하여 집단지성적인 어프로치를 한다는 사례는 접하기 어려워 의아하기까지 하다.

융합기술에 의한 제품은 아이폰에서 보듯 아직도 몇몇 천재의 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융합과학과 기술은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발전되어야한다는 명제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과문함 탓일까?

위키피디아의 경우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네티즌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집단지성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융합연구를 위해 유혹적인 대가를 약속하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이는 마치 굴에 가두어 둔 채 개고기를 매일 먹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융합과학은 집단지성으로 접근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창조경제도 연구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이 전제될 때에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유장렬 박사는

융합과학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지만 현장에서 접목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유장렬 박사는 서로 별개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분야가 모여 합목적인 새로운 성과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장렬의 융합과학 첫걸음'을 통해 연구자들의 고민을 파헤쳐보고 실현가능한 방법을 함께 모색해 볼 예정입니다.

유장렬 박사는 서울대 식물학 학사, 캘리포니아주립대 생물학 석사을 거쳐 미시간주립대에서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85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한국식물생명공학회 회장, 한국생물정보시스템생물학회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SCI 등 주요학술지에 128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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