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림 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
흑림 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
독일 남서부에는 여러 도시들과 호수를  품고 있을 만큼 넓은 흑림 (Schwarzwald) 지대가 있다. 흑림은 열대우림과 같은 자연림이 아니라 약 200년 전부터 조성된 인공림이다. 나무들이 너무 촘촘하여 햇빛이 비치지 않아 검게 보인다 하여 흑림이라 부른단다. 이곳에서 생산된 나무로 만든 뻐꾸기기 시계가 유명하다.

이번 여름휴가 때 나는 흑림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헤르만 헤세가 태어나고 자란 칼브(Calw)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그 도시에는 작고 아담한 3층 건물에 그를 기념한 박물관이 있다. 그가 그린 그림과 그가 지은 책들, 그에 관한 사진들이 전시된 여러 방들을 돌아보다가 나는 한권의 책을 발견했다. ‘Narziss und Goldmund', 우리말로는 ’지와 사랑‘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그 책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오랫동안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화두처럼 따라다니며 때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했었고, 때로는 인간에 대한 작은 깨우침을 주기도 했었다.

'지와 사랑' 독일어판.
'지와 사랑' 독일어판.
'지와 사랑' 또는 '이성과 감성'을 대표하는 두 사람(나르치스, 골트문트)의 인생 이야기인데, 헤세는 감성을 이성보다 더 우위에 두는 듯이 결말을 맺었다. (그렇게 기억된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그 책이 왜 그렇게 나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가슴이 뚫린 듯 허전했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나는 그 책의 복사본을 구입했다. 내 독일어 실력으로는 결코 다 읽지 못할 책이지만 그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내 인생에서 빠져있던 중요한 한 부분이 채워진 듯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그가 쓴 책은 수십 개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 젊은이들의 사색의 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사색과 고민을 통해서 인간은 좀더 인간답게 성장하는 것이리라.

사람의 마음은 흔히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심성은 서로 대척점에 있으면서 한 개인의 심리에 정반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설명되고 있다.

과연 이것은 올바른 설명일까?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인간사회 곳곳에 서 퍼져 있으면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즉, 음과 양, 좌와 우, 흑과 백, 하늘과 땅, 천당과 지옥처럼.

이런 이분법보다는 다음과 같은 구분이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음과 양 사이에는 중성이 있고, 좌와 우 사이에는 중앙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천당과 지옥 사이에는 연옥이 있다. 이분법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던 더 큰 부분을 살리자는 것이다.

흑과 백이 양쪽 끝에 있는 경우, 그 사이에는 수많은 회색이 존재할 수 있다. 흑과 백의 조합 비율에 따라 좀더 밝은 회색, 좀더 어두운 회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조차도 이분법적인 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나보다 어두우니 너는 흑이고 나는 백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적과 아군으로 구분 짓는다. 나와 똑같지 않다는 것 때문에 서로 반대편에 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어떤가? 어두운 회색에도 흰색 성분이 있고, 밝은 회색에도 검은 성분이 있는 것이다. 좀더 쉬운 말로 하면,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흑백 텔레비전이 사라진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이다. 어둡고 밝음으로만 영상을 나타내던 기계가 이제는 수많은 색깔을 나타내고 있다.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이 아니라 수만 가지 색깔로 나눌 수 있다. 아니 이제는 색깔의 개수를 세는 것이 어려워 좌표(숫자)로써 색을 나타낸다.

과학과 기술은 이렇게 다양한 색깔을 나타낼 정도로 발전했는데, 사람의 인식의 범위는 아직도 흑백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갈등은 우리에게 내재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과와 문과를 통합하는 교육을 추구하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다.

헤르만 헤세 박물관 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헤세의 책들, 한글로 된 책도 보인다.
헤르만 헤세 박물관 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헤세의 책들, 한글로 된 책도 보인다.

또한 최근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융합’과 ‘개방’이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서로 다른 학문과 기술이 융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융합되어야 한다. 개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연구자들의 마음이 열려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존의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를 버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

대덕연구단지에서 개최된 ‘과학자와 예술가의 만남’ 행사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전혀 다를 것 같은 과학과 예술이 사실 핵심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의 연구는 마치 상감청자를 굽던 고려인들처럼 불타는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이 있을 때 비로소 명작(명품)을 탄생시킨다.

헤르만 헤세를 만난 것은 내 일생에서 참 중요한 순간이었다. 4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이성과 감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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