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외 선진 사례에서 배울 것은 방법론 수준 이상이어야

일본 제조업의 맏형 토요타, Toyota Way라는 신조어가 생길만큼 그들만의 독특한 경영스타일과 성과창출문화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기업 CEO와 주요 인사들이 현지방문 등을 통해 토요타 배우기가 열풍이었다. 그러나 경영학자들은 "토요타 방식은 고유한 조직문화를 바탕으로 한 소프트웨어의 저력이기 때문에 몇 달간의 훈련으로도 결코 배워질 수 없으며, 그 이면에 있는 경영철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철학! 상대의 철학은 배울 수는 있어도 카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만히 뒤돌아보자. 우리 대다수가 눈 감고 귀 닫고 다만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근대사의 현실, 그래서 "생존"이라는 가치와 단기적인 경제성과 외에는 가치공유지대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빠른 사회발전과 팽창에 이은 새로운 방향의 모색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해야 할 일은 공동의 가치와 철학, 특히 미래의 희망을 잉태할 철학의 모색이지 않을까?

일자리 창출, 우수 중소기업 육성, 대학교육의 지역평준화와 산업연계 연구 강화, 마이스터(장인) 교육시스템을 통한 기술 전문인으로서의 경로제공과 강력한 산업연계성 확보, 지역 경제 활성화, 노동자 경영참여권 보장 등 선진적 노사문화가 안착된 독일은 모든 면에서 한국이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산업적 성과를 잉태한 독일의 교육 특성, 특히 연구소와 연계한 대학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이를 지원하는 막스플랑크 연구소나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운영 특성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표면적 운영 방법론보다 그 이면에 있는 교육, 노동, 국가 출연 연구소 운영에서의 독보적인 운영철학을 읽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율성의 보장, 인권의 보장, 권한 집중의 견제라는 철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초등학교에서부터 ‘모의 노사교섭’이 일상화된 수업으로 자리 잡혀 있어, 기업 경영에 관한 자료들이 주어지면 학생들은 스스로 경영자 대표와 노조 대표들을 뽑아 협상을 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단체교섭 부분 목차를 보면, 항의 문건을 만들고 협약을 체결한 다음 언론과 인터뷰하는 요령, 연설문을 작성하는 방법까지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는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 인문·실업계 공통으로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까지 가르친다.' (한겨레, "한국 노동교육 전무...독일 초등학생은 단체교섭 배워", 김소연 기자)

놀랍지 않은가! 초등학교 때부터 모의 노사교섭 훈련이라니! 이러한 특성을 잉태한 가치와 철학은 나찌즘에 독일의 대다수가 침묵하거나 동조한 사건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잉태된 것이라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사회 분열이나 이데올로기의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객관적 사실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교육 철학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협약을 통해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결과는? 삼성경제연구소와 조선일보 등은 2002년 전후로 독일 제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바로 이러한 강력한 노조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했지만,  독일의 노사관계는 어느 나라보다 협조적이고 경영은 투명하다. 노조는 책임감을 공유하게 되어 임금인상 요구에 치중하지도 않으며, 이직률도 낮다. 2002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오해한 유럽의 골칫거리 독일 경제는 2012년 경상수지 흑자액 1835억유로로, 유럽연합(EU) 전체 흑자액(1120억유로)보다 많다. (경향신문, "독일 노동자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제' 한국 도입 가능할까", 박정호 KDI 연구위원)

독일을 배우려 하는 한국을 방문한 독일 기민당의 사무총장 하이너 가이슬러는 몇 해 전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이 독일의 경제 제도를 도입하려면 '풀세트'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몇몇 제도만을 선택적으로 도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토요타 사례가 중첩되는 부분이다. 교육연수 받는다고 해서 토요타 웨이를 배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므로.

