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소름 끼치는 가르침
저자 찰스 다윈

1844년 다윈은 동료 후커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종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살인을 고백하는 것 같군요) 거의 확신하게 되었습니다.(초기의 내 의견과는 정반대입니다). 제가 라마르크처럼 '발달을 향한 경향' '느리지만 자발적인 동물의 의사에 따른 적응' 등과 같은 허튼소리를 하는 일이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다다른 결론은 그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변화의 수단은 크게 다르지만 말입니다."

'종의 기원' 초판이 1859년에 나왔으니 올해로 출간된 지 155년이 되었다.

생물학자 헉슬리는 이 책을 읽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라며 감탄했다. 여기서 '그것'이란 철저한 과학적 사고와 증거를 토대로 다윈이 증명하고자 했던 단 하나의 사실, '종은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다'일 것이다.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이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다윈은 '종의 기원'을 썼다.

이제 헉슬리와 같은 유레카를 경험하기는 어렵지만, '종의 기원'이 수많은 관찰과 연구자료를 토대로 한 과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놀라운 고전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라도 다윈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다윈은 어느 한 구절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심오하게 세워놓은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들 스스로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을 거쳐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다윈이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 위해 인용한 사례들은 방대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서, 그 시절에 엄청난 자료와 정보를 어떻게 모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종의 기원'의 아주 매력적인 특징 하나는 다윈이 자기 이론을 증명하는 어려움을 흔쾌히 인정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향에 따라 몇몇 사실에 대한 설명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려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내 이론이 틀렸다고 할 것이다." 다윈은 자신도 충분히 맞설 수 없는 심각한 반대를 예상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고 본인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와 합리적인 논리를 구축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종들이 어떻게 변형되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완벽한 구조를 갖추게 되고 서로 적응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의 기원'이 눈부신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다.
 
'종의 기원'은 다윈 생전에 모두 여섯 개의 판이 출간되었다.

대부분의 연구서는 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거나 이전 내용에 수정이 가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종의 기원'은 당시 워낙 논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다윈은 판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했고, 일부 내용은 삭제했다.

한길사에서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번역 출간하기도 한 역자 김관선(페어리디킨슨 대학교 강사?생물학)은 '종의 기원'의 초판본이 다윈의 의견을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보고 이를 한길그레이트북스 133권 '종의 기원'으로 펴냈다.

또 과학적 전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읽고 정확히 이해하도록 최대한 잘 읽히는 우리말 번역본을 내놓으려 노력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비글호 탐험…5년에 걸친 6만 4300킬로미터의 항해 

"너는 사격과 개 경주, 쥐잡기 말고 좋아하는 것이 없으니, 너 자신과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다윈의 아버지가 어린 다윈을 훈계하며 했던 말이다. 꽤나 엄한 성격의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다윈의 아버지는 그가 대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다윈은 의학공부를 지루해하고 수술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수술 실습 때는 공포에 떨며 달아났다고 한다. 결국 다윈은 중도에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크리스트 칼리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는 과학교육의 기본을 다졌고 자연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며 식물학과 지질학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다. 특히 식물학 교수였던 헨슬로는 다윈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케임브리지의 시골을 오랫동안 걸으며 그들은 동료가 되었다. 그는 식물을 채집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또 한 명의 성직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1831년 영국의 해군본부가 지구 남반구의 항해조사를 목적으로 파견하는 비글호에서 자연과학자 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헨슬로는 다윈을 추천했고, 그는 5년 동안 세계를 항해했다.
 
다윈에게 비글호 항해는 그가 말한 대로 경력의 전부였다. 이 여행을 통해 다윈은 과학자로서 명성의 기초를 다졌고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믿음도 흔들리게 되었다.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다윈은 채집하고 관찰하면서 남아메리카 대륙, 태평양과 남대서양 섬들의 동식물상과 지질학적 형성에 대해 밝히려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도 방문했다. 약 6만 4,300킬로미터 거리의 항해를 통해 다윈은 브라질 정글 지방의 열대식물에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에 이르는 자연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식견을 얻게 되었다. 이는 과학자로서 얻기 힘든 기회였다.

'비글호의 항해'로 알려진 연구지는 다윈이 집에 돌아와 발간한 것으로, 한 자연과학자의 여행 기록이었다.

이 책은 동식물 분포의 의문점들, 기관의 소멸과 이용처럼 '종의 기원'에 나오는 논의에 필요한 많은 결정적인 주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종의 고정성을 의심하다

"아마도 이들은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비글호 여행에서 종의 고정성에 대한 다윈의 의심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다만 다윈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공개한 항해일지는 종의 문제에 대해 그가 이미 고심하기 시작했으며 연구 작업 또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윈은 1837년 7월에 종의 변화에 관한 첫 번째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 화석과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종의 특징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러한 충격은 내 견해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다윈은 자연과학자인 동료 헉슬리와 후커 등이 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자기 생각을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종의 기원'이 발간되기 전 몇 해 동안 그는 종종 자기가 편집광이나 괴짜가 아닌지 궁금해했다.

