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 이야기에 나타난 인지력 편향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도 불과 50년 전, 즉 우리의 조부모뻘 되는 분들은 인종적 편견과 약자에 대한 지독한 특권의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던 사회였다. 약자에 대한 잔혹함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강자에 대한 비굴함에 역겨움을 느끼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았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를 공감하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메가히트 한 책 'HELP'는 영화로도 우리에게 소개됐다. 이 책은 마틴 루터 킹이 활동하던 시기, 마이애미의 잭슨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백인 상류층 여성들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흑인 가정부를 둔 안주인이 돼 편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꿈이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흑인 가정부를 병을 옮기는 더러운 존재라고 경멸하면서도 바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가장 사랑하는 아기를 돌보고 키우도록 맡기는 아이러니, 불결한 존재이므로 출입문이나 화장실도 따로 쓰게 하는 경멸적 행위쯤이야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위생에 가장 민감한 음식을 저들의 손에 맡기는 아이러니가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과 미니에 대한 백인 여성들의 모순적 태도는 인간의 편향된 인지력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것 혹은 강자와 권위에 속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쉽게 적응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것 혹은 약자에게 속한 것에 대해서는 쉬이 문제를 인지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정신적 편향의 전형이다. 특히 그러한 편향이 문화와 관습의 지원을 받게 되면 웬만한 자기통찰과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철학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스스로 그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나약한 현주소다.

인간 이성의 이러한 나약함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현상으로 표현된다. 동일한 현상을 보고도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의 다른 해석이 일어나는 것이 빈번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자신의 의견에 맞도록 왜곡하거나 무시해버림으로써 점점 더 편견이 심해지는 인지현상을 말한다. 그것은 선입견 때문에도 생기지만, 실상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데 따르는 비용, 즉 책임감, 양심의 고통,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것에 대한 염려, 직장 상사의 눈 밖에 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정신적 도피주의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의 독보적인 발언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미국인과 결혼하고 연이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휴직기간이 8월로 끝난다. 이를 두고 퇴사에 관한 전망이 언론에서 터져 나옴에 따라 지난 한 주간 언론과 인터넷 공간이 먹튀논란으로 뜨거웠다.

원천적으로 우주인 사업이 정부의 과시성 사업이었음을 비판하는 분도 많았고, 대규모 예산이 필요한 유인우주인 사업을 장기적인 계획 없이 성급하게 추진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이소연 박사는 희생자이며 오히려 이 문제를 거론하는 모든 관계자나 화자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공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덕환 교수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한 단계 높혀 보다 근원적인 데에서부터 이 문제점을 파악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소연 박사는 젊은, 아주 유능한 과학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소연 박사가 260억을 쓰지 않았죠. 먹튀라는 건 본인이 그 돈을 가지고 튀는 사람을 먹튀라고 그러는 거죠.

이소연 박사는 정말 자기의 일생을 희생해서 국가적 과제에, 국가적 사업에 헌신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보고 먹튀라고 그러면 굉장히 잘못된 표현이고 아무리 정치인의 발언이라고 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입니다.

문제는 정부의 정책 실패였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충분한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우주인 배출 사업을 진행했던 그 당시의 과학기술부(지금의 미래부) 그리고 그 업무를 떠맡았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그리고 나가서는 우리 과학기술계가 책임질 일이지 이소연 박사 개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열심히 노력을 했다고 봅니다."

과학기술계 다른 인사들의 의견도 유사한 면이 많지만, 이 교수 발언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나라 우주 사업의 과시적 특성에 대해 평소에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소연 박사가 이번 논쟁의 피해자라는 점과, 그가 우주인으로서 노력하고 공헌한 것을 정당하게 인정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과 강자에게서 책임을 찾고, 약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합당한 살핌으로 대하는 태도는 드러나지 않은 편향된 인식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이덕환 교수의 발언이 출연연 거버넌스에 대한 진지한 담론으로 이어지려면

