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적 연구성과 관리가 답일까?

 

오상식 과장: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승부사는 완성형보다는 진행형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tvn 드라마 '미생' 중.
오상식 과장: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승부사는 완성형보다는 진행형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tvn 드라마 '미생' 중.
"기존 조직 평가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진기업에서는 신규사업 담당조직에 대해서는 매출규모, 순이익 기여와 같은 전통적 평가잣대가 아닌 프로세스 혁신성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기 TV드라마 '미생' 속 인턴들이 정식 사원으로 발탁되기 위해 펼치던 피말리는 프리젠테이션 장면 중에 나오는 대사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유연한 대응, 무엇보다 단기적인 실적보다 장기적인 성장가능성을 핵심가치로 두어야할 신규사업조직에 대한 성과잣대는 단기적 성과에 기초한 기존 조직의 평가잣대와는 반드시 달라야 한다. 만약 두 개의 다른 사업부를 동일 잣대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경영자의 전략부재, 철학부재를 의미할 것이다.

신규사업과 마찬가지로 연구성과 평가도 결과보다는 프로세스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특히, 우리나라의 국책 연구사업의 연구성과 비효율성 혁신에 도움이 될 것인지, 연구기획 및 연구계획 작성 단계의 부실성을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여다 보자.

◆기초기술, 선행연구 단계의 연구성과 혁신의 길 - 프로세스관리 vs 기획수준 관리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고질적인 성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연연의 성과 정의, 성과평가의 방법론, 그리고 성실실패 인정 등에 대한 다양한 담론과 개혁이 논의되고 있다.

그 중 국가 대형연구개발사업 관련해 가장 강조되는 것은 R&D 프로세스. 이를 표준화하고 위험관리 체제 선진화에 더 주목하자는 담론이 여러 보고자료에서 거론되고 있다.

결과중심의 평가로는 본질적으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이러한 담론은 매우 환영할만 하다. 결과(계획·목표 대비 달성도)만 두고 평가한다면 도전적 연구기획을 시도할 연구자는 없을 것이다.

국가 R&D 성공률 100%에 육박하면서도 실질적 파급효과가 낮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주목받고 있는 대안은 ‘성실실패’ 용인제도이고 어떻게 이 제도를 운용할지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성실실패제도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 기대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본다. 특히, 기초기술, 선행연구 단계의 연구성과 혁신에 있어서는 말이다. 성실실패 용인은 과정의 성실성은 담보할 수 있을지언정, 연구성과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핵심단계인 기획단계의 혁신성은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세스 중심의 선진적 연구성과관리를 강조하는 기류는 결과위주 평가의 한계에 근간한 것이어서 환영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달된 프로세스 관리체제라 할지라도, 연구기획단계의 도전성과 혁신성을 담보하기는 어려운 한계가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한계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다

인센티브 제도: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R&D를 기획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R&D 사업에 대비하여 어떠한 인센티브가 있는가? 그 인센티브는 혁신적 연구추진에 따르는 고통과 위험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수준인가?

기획평가의 신뢰성: 인센티브의 근간으로 작용할 ‘혁신성’은 어떻게 평가하고 신뢰성을 담보할 것인가? 그 혁신성에 대한 평가를 다른 연구과제와 어떻게 형평성 있게 상대평가 할 것인가?

지식의 융합과 신규성: 대부분의 혁신적 연구기획이 연구자 몇사람의 아이디어보다는 다양한 전문인들의 만남과 지식의 충돌을 통한 기존 지식의 융합과 창조적 파괴를 요구한다. 그리고 산업과 시장, 경쟁자 및 대체기술의 동향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분석과정에서 파생된 스파크가 하나의 단일 목표를 중심으로 정치(精緻)하게 정돈되고 체계적으로 기획되는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융합연구, 창의적 연구의 담론은 이미 식상하리만큼 오래되었다. 던져야할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현재 다각도로 추진되는 융합연구기획 사업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잉태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기존 패러다임으로 기획되면서 그저 융합이라는 모양새만 내고 있는가?

기획안 조정, 보완의 거버넌스: 혁신적 기획은 필연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연구 진행단계에서 개발 목표(일정, 기술적목표)의 조정뿐 아니라 초기에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위험요인이나 기회요인의 통합 조정을 위한 거버넌스를 요구한다. 이러한 유연한 대응이 불가능하면 아예 이러한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 뻔한 결과의 기획을 하게 될 것이다.

◆대형체계개발, 양산개발 사업에서의 연구성과 혁신의 길 - 프로세스관리 vs ?