다윈은 항해에서 관찰한 몇 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개개의 종이 독자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이한 것이었다. 다윈이 열정을 품고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고 수집했던 생명체와 화석들은 여러 가지 단서와 기이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가 서쪽으로 여행할 때면 아주 비슷한 동물들이 왜 차례로 나타나는가?

-사라진 화석종은 살아 있는 동물들과 왜 구조적으로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가?

-갈라파고스 제도의 되새류와 거북류는 왜 섬마다 약간씩의 변이를 나타내는가?

-아주 비슷한 종들은 이웃 간에 닮아 있으며 동일 지역에서는 시대별로 닮아 있다. 아마도 이들은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종이 서로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가설은 그럴듯하지 않은 것 같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과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얻은 영감

다윈은 정말 필요한 순간에 새로운 지질학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라이엘이 새롭게 출판한 '지질학 원론' 초판을 가져가 비글호에서 읽었다. 남아메리카의 식물상과 동물상을 그 지역의 지질학에 관련시켜 연구하고 사라진 종의 화석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엘에게 훈련받은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다윈에게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도 인정했듯이 화석 기록은 불완전했다.

1837년 다윈은 종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지만, 아직도 설명이 부족했다. 성체의 우연적인 변화가 아닌 유전될 수 있는 변화의 근거가 생식에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우연적인 변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다윈은 1838년 말 자손에서 무작위적으로 일어났던 유리한 변이가 자연선택된다는 해답을 찾았다. 이러한 변이와 환경의 변화 그리고 자연은 안정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변화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형질을 갖춘 개체들은 좀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종을 형성할 것이다.'

이것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다윈이 얻은 영감이었다.

◆'종의 기원'의 거대한 구조 

'종의 기원' 제1장은 일반적으로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논의로 시작된다. 인간에 의한 선택적인 교배에 따라 가축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선택적인 교배자들의 손에서 자연은 그 형태가 다양하게 변해갔다.

제2장은 자연에서 관찰되는 더욱 미심쩍은 변이를 다룬다. 다윈은 생존경쟁 때문에 변종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생물체와의 무한히 복잡한 관계에서 그 종의 한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그 개체는 보존되려는 경향을 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형질은 자손에게 전달될 것이다. 다윈은 이 지점에서 보조적인 개념으로 성선택을 소개했다.

이처럼 제3장에서 제5장까지 다윈은 '생존경쟁' '자연선택' '변이의 법칙'을 다룬다. 자연선택으로 되돌아와 다윈은 가장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조건을 논의했다. 또한 명백한 반대가 있을 것을 예상하면서 그 과정이 극도로 느리다는 것과 작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다윈은 유전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기 전에 글을 썼다. 그럼에도 그는 확신이 있었다.
 
'이론의 어려움'이라는 제목의 제6장부터 제9장까지는 다윈의 방어활동을 보여준다. 다윈은 복잡한 기관과 본능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운 반대 의견과 잡종은 불임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여 제기된 '종은 변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주장 그리고 종의 변화에 대한 화석 기록의 단절 등에 관해서 솔직하면서도 강하게 응답하고 있다.

그 뒤에 이뤄진 이 분야의 연구는 다윈의 제안을 토대로 출발했으며 그의 견해를 강화해주었다.

제10장에서 다윈은 다시 공격적으로 바뀐다. 그는 화석 기록이 비록 단절되어 있긴 하지만 연속적인 창조설보다는 진화를 지지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머지 장들은 정돈의 특징을 띠고 있다.

원시적이고 흔적적인 기관의 존재와 발생학에서 비롯된 부차적인 논쟁이 정렬되어 있다. 이로써 생물학의 발달과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사고는 새롭고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다윈은 인간의 고리가 다른 동물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보이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감정적인 유대를 자른 것일지도 모른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은 맹목적인 우연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다른 동물과 투쟁하는 외롭고도 지적인 돌연변이였다.

어떤 이에게 이러한 상실감은 큰 것이서, 마치 탯줄이 잘려나가고 '차갑고 냉정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다윈의 '적자생존'을 나름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윈주의를 특별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윈은 적응을 언급했지 '진전'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선택을 진전의 열쇠로 받아들였다. 경쟁 단위로서 개인,품종, 계급 등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이론은 급진적으로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출처: 교보문고, 출판사: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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