이덕환 교수의 용기 있는 발언의 요지인 ▲과학기술 정책의 근시성 ▲장기적 안목 없이 과시적 목적의 연구개발을 추진하는 문제 ▲정부부처와 갑을 관계에 있는 출연연이 이러한 정책적 문제에 대해 제대로 방향 수정이나 비판적 반론을 내어 놓지 못하는 문제 등은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들어 부쩍 질타를 많이 받고 있는 출연연들의 낮은 연구성과 문제도 바로 이러한 연구사업에 관한 장기적 기술로드맵의 부족으로 지목돼 왔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기술로드맵은 출연연의 방향타,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효성과 전략성을 갖춘 장기적 기술로드맵을 배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국가 과학기술 개발의 환경과 정책에 관한 이해, 세계 산업경쟁 환경의 변화와 산업의 니즈에 관한 이해, 그리고 세계적인 연구기관·학교·연구자들의 연구동향에 관한 이해로 무장한 각각 영역의 전문가들(정책, 산업, 학계)이 체계적인 토론과 협의를 통해 전략적인 우선순위 선택과 단계별 구체적 목표 설정이라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첫째 과정을 리드할 유능하면서도 거시적이고 사명감으로 무장된 출연연의 정책전문기능과 그 전문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바로 여기에서 과학기술 정책에 관한 거대 담론은 전진을 멈추는 듯하다. '정부와의 관계에서 거버넌스 문제를 어떻게 바꾸겠는가?', '갑을 관계에 있는 출연연이 거버넌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스스로 연구사업의 방향을 정하고 기획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조적인 질문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편향이 아주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마땅히 돌파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는' 변화의 주체로서의 자각이 가져다 주는 무력감과 고통보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같은(?) 환경'의 무게를 크게 강조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을까? 이러한 내적 에너지 비용의 차이는 자연스레 우리로 하여금 외생변수의 위력은 크게 보게 하고 우리가 해결 해야 할 내생변수에 관한 책임은 작게 보게 하지 않을런가?

거버넌스 문제만 해결되면 연구효율성 문제, 연구정책의 장기전략 문제가 개선될 것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외생변수 못지 않게 내생변수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연구자들의 자율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문화를 제한한 역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지목되는 PBS는 사실상 경쟁과 생산성 제고를 목표로 도입된 것이었다. 그 제도가 갖는 과도한 인건비 경쟁유발 문제, 그로 인해 연구효율을 오히려 저하시킨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출연연 인건비 지원이 대폭 증가하고, 출연연이 자율적으로 도전적인 기획과 실행을 감행할 수 있는 주요사업, 자체사업 등의 재량이 커지는 등의 개혁이 실행됐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외생변수의 조정과 타협이 연구효율성의 증가를 저절로 담보해 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출연연이 자체적으로 연구 사업을 효율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부의 정책적 리더십과 평가체계에 의존하던 프레임에서 벗어나 각 출연연마다 핵심적인 선행기술 기획과 추진, 평가 체계의 '대전환' 수준의 변화와 의식개혁이 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왜 이소연 박사 사건을 예로 들다가 핵심 선행기술 이야기가 나왔을까? 두 사례 모두 장기적인 정책에 기반한 기술로드맵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그 계획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도 기술로드맵이 있고 비전이 있다!'고 말씀하실 분이 많이 있을 듯하고 충분히 정당한 반론일 수 있다. 필자 자신의 이해도도 그리 깊지 못하다. 하지만, 인식의 편향 문제를 과학기술 정책 영역에 도입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취지로 작성한 이번 글의 의도에 따라, 위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에게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과연 그 기술로드맵과 비전은 선택 가능한 여러 길 중에 어떤 것은 아예 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것은 후순위로 미뤄둬야 할지, 즉 선택과 집중에 관한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진정한 로드맵인가? 아니면 그런 불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둔 백과사전과 같은 것인가?

둘째, 우선순위가 포함된 로드맵이라도 그것이 세계 기술동향에 대한 분석외에도 우리나라 산업계의 현실과 니즈가 충분히 분석되고 반영된 것인가? 그리고 기술 로드맵이 매 분기, 매 년 그러한 산업 현장의 니즈에 대한 동적 분석에 따라 체계적이고 연속적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는가? 아니면 일시적인 행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셋째, 그 기술 로드맵이 참여 구성원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몰입하게 하는 개인적 비전으로서 내면화 될 만큼 충분한 공감대와 현실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실장은

현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연구기획조정실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을 10년동안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 서브시스템 체계종합과 착륙장치 PM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중입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을 통합한 장기적 항공우주 산업육성 전략, 항공우주분야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대형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 입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