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을 며칠 앞둔 월요일 아침, 독일에서의 마지막 편지를 쓴다.

지난밤에도 도둑같이 이슬비가 다녀간 모양이다. 빗물 자욱이 도로 위에 드문드문 남아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끼어 있다. 전형적인 독일의 겨울 날씨다. 진한 독일 커피를 두 잔째 마시며 독일에서의 지난 생활을 되돌아본다.

혹독한 수련(修鍊)의 기간이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많은 경험을 했다. 아마도 앞으로  나의 인생은 이곳 자르브뤼켄에서 겪은 일들로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자르브뤼켄도 유럽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을 겪었다. 한 때 석탄과 철강 산업의 중심지로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이곳을 차지하려고 했었다. 그 때문에 이 도시는 여덟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알사스 지방도 자르브뤼켄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트라스부르는 알사스 주(州)의 주도(capital city)로, 자르브뤼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있다.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이 국경지대 사람들은 전쟁이 결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공존할 수 있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을 택한다. 즉 주민들의 투표로써 자기들이 속할 국가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오늘날 이 지역의 국경선이 정해졌다고 한다.

또 다른 공존의 방법으로서, 그들은 1951년에 여섯 개 나라가 참여한 유럽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했다. 이것은 무기 제작에 필수 재료이고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을 평화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이 시작되었다. 스트라스부르에 유럽연합 의회가 있는 것은 이 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의 역사이건 개인의 성장사이건 이들에겐 공통된 요소가 있다. 즉 올바른 길을 찾아가기까지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거친다는 것이다.

독일을 배우기 위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독일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들은 앞다퉈 독일의 성공 신화와 기적을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독일의 실패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런 후 거기서 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독일 자르브뤼켄 인근에 있는 푈클링엔 제철소; 세계 최초의 현대식 제철소이며, UNESCO에 산업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독일 자르브뤼켄 인근에 있는 푈클링엔 제철소; 세계 최초의 현대식 제철소이며, UNESCO에 산업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독일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현대 과학기술이었고, 그 근저에는 독일에서 시작된 근대철학이 있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베여있는 정신이 있으니 바로 '합리성'이다. 우리가 독일인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합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성을 갖추어야 한다. 객관성이란 어떤 사안에 대해 이해관계자가 아닌 제3자적 관점에서 그 사안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성은 보편타당성을 지향하고, 지속성을 보장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제도나 조직이 오랫동안 지속되려면 정권이 바뀌든 기관장이 바뀌든 상관없이 그 존재의 타당성을 갖고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관점(객관)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KIST유럽연구소는 직원 수 70여명의 작은 연구소다. 그렇지만 한국의 여러 정부출연연구소들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와 함께 '독일에 있는 한국 연구소'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생기지 않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여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객관성이다. 객관성과 관련하여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의사결정의 첫 번째 규칙은 반대 의견 없이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렇지만 많은 결정 과정에서 시간적, 인력적인 이유로 이런 객관성을 갖추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나는 나름대로 이른바 '셀프 객관성'이란 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즉, 무엇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에 결정권자가 아닌 또 다른 나로 하여금 그 결정 사안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지만, 내 속에는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주어진 사안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보다 좀 더 객관적으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만큼 나라가 민주화 되었고 또 투명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많은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우리 국민들이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사람 중에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독일인들에게서는 쉽게 찾기 힘든 열정과 성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우리 방식대로 우리 것을 추구해야 할 때다.

마지막 편지에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을 남긴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이제 막 싹이 텄기에 뿌리가 내리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데…."

아쉬움이 남은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 어쩌면 더 행복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출발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종교에서는 인생의 마지막조차도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나를 흥분시킨다. 마치 독일에 처음 왔을 때처럼…. 그 동안 졸필을 읽어주시고 또 격려해주신 여러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프랑스 알사스 주의 주도인 스트라스부르; 뒤에 보이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프랑스 알사스 주의 주도인 스트라스부르; 뒤에 보이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이호성 KIST유럽연구소장은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 소장.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 소장.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