항공우주분야와 같은 대형연구개발 사업의 경우에는 해외 선진연구기관과 기업에서도 프로세스 중심의 성과관리 및 위험관리가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일반 기초연구사업과 같이 과정의 혁신성만 아니라 일정, 비용, 핵심기술, 시스템통합성능 등의 상위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지표를 종합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개발된 것이 선진적 목표관리제도 즉, EVMS(Earned Value Management System)이다. 이는 사업계획 실행을 위해 수천개의 구체적 과업 하나하나에 계획비용과 계획일정을 분할하여 할당한다. 그리고 계획대비 실제 집행된 비용, 획득된 기술적 성과, 중간결과물을 실시간 수준으로 비교하여 대형체계 개발사업의 진척 관리에 있어서 요구되는 구체성과 통합성, 즉시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기법이다.

이러한 EVMS 기법은 미국 NASA, 보잉, 록히드마틴, 시콜스키 등과 같이 불확실성이 크면서도 혁신적인 대형항공우주시스템을 개발하는 업체와 국가연구개발 기관에서 의무적으로 도입하여 적용하는 체제이다.

이는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평가(진행단계 평가)와 사업 종료까지 예상되는 비용증가, 일정지연 수준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위험관리를 위한 사전적 조치와 이해당사자들간의 조정(예산, 일정 조정 등)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EVMS를 도입한지 이십년이 지난 선진기관에서도 여전히 이 방법론의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EVMS를 철저하게 도입한 미국의 F-35 사업은 양산가격이 두 배 수준, 운영비용이 80%가 늘어났다. 개발기간이 수년씩 늘어나는 문제를 제어하는 데도 효용이 없었다. (미국 GAO 의회 보고자료 참조) 우리나라의 한국형 기동헬기개발사업(KHP)에서도 EVMS 체제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양산가격이 초기 목표 대비 거의 1.5 ~ 2배 수준으로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력하였다. 그렇다면 EVMS는 무용지물인가?

미국에서는 항공기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혁신적 인공위성 개발사업에서도 EVMS를 적용하였고, 그 사례분석이 최근 의회 보고서로 제출되었다. 결론은 EVMS 적용결과 개발비용과 일정위험 관리에 있어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도 효과가 있었던 사업과 별 효과가 없었던 사업이 나뉘고 있다. 오랜 경험과 전문인을 정책적으로 투입하여 선진적 프로세스가 안정화된 뒤에도, 프로세스 자체만으로는 연구성과 개선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제 도입단계에 있는 우리나라의 연구개발관리체제 선진화, 즉 프로세스 중심의 연구성과 관리 또한 ▲기획단계의 혁신성과 구체성▲리더십▲조직문화와 같은 세가지 요인에 의해 그 효용성이 제한 될 것이다.

기획단계의 혁신성과 구체성이라 함은, 사업계획이 얼마나 도전적이고 좋은 아이디어에 근간하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일례로서 수 천가지 이상의 각각의 과업을 많은 인적자원을 투입하여 동시에 진행해야하는 규모가 큰 사업의 일정계획이 2주 단위 이하로 잘게 분해되고 서로 연계되어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밀한 사업계획은 혁신적이고 규모가 큰 사업기획일수록 불가능에 가깝다. 혁신성과 규모에 비례하여 불확실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선진기관에서는 대형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혁신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사업착수후 6개월 시점에서 사업목표의 조정을 포함한 사업계획 정밀화 작업을 진행한다.

부언하자면, 사업목표의 조정권한이 없다면 사업착수 후 사업계획의 정밀화, 구체화에 있어서 유의미한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즉 연구개발 체제의 거버넌스 문제가 여기에도 작용하는 셈이다.

리더십과 관련된 많은 요소중에서 프로세스 중심의 연구성과관리와 관계된 요소는 무엇일까? 선진적인 EVMS 시스템 도입을 통해서, 사업의 진행과정에서 사업위험, 기술적 이슈, 관리적 이슈를 조기에 파악하는 것은 첫 단추에 불과하다.

관건은 그렇게 파악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문제이다. 즉, ‘빨리빨리 해결하라’는 압박과 징벌적 관리의 논거로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조정-지원자로서 역할하는 선진적 리더십 발휘의 소재로 활용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만약 전자와 같이 활용한다면 프로세스 중심의 연구성과 관리는 결과중심의 연구성과 관리와 별 차이를 갖게되지 못할 것이다. 즉 관리자가 정확한 핵심정보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프로세스 관리체제는 왜곡될 것이다.

