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용기 UST 교무처장·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얼마 전 휴일에 필자는 오랫동안 근무했던 연구소 내를 아내와 산책한 적이 있다. 그동안도 참 좋은 곳이란 생각을 해오긴 했지만 이날 따라 유난히 뭔가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내에게 "참 고마운 곳이야. 젊은 날부터 오늘까지 참 잘 지내올 수 있게 해 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내도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내가 대덕연구단지에 온 지 이제 29년이 됐다. 그런데 지금도 처음 이곳에 왔던 1985년의 여름을 기억한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아내와 가족들은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었고, 홀로 이곳에 내려와 연구소에 들러 인사를 하고 이사를 올 공동관리아파트를 둘러 봤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를 갖고 왔던 내게 공동관리아파트는 기대를 무너뜨리는 큰 충격이었다. 녹지로 둘러 쌓인 아담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좀 심하게 훼손해 우리가 들어갈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에는 도저히 그 집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싱크대 일부는 불에 탄 듯 꺼멓게 그을려 있고, 거실의 바닥과 벽면은 마치 폐가와 같았다. 더욱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 물 대신 녹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거실은 난방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상태로 아내에게 보여주었다가는 절대 대전으로 내려오지 않겠다고 할 것 같았다. 나를 안내한 연구소 담당자에게 이 상태로는 입주할 수 없으니 바닥 장판과 벽지를 도배해주고 싱크대는 새 것으로 교체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담당자도 상태의 심각성을 공감하면서 그렇게 해주기로 해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연구단지에서의 생활은 1993년 대전 엑스포가 도룡동에서 열릴 즈음까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자주 있었는데, 서울에 가기 위해서는 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거나 유성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대전역까지 가는 길은 논 사이로 나 있는 왕복 2차선의 좁은 길 뿐이었으며,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도룡동으로 들어오려면 승차 거부를 당하기가 일쑤였고 추가 요금을 내야만 했다.

또 유성은 분명 행정구역 상 대전시였지만 유성지역만을 주로 운행하는 택시가 따로 있어 연구단지에 들어오려면 이 택시를 타야만 했다.

공동관리아파트에 살면서 연구원들이 만든 주택조합에 참여하게 됐다. 아파트 바로 뒤의 나지막한 언덕을 깎아 아파트를 짓게 됐는데 나와 가족들은 뒤창으로 내다보이는 공사 현장을 가슴 설레며 지켜보면서 이사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989년 공동관리아파트 시대를 마감하고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지금 보면 정말 아파트 이름부터 참 촌스럽고 무성의하게 지었으며 골조를 빼고는 내부도 부실했지만, 대덕연구단지 초창기부터 많은 해외유치 과학자들이 살았던 의미 있는 공간이었으며, 근처에 다른 시설이 거의 없던 시절에 과학자들의 마을공동체 역할을 수행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비록 좁고 겨울에는 난방도 잘 안 되는 거실이지만 사람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공동관리 아파트에 살았던 초기 4년 이후에도 25년간 그 아파트의 빨간 지붕을 바라보며 가까이 살고 있다. 아내와 밤에 산책을 할 때에도 길을 따라 걷다 아파트 안을 거쳐 걷기도 했으며, 봄이면 제법 넓은 풀밭에 피어나는 봄까치꽃과 민들레꽃의 사진도 찍으러 가곤 했다.

그 사이 나이가 들어 일하던 연구소를 정년퇴직 한 것처럼 이제 공동관리아파트 역시 낡아 그 용도를 다 하고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으로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다.

이곳을 부수고 재개발해 일반아파트를 짓는다는 안이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벌써 29년째 공동관리아파트 가까이에서 살아온 나도 이 곳에 일반 아파트가 높이 들어서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곳이 대덕연구단지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곳으로, 그리고 초창기와 같이 연구원들의 소통과 만남이 있는 커뮤니티센터로 남기를 원한다. 그리고 일부는 보존해 대덕 연구단지를 만든 40년 전의 정신을 느껴 볼 수 있는 기념관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이곳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이 서로 만나 융합적인 창조적 아이디어가 태어나고,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과학과 예술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그런 대덕특구의 랜드마크적 교류와 창조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이 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벽돌 한 장씩을 보태는 마음으로 뜻을 모으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비록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되는 이 모임이 이 지역 그리고 더 나가 대전시와 우리나라의 과학문화를 새롭게 만드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위대한 일들은 연속적인 작은 일들이 함께 해서 만들어진다"라고 말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이 벽돌 한 장 모임에게는 별처럼 빛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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