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읽어주는 공학도…"딴짓 해도 연구 잘해요"

[별난사람]손준보 美위스콘신대 박사과정생…日방문객 5000명 육박
"평생 산업공학도로 살겠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파워블로거 '산공벼락'도 바로 나"

"저는 제 연구에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고, 아마 평생을 산업공학도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는 꿈도 아직 마음 속 깊숙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사이비 공학도라거나 '딴짓 한다'며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보디빌딩을 하는 의사나 록 밴드를 하는 회사원처럼 본업 외에도 열정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사이비공학도도 실력 있는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미국 유학 중인 우리나라 공학도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화제다. 개설 4년 반 만에 258만 명이 다녀갔고, 일 방문객이 5000명에 육박한다. 특히 미국에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워킹데드(The Walking Dead)' 원작과 관련해선 드라마 팬들이 한 번쯤은 다녀가는 '성지(聖地)'와도 같이 여겨지고 있다.

'미국만화책연구소(http://sonjunbo.blog.me/)'라는 이름의 인기 블로그 주인은 바로 손준보 씨.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를 학부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박사학위 취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유학생이다. 창문도 없는 연구실에서 집과 실험실만 오가며 4년째 시스템 고장(failure) 예측모형을 통계적으로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는데, 그가 바깥으로 낸 숨통 같은 온라인공간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의 소개대로라면 "이야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박사과정생이자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불쌍한 공대생"이 어떻게 파워블로거로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그 비결을 들어보고자 그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 "좋아하는 주제여야 즐겁게 작성…내 흥미와 대중 관심 일치할 때 공감 반응"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뿔난 표정을 지어보인 손준보 씨.<사진제공=손준보 씨>
손준보 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미국만화책연구소'는 지금은 만화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더 인기가 많지만 처음엔 유학정보를 소개하고자 블로그를 개설했다.  

"유학을 준비하며 유학커뮤니티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제가 아는 정보를 공유하고자 '산공벼락'이라는 닉네임(nickname)으로 활동했는데, 그때부터 제 글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그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해졌어요. 이후 유학 경험을 정리해서 게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로그를 열었죠."

손 씨는 "블로그를 통해 유학 문의를 해오던 분이 저처럼 위스콘신대로 유학을 와서 같이 만나 밥을 먹은 신기한 경험도 있다"며 "블로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보람을 느껴 영어공부 이야기도 쓰게 되고, 독서나 여행 이야기도 공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블로그에 만화책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도 스스로가 좋아하기 때문. 그는 "미국만화책들은 SF장르가 아주 많은데 SF는 이공계생들에게 있어 자양분 같은 존재"라며 "전혀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비현실적 '판타지'이지만 그렇게 SF를 읽으며 성장한 이공학도들이 음식을 배달해주는 웨이터 드론(drone)을 만들어 하늘에 띄우고 공중부양이 가능한 보드(board)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국에 유학 오며 더 쉽게 미국만화책을 접할 수 있었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그의 블로그는 만화책, 독서, 유학, 여행 등 4개로 분류된 단순한 구성이고, 글의 개수도 280여개로 많지 않다. 4년 반 동안 한 달에 5건 남짓 올라온 정도. 그러나 글 하나 하나마다 정보와 재미가 충만해서 한 번 알게 되면 계속 찾게 된다. 이유는 해당 주제들이 그의 흥미와 대중들의 관심이 일치하는 분야기 때문. 경험과 열정이 묻어나는 그의 글은 단박에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특히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것은 만화책. 그는 좋아하는 만화책이 발간되면 구입해서 정독한 후 내용을 요약하고, 중요한 장면을 캡쳐(capture)해서 함께 올린다. 손 씨는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제 요약문만 읽으면 만화의 흐름을 편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며 "리뷰(review) 하나를 올리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연구가 바쁠 때는 때맞춰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손 씨가 유학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한 유학준비는 '결혼'이었다고. 학구적인 아내를 만나 공부의 재미를 알게되었고, 지금은 식구가 하나 더 늘어 더욱 큰 책임감으로 연구에 매진 중이다.<사진제공=손준보 씨>

최근 미국만화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인기를 끌면서 손 씨의 블로그 방문객이 많아졌고, 전 세계 125개국에 동시 방영되는 워킹데드가 국내에서도 IPTV 시청률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높아지자 덩달아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져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고 전했다.

"연재가 조금 늦어지면 이메일과 쪽지를 통해 많은 분들이 항의를 해옵니다.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시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주시는 친절한 쪽지도 있지만, 더러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있습니다. 박사 4년차에 접어들며 바빠져서 요즘도 연재가 밀리고 있는데, 읽지 않고 쌓여있는 쪽지들을 확인하기가 두렵습니다."

또 간혹 블로그를 통해 공개된 그의 정보를 보고 유학생이란 걸 알고 나면, 공부는 안 하고 부모 돈으로 만화책 보며 인생 편하게 산다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찾기 위해 12개 학교에 지원서를 냈고, 연구가 너무 바빠 아름답기로 유명한 캠퍼스 호숫가를 2년 만에야 구경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종종 불쾌한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연구를 하니까 남는 시간만큼은 좋아하는 소설과 만화책을 읽고 그런 것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소통하고 싶다"며 "응원하고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서 아직까지는 기쁜 마음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훌륭한 공학자 될 것"

파워블로거로서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지만 손준보 씨의 본업은 연구다. 비록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문학 소년이 마음 속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지만, 군대 제대 후 "후회 없이 해보자"며 시작한 공학 공부를 지금은 진심으로, 최우선으로 좋아하게 됐다.

박사과정 4년차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고. 손 씨는 26개월된 딸을 넓은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에서 키우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사진제공=손준보 씨>

그는 현재 두 가지 연구를 진행 중이다. 먼저 지난 4년간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 자동차 배터리 수명 예측 통계모델링을 연구해 왔다. 그는 "보통 노트북이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원을 차단시키는 것처럼 자동차 배터리도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주기적으로 교체를 해주어야 한다"며 "센서를 이용해서 자동차 배터리로부터 여러 가지 신호들을 수집하고 그 신호들을 바탕으로 배터리 수명을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통계모델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미 여러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다.

또 다른 연구는 천식환자의 건강 상태 분석이다. 최근 착용형기기(Wearable device)가 발달하며 천식 환자들이 항상 휴대하는 흡입기에 블루투스를 장착, 환자가 흡입기를 사용하면 사용한 위치와 시간을 정확히 저장해서 데이터 서버로 전송하는 장비들이 상용화 되어 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실시간으로 수집한 흡입기 사용 패턴을 분석해서 특별히 위험한 수준으로 천식 증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환자들을 가려내 담당 의사에게 알려주는 형태의 통계 모형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 쓸 만큼 몰두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전공분야에 대해서 블로깅 할 계획은 없다. 아직 산업공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인정받는 학자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손 씨는 "현재는 훌륭한 공학자이자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라며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점에서 교수와 소설가는 공통점이 많고 내 적성에도 맞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학에 대한 소신을 전했다.

"이공학도들은 문학을 억지로라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통해서 논리와 수학이 결여된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 같아요. 무라카미 하루키나 천명관 작가의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소설을 읽으며 이해하거나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경험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 오고 2년간은 캠퍼스 구경도 못할 만큼 연구실생활이 바빴지만, 최근엔 연구에 이력이 붙어서인지 조금씩 여유가 생겼고 가족들과 주변을 산책하며 축복 받은 자연환경을 즐기기도 한다.<사진제공=손준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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