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변했는데 여전히 '2류 연구풍토'…화석화 심각[업그레이드 - 연구풍토①]과학계 90% "변화 시급" 응답

연간 국가 R&D투자 18조원 상회. 최근 10년간 140조원 투자. 국내총생산(GDP) 대비 R&D투자규모 세계 1위.

R&D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의 한 관료는 이런 수치를 이야기하면서 정부가 대대적으로 R&D투자를 해왔는데 과학계에는 왜 성과가 안보이는지 답답해 했다.

과학자들은 정부에 너무 단기적 성과를 요구한다고 불만을 갖는데 정부 입장에서는 매년 십조원이 넘는 투자를 했으면 기초연구든 응용연구든 사업화연구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성과가 보여야 하고, 단계적으로 국가적인 육성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 관료는 "연구를 했으면 성과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100개 과제를 했으면 적어도 30개는 괜찮은 것이 나와야 한다"며 "한국 과학계에 의미있는 성과를 낼 수 있으려면 근본적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은 공무원들이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학도 출연연도 기업도 '카피현상' 만연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연구과제 기획 컨설팅 전문기업 K 대표는 매번 과제기획을 위해 찾아오는 새로운 연구자를 만날 때마다 실망을 한단다. 일단 문제의식이 없다. 자신의 연구가 왜 필요한지를 정확하기 이야기하지 못하고, 외국에서 했던 연구를 자신이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K 대표는 "미국 과학자들의 경우 해외에서 연구한 것은 연구 안한다. 굳이 기술적 대안이 존재하는데 경쟁하려 애쓰지 않는다"며 "한국 과학자들은 자기 연구가 왜 필요한지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따라가는 연구에서 성공해 봐야 2등 3등 밖에 안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한마디로 한국 과학은 루저들의 게임판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연구를 기획하는 방법론이나 사고방식 프레임을 바꿔야 하는데 누구도 바꿔주지 못하고 누구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연구자들은 그저 해오던대로 그럭저럭 일을 하는 것 뿐이다.

개개인의 연구관행에서 벗어나 연구기획과 기법들이 개선돼야 하는데 소위 '내 분야는 내가 최고'라는 생각에 공부도 안하고 투자도 하지 않는 상황에 K 대표는 개탄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최우수 연구자로 평가받는 P 박사는 "우리 과학계가 40~50년 동안 외국에서 하던 것을 따라가는 연구를 해왔다"며 "여전히 우리는 지금도 대학교수나 출연연 과학자, 기업 모두 카피연구에 능하다. 이것이 가장 쉬운 연구플레이"라고 자조섞인 현실을 털어놨다.

또 출연연의 한 과학자는 "우리네 현실에서 새로운 과학이 나오기가 상당히 힘들다"며 "공공성 있는 연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있는 것 연구하고 있다"고 평했다.

한 때 출연연과 연구과제를 함께 했던 J 벤처기업 대표는 "출연연 연구에 업계에서 관심이 없게 된 이유는 기업들과 별반 다를게 없고, 혁신성있는 아이템이 없기 때문"이라며 "알맹이를 결국 연구자들이 채워야 하는데 그것을 못채우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PBS 과제 보다 못한 '출연연 기관고유사업'?…'나눠먹기 예산' 자성의 목소리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은 기관 차원에서 중장기 국가 발전을 위해 자체적으로 연구개발 사업예산을 투입해 연구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잘 활용만 하면 새로운 국가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혁신적이고 공공성이 강한 기관고유 사업과제들이 있긴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내부 이해당사자들간 나눠먹기식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있고, 주요사업도 결국 개선연구 내지는 외국 기술을 따라가기 바쁜 과제들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연구현장에서 공공연하다.

사실 전체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과제 현황을 보면 모두 연구 아젠다가 세계적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고 모두 첨단과 창의적 사업과제를 지향하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연구소 고유 임무에 맞기도 하고 꼭 필요한 사업으로 보이지만, 평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관고유사업 역시 '빛 좋은 개살구'로 이야기될 때가 많다.

오히려 기관고유사업 때문에 연구자들이 안주하게 돼고, 나눠먹기식 편가르기식으로 과제가 분배돼다 보니 연구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양상이다.

특히 기관고유사업일수록 조직적 연구를 통해 장기적이고 창의적 성과를 목표로 운영돼야 하는데 대부분 과제기간이 기관장 임기와 같이 3년 내에 종료된다. 결국 기관장이나 선임연구부장 등 경영진 입맛에 맛는 방식으로 사업이 운영되고, 과제 선정의 공정성 문제가 고착화되다시피 하고 있다.