조직문화라 함은 상당히 많은 요소를 거론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한 조직문화 개선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 상황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관점을 축약해도 너무나 많은 주제가 떠오른다.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문제제기가 가능한 수평적 조직문화 ▲의사결정의 투명성과 안정성 ▲기관의 비전과 기술로드맵이 잘 연동되고 기술로드맵과 개별 사업이 정치하게 연결되는 체제 ▲이전 연구개발 사업에서 획득된 경험과 지식의 체계적인 축적을 보장하는 지식관리시스템 등등….
 
◆기획단계의 중요성과 대형체계개발 사업

이상과 같이, 기초기술/선행연구 단계의 연구성과 혁신의 길과 대형체계개발/양산개발 사업에서의 연구성과 혁신의 길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두 가지 성격이 크게 다른 사업에서의 공통점은 기획단계의 중요성이다. 프로세스 중심의 과학적 연구성과관리는 기획단계의 혁신성과 구체성을 담보할 정책적 환경과 제도의 개선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혁신적 기획과 관계된 4가지 요소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 기고를 꼼꼼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한가지 좋은 의문을 가지실 법하다. 연구성과혁신 측면에서 볼 때, 기초기술/선행연구와 확연히 차이나는 대형체계개발/양산개발 사업의 특성으로 거론되어야 할 한가지 요소가 거론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개발결과로 나오게 될 제품의 양산가격 수준이라는 요소이다. 대개의 대형제품개발 사업이 개발기간과 개발비용, 그리고 기술적 성공은 거두었으면서도 제품 가격에서 두배 혹은 다섯배의 가격으로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사업자체가 시장의 수요에 의해 시작되기 보다는 국가적 공공 수요로부터 시작한 연구개발 사업의 경우에는 시작단계부터 이러한 시장경쟁 요인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뿐 아니라 불합리한 측면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라도 진실은 필요성과 불합리성 사이에 있을 것이다.

개발목표가격의 적정 수준은 개별 사업의 특성, 투입되는 자원(예산, 일정), 관련 산업 생태계의 성숙수준, 해당 연구사업 이전의 관련 연구 히스토리, 관련 핵심기술의 성숙수준 (Technology Readiness) 등 여러 가지 여건과 관계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다각적인 측면이 종합적으로 충분히 검토되고 토론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개발전략과 제품가격 목표지표가 정의되는 ‘선진적 기획검증’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시장경쟁력 있는 가격을 충족할 수 없는 경우라도 국가적 필요에 의해 개발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기업의 최소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차액을 지원하고, 기획단계부터 정부가 부담해야할 차액지원 수준이 분석되고 정책결정에 반영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사결정과정의 일환으로 Open Innovation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즉, 거액의 투자와 유지비용이 드는 기술에 대해서 전면적 국산화 보다는 우방과 연합, 협력하여 개발 위험과 비용 부담을 분산하는 외교적 정책이 과학기술개발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Open Innovation 외에도 제품의 양산가격, 운영유지 비용 등의 시장가치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민군공용 활용에 기반한 'Dual Use' 개념, 모듈방식 부품개발, 제품양산 규모를 늘리기 위한 공통 플랫폼(Common Platform)개념, 단계적 제품성숙을 지향하는 진화적 획득 개념, 비핵심 부품에 대한 의도적 경쟁유도 방식, 핵심 부품에 대한 의도적 비경쟁방식(전문화-계열화), 핵심 기술보호를 위한 의도적 아웃소싱 억제 등 기술경영적인 요소가 기획단계부터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성공적인 기획이 가능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대형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성과개선의 길은 참 멀게 느껴진다. 분명한 점은 해외의 선진적인 프로세스를 흉내낸다고 개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구체적 실천안을 말해보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다양한 문제 사례를 나열할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의 변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원론을 더 깊이 파고들어 문제의 근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는 점. 둘째는, 정부관료 주도의 리더십으로는 어떠한 단편적 개선도 미봉책일 뿐이며 연구기획과 진행단계 성과관리 체제의 선진화에 관한한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문득 한 이야기가 생간난다. 깊은 숲속에서 어떤 현자가 길을 거니는 것을 보고는 나무꾼이 물었다. 길을 잃었느냐고. 그가 답한다 ‘목적지가 없는데 어찌 길을 잃겠습니까?’ 목표가 구체적이고 혁신적으로 초기에 정해지지 않으면 프로세스 관리는 무용지물이다. 과학기술정책의 목표는 그런 목표를 종용하는 것 이전에 그런 도전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실장은

현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연구기획조정실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을 10년동안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 서브시스템 체계종합과 착륙장치 PM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중입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을 통합한 장기적 항공우주 산업육성 전략, 항공우주분야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대형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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