2. 정부 R&D 혁신안 – 세 가지 우려와 대안

그동안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오랜 논의 끝에 PBS 제도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연구자의 자율성의 중요성, 연구과제보다는 연구자 중심 투자의 중요성,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제도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연구 제도와 문화를 바꾸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오랜 시간의 합의와 성숙 과정을 요구한다. 특히, 그 변화의 과정은 체질개선 과정과 같이 근본적 의식의 변화와 환경 개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장기적 과제라는 전제위에서,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성 정립과 우선순위 구분, 그리고 이와 관계된 철학을 공고히 하는 일이며 그것은 투명하고 인내하는 소통과정을 통해 합의되고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체제적 변혁을 꾀할 때에 가장 중요한 전제사항은 지속가능한 변화를 구상할 수 있는 권한 즉, 중장기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변혁을 위한 모든 피땀과 작은 열매조차 머지않아 시들고 제자리로 회귀할 것이다. 추격형 연구개발에서 선도적 연구개발로의 체제 전환은 이전과 다른 리더십 모델, 그리고 거버넌스 체제 개편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런 힘든 주제를 잠시 논외로 하고, 최근 발표된 정부 R&D 혁신방안은 몇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보인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실과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다소간 비약과 오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먼저 양해를 구하고 졸견을 피력해 본다.

첫째, 문제의 본질적 해결보다는 대증요법식, 현상적 해결에 방점을 둔 측면이다. 일례로, 한국형 프라운호퍼 연구소로 혁신하기 위해 6개 기관(ETRI, 생기원, 전기연, 화학연, 기계연, 재료연)의 민간수탁 제고율을 높이는 방향성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이러한 혁신적 변화를 유인하는 정책으로 제시된 "수탁실적과 출연금 지원을 연계", "민간수탁 실적 우수기관에 별도 정원 인정 등 인센티브 부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혁신적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지속될 수 있는 장기적 환경조성보다는 그러한 변화를 초단기에 강제할 제도와 인센티브만 고안된 듯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근원으로 파고들어 가보자. 출연연의 낮은 사업화 성과와 대조되는 충격적 사실이 무엇인가? 그것은 100%에 가까운 R&D 과제의 성공율이다. 과제가 성공했는데 사업화 성과가 낮다면 근본 원인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기획단계의 목표설정(혁신성)과 진행단계의 목표조정에 관한 문제 2) 기업의 연구개발 니즈와 연구 과제의 연계성 부족 (자세한 사항은 다음 절, '둘째' 부분에서) 3) 사업화를 위한 장기적 계획가운데 원천기술 확보 전략의 부재 (장기적 계획이 부재한 원천기술 혹은 원천기술 개발이 부재한 단기개발)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응축하면 기획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연구 사업의 기획의 질을 혁신적으로 제고할 방안이 금번 혁신안에 포함되어 있는가?

