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바소 예배당 비발디 사계 연주회.
산 바소 예배당 비발디 사계 연주회.
서양고전음악이 어렵고 방대해 섣불리 입문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좋은 작곡가와 음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추천 목록을 구하는 분들에게 나는 약간 다른 방법을 권하고 싶다. 본인에게 매우 익숙한 곡을 여러 다른 버전으로 들어보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 비발디의 '사계'로 시작했다. 2002년에 처음 들은 파비오 비온디 '사계' 음반이 서양고전음악에 새롭게 흥미를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사계'는 90년대 경양식 레스토랑 분위기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풍성한 연주였다. 전세계적으로 1천만 장 이상 팔린 이 무지치 실내악단의 음반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파비오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의 음반이 '사계' 연주의 고정관념을 뒤엎었다. 음색이 독특한 시대 악기를 사용하여 빠르고 강렬한 '사계'를 선보인 것이다.

산 바소 예배당 입구.
산 바소 예배당 입구.
이 무지치와 파비오 비온디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가 비발디의 '사계'로만 알았던 음악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다. 비발디의 '사계'는 이 무지치의 '사계'와 파비오 비온디의 '사계'로 분화된다. 두 가지 버전의 '사계'를 듣고 나면 그 지점에서 취향이 생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음악들, 예를 들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떠올릴 때 우리는 추상적인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정도에 그친다. 오다가다 들었던 수많은 '엘리제를 위하여'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심지어 서로 다른 두 개의 악보가 존재한다. 음 하나가 다른 부분이 있는데 '미도시라'와 '레도시라'의 차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한 피아니스트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14명의 피아니스트는 '미도시라'로 연주하고 8명은 '레도시라'로 연주했다. '미도시라'가 두 배 정도 많았지만, 거장으로 불리는 아쉬케나지와 빌헬름 켐프는 '레도시라'로 연주했다.

이렇듯 그 짧은 곡에서조차 특정 음을 다르게 연주하기도 하니, 연주자마다 템포와 강약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비발디가 나고 자란 곳이다. 비발디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한 고아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다가 생을 마감했다. 비발디의 자취를 찾아 베네치아에 온 관광객들을 위하여, 광장 한 켠의 예배당에서 매일 비발디의 '사계' 연주회가 열린다.

2011년 산 바소 예배당에서 들은 '사계' 연주는 특별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가을 1악장 도입부에서 전조한 부분과 겨울 1악장 마지막 마디에서 한 음을 살짝 바꿔 연주한 부분에서 짜릿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음악의 이해' (이강숙 저, 민음사) 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음악적 불모지의 개간 작업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기대감을 경험자의 마음에서 발생하게 하는 일이다. 곡의 진행과정이 기억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반복적 청취가 반드시 기대감을 낳아줄 것이다."

음악 감상은 단순히 청각 자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 진행되는 악절마다 시시각각 생겨나는 기대감이 필요하다. 기대감이 충족되거나 어긋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각 신호가 감정을 건드린다.

◆이정원 선임연구원은

이정원 ETRI 선임연구원.
이정원 ETRI 선임연구원.
이정원 선임연구원은 책과 사람에 쉽게 매료되고, 과학과 예술을 흠모하며, 미술관과 재즈바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펜탁스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고, 3P바인더에 일상을 남깁니다. 시스템과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습관과 절차 자동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연구원은 이정원의 문화 산책을 통해 자연과 인류가 남긴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정원 연구원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에서 공부하고 동 대학에서 의용생체공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현재 ETRI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KAIST에서 바이오및뇌공학과 박사과정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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