한 출연연 전직 기관장이 기관고유사업 모든 과제를 개인과제화시켜 개인주의를 더욱 팽배하게 만든 사례는 연구현장에서 알만한 과학자들은 웬만큼 다 안다. 이 연구소의 한 과학자는 "한 때 연구 논문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기관고유사업 과제가 쪼개지다 보니 조직적 연구는 사라지고 단기 성과에 급급하고 의미없는 논문만 쏟아지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다.

1개 출연연 당 기관고유사업 예산으로 투입되는 연간 예산은 한국천문연구원처럼 소형 출연연이 384억원 수준이며, 한국원자력연구원같은 대형 출연연의 경우 1215억원에 이른다. 중간 규모의 출연연은 매년 500~800억원의 예산이 기관주요사업비로 투입된다.

지난해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B 관계자는 "주요사업들이 창의성과 필요성 수준을 보면 PBS과제보다 못하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는 "PBS는 외부평가를 받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평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주요사업은 외부평가가 없기 때문에 연구소 내 관리시스템이 어떤 형태로든 갖춰줘야 연구자들의 성과를 관리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밝혔다.

B 씨는 원장을 배출한 연구그룹에 기관고유사업 예산이 우선 배정되는 현상이 나오고, 도전적 과제나 의미있는 연구를 위해 배분되기 보다 나눠갖는 사례가 많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출연연 한 관계자는 "100억원 밥상이 차려졌는데 5년 미래에 필요한 것을 투자할지, 단기간적으로 나눠먹을지를 선택하라면 쉬운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라며 "연구소나 이사회에서 고유 임무를 정해 처음에 잘 포장을 하면 외부에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누가 관리하고 알겠느냐"고 답했다.

또 한 과학자는 "연구소들마다 기관고유사업이 타깃팅하는 기술적 내용이 노력은 하지만 외국 기술 따라가기 바쁘고 혁신성이 떨어진다"며 "기관주요사업이 제대로 되려면 목표에 따라 철저한 성과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요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 과제현황<표=대덕넷 취재팀>
주요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 과제현황<표=대덕넷 취재팀>

 

◆ PBS체제로 미래를 담보 당한 위험한 과학계…설문 응답자 96% "과학계 변화 필요"

연구현장에서는 여전히 인건비 벌겠다고 연구과제 따러 움직이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러한 습성이 이미 과학계를 둘러싼 한 문화가 돼버렸다.

1996년 연구자간 경쟁을 일으켜 성과중심으로 과학계를 만들겠다고 시작한 PBS(Project Based on System:연구과제중심 운영체제)가 과학자들에게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PBS때문에 연구자는 앵벌이 월급쟁이 신세가 됐고, 교수와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창조적 파괴와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현장 과학자들은 이같은 화석화된 문화를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지 개혁하지 못하면서 제2 제3의 문제가 계속 쌓이는 양상이다.

20년 가까이 계속돼 온 PBS 체제가 퍼스트 무버(1st mover) 패러다임에 맞는 성과창출과 정면 배치되는 결과를 낳고 있는데 여전히 개선은 더디기만 하다. 과학자들에게는 슬픈 이야기이고, 국가로 보면 희망이 사라지는 암울한 이야기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탓인지 과학계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변화 필요성을 묻는 설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을 96%에 이르는 답변을 내놨다. 242명의 응답자 중 131명이 매우 필요하다(54.1%), 101명이 필요하다(41.7%)로 답했고 단 1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머지는 답변 포기 의사를 보였다.

 

 

변화의 시급성을 묻는 설문에도 90.5%(219명)에 이르는 응답자가 매우 시급 또는 시급하다고 답했다. 시급하지 않다는 5.4%(13명)의 비율을 보였고 나머지는 기타 및 포기 의견이었다.

 

 

한국 과학계의 패러다임 전환 시점에서 연구현장의 현실을 묻는 질문에는 반응이 엇갈렸다. 비교적 잘 변화해가고 있다는 반응이 41.7%(101명)로 나온 가운데 '매우 변화하지 못했다' 21.9%(53명), '변화하지 못했다' 32.2%(78명)의 결과가 나왔다. 나머지는 기타 및 포기 의견이었다. 이번 설문은 지난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6일간 한국 과학기술계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과학계 한 원로는 "과학자들 스스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의 길로 들어서야 하지만 과학자만 바뀔 게 아니라 연구비 투자나 정책에 대한 패러다임도 같이 개혁돼야 한다"며 "정부 관료들도 실질적인 현장의 소리를 듣고 연구그룹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는지 보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연구가 나오도록 정책 입안과 제도를 혁신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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