둘째, 현실성 부족한 해법 부분이다. "출연연·대학의 중소·중견기업 연구소화"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왜 출연연이나 학교와 R&D 공유·협력이 잘 안되는지에 대한 깊은 진단이 필요하다. 독일과 달리 강소형 중소기업 생태계가 열악한 우리로서는 중소·중견기업의 R&D 수용성이 낮음을 고려해야 한다. R&D 수용성이 적절한 중소기업은 출연연·대학과 협업을 원치 않는다. 기술정보의 유출로 연구자나 학생, 교수가 잠재적 경쟁 기업을 창업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이를 고려한 독일의 교수창업 금지 원칙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스스로 새로운 혁신적 제품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설계로 구현-검증할 연구개발 수요를 가진 기업은 많지 않다. 이러한 기업에 출연연·대학의 우수한 연구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일 수 있으나 부작용 우려도 있다. 이미 다양한 중소·중견기업 전담 지원 사업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실적 역시 매우 낮은 수준이다. 2014년 OECD 한국 보고서의 권고는 오히려 과도한 재정적, 제도적 지원을 줄여 중소·중견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 것을 유도하는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서 한 발 물러서서, 중소·중견기업과 출연연·대학 연구의 상관성이 자연스럽게 커질 수 있는 확고한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이미 일본, 유럽, 미국 등 선진 연구기관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방법이다. 즉 국가 연구소 연구자들의 인건비를 100% 국가가 지원하고 바로 이 연구자들을 활용한 연구사업을 중소·중견기업이 인건비 부담 없이 직접비만 자가 부담하고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연구자를 직접 고용하는 경우에 비해 10%(소형과제의 경우)에서 30%(중대형 과제의 경우) 수준의 개발 비용으로 연구수행이 가능하니 기업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보다 구체적인 대안제시까지 해보자. 현재 출연연의 인적 구성에서 여러 정책보고서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기술직 인력 충원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술직 인력이 연구직으로 흡수되든지 새로운 사람을 뽑을 TO가 없어 어렵게 축적한 기술 (그렇지만 시장성이 충분하지 않아 사업화 하기는 어려운)이 전수되지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있음이 최근 보고된 바 있다. 기술직은 도전적 연구, 선행 연구의 효율성 개선에 있어서 특히 중요하여 선진 연구기관도 일정 수준의 기술직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작년에 세계 최초로 첫시도에 화성 궤도에 위성 진입을 성공시킨 인도의 ISRO는 같은 해에 비슷한 임무로 화성 궤도선을 투입한 미국에 비해 1/9 비용과 절반의 개발 일정으로 성공해 내었다는 배경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충격과 부러움을 받고 있다. 1/9! 영화 Gravity 제작비도 안되는 비용이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1969년 설립이후 지금까지 우주사업과 관련한 부품제작을 외부에 용역으로 주지 않고 모두 In-House로 개발하면서 기술역량을 꾸준히 축적한 것이 주효한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In-House 전략은 선진기업에서 경쟁배제를 위해 선택적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이 전략은 국가가 전략적으로 꾸준히 축적해야 하는 전략기술에도 매우 유효함을 ISRO 사례가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시장규모나 시장경쟁력 성숙이 덜 된 상황에서 산업화를 서두르면 예산이 절감되지도 경제적 파급효과도 없이 오히려 기술역량만 흩어지고 고가의 연구개발구조가 고착화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도 기술직 인력을 늘린다면 출연연의 다양한 선행연구를 빠르고 완성도 높게 프로토타이핑(시제작, 시제품 개발)할 수 있고, 연구개발의 완성도와 기간이 짧아져 장기적으로는 사업화 성과도 높아질 것이다. 대학과 중소중견기업의 연구진들이 출연연의 기술진과 협업하여 공동프로젝트를 수행할 수도 있고, 기술직 인력을 중심으로 중소·중견 기업과의 공동연구실 형성과 기술전수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대기업 중심 구도로 활력을 일어가는 국내 산업구조에 일대 변혁을 일으킬 엔지니어링서비스 모델로서 중소·중견기업 성장의 모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해법으로 제시된 '정부-민간/산학연 간 중복해소'와 'R&D 기획 관리체제 혁신' 방안의 구체적 내용들에서 그동안의 관행과 구태(그 주체가 누구이든)를 바꿀만한 혁신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Fast-Track 예타나 예타면제로 R&D 성과 비효율성 문제에 관한 책임이 가장 큰 '기획 부실'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도전적 창의적 연구 문화의 안착이나 성과 높은 선진적 연구시스템의 안착이 단지 '성실실패'보장이나 '평가시스템의 강화', '추적평가'등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중복성 해소는 참으로 오래도록 거론되는 주제이지만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중복성 문제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중복을 허용할 만큼 중요한 미래선도형 연구과제를 식별하고 경쟁적으로 기술개발을 시도하게 하거나, 재도전을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것이라고 본다. 기획단계에서 연구사업의 도전성과 불확실성을 장려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획의 혁신성과 목표의 도전성에 대해 상대적인 평가와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자발적으로 안정빵 기획과제를 회피할 수 있는 유인책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한 가지 혁신적 대안을 예시하여 보자. 국방핵심기술의 경쟁개발 장려이다. 기술발전 속도, 기술의 전략적 중요성, 기술의 파급력에서 독보적인 영역이 바로 국방기술이다. G7 경제 강국들은 모두 국방기술 지원을 통한 민간 산업 지원과 고도화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기획, 수행 체제에 있어서 더 많은 공개경쟁과 혁신성으로 개혁되지 않으면 만년 추격형을 벗어나기 어려울 만큼 서방국가들의 국방기술을 중심으로 한 혁신의 속도는 빠르다. 실제로, 아직도 우리는 번번히 선행기술 확보의 부족, 혹은 개발한 기술의 조기 진부화 때문에 상당수의 국방핵심기술과 부품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그 내역을 따지고 보면 민간영역에 충분한 시간만 주어졌더라면 얼마든지 국내개발이 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중요한 것은 국산화 개발이라는 성과나 개발 가능성이 아니다. 국방 획득사업의 특성상 개발의 완성도가 강조되지만, 기술 혁신의 속도를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국방기술은 10년 전에도 선진국 대비 80%, 지금도 80%, 향후 10년 후에도 80%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국방연구개발을 통해 수많은 벤처를 양산해 내는 모델을 우리도 이뤄낼 수 있다. 따라서 국방중장기계획과 연동한 선행기술 개발은 국방부문(ADD)과 민간부문이 중복적으로 경쟁 개발하는 체제를 장려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3. 무엇부터 고칠 것인가?

복잡한 문제 해결에서 문제 해결의 우선순위와 철학을 정하는 것은 간과되기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백화점 식으로 나열된 해결책들은 사실상 본원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단 한 가지라도 핵심을 고치는 방안이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열된 대안들에 빠져 있는 핵심 한 가지를 말하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화두를 생각할 때이다. PBS를 완화한다고 하지만 정작 PBS를 통해 파생된 근본문제점 - 각 출연연 고유의 임무와 발전방향을 중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없었던 문제 등 - 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 연구사업 기획, 관리제도에는 혁신적, 도전적 연구과제 기획을 유인할 제도적 장치와 리소스가 부족하다. 혁신적 기획을 장려할 제도적 장치는 다음 세 가지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기술적 혁신성, 산업니즈와의 연계성, 그리고 연구수행 체계에 있어서 장기전략과 부합하는 Roles & Responsibility의 정의와 조정. 특히 기술적 혁신성이 타과제보다 탁월할 경우 과제 수행관리의 인센티브(자율적 목표조정 등)와 평가과정에서 인센티브(100% 성공 못하더라도 성과가 우수할 경우, 성실실패 인정만 아니라 계속 사업 기회 제공 등)제도가 적절히 설계되어야 한다. 전자의 두 가지, 즉 기술적 혁신성과 산업니즈와의 연계성이 담보된 기획이라 하더라도 Roles & Responsibility 관점에서 기관 혹은 국가의 장기전략과 연계된 핵심기술 개발을 아웃소싱(혹은 해외구매)에 의존하게 되면 그 기획은 부실한 계획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대형 국가 연구사업 검토 체계에서는 어떤 기관이나 산업체의 중장기 전략만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중장기 전략에 근거한 Roles & Responsibility 심의 조정이 필요하다.

'Roles & Responsibility의 정의와 조정' 이 부분은 조금 더 다뤄보자. 현재 국가 연구사업이 대형화 되고 추격형에서 선도형 체제로 전환이 요구됨과 동시에 국제협력(기술력을 바탕으로 한)증대의 요구가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OECD가 지적한 국제협력 강화의 필요성은 기술도입이나 기술의존에 기반 하는 국제협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체적인 핵심기술력을 바탕으로 하는 대등한 국제협력이 관건이다. 따라서 Roles & Responsibility의 정의와 조정에 있어서 '기관차원'의 고유임무에 기반한 장기 전략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국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국제협력 전략을 조정하고 사전부터 준비해야할 필요가 커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해외협력선과의 Roles & Responsibility 협상 권한을 누구에게 어떻게 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권한을 국가의 기술미래를 꿈꾸고 선도할 출연연의 고유한 미션으로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수명이 짧고 비전략적인 기술 영역에 국한된 국제협력이 되어 결국 국익에 반하는, 무늬만 국제협력이지 사실상 알맹이는 없는 그런 형국이 될 소지가 있다.

이상으로 언급한 기술적 혁신성, 산업니즈와의 연계성, Roles & Responsibility의 정의와 조정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과제 기획 단계부터 기획안을 총괄하고 정책적으로 조정하며 이끌어 갈 수 있는 전문가 중심의 연구기획총괄·조정 주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특히 ‘수퍼-연구자’의 존재와 관계된 문제이다. 선도형, 혁신적 연구과제일수록 기획이 8할이라고 믿는다. 전문성과 윤리성이 검증되고 사명감이 투철하며 해당분야에서 산-학-연의 이해관계와 현실을 고르게 이해하고 균형 있는 안목을 가진 고경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기획조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임무부여와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중장기적으로 성숙시켜갈지에 관한 구체성과 정책성(예산만 아니라 공공수요 창출 계획 등 국가의 의지가 실린 정책)이 반영된 기술로드맵이 없다면 사실상 기획조정은 탁상공론에 빠지기 십상이다. 가야할 목표를 드러내는 지도가 없으니 그때그때 주먹구구식 기획조정이 이뤄질 뿐인 것이다.

책임은 자율성의 대가이다. 출연연의 연구성과 문제는 출연연 연구자의 자율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상당부분 제도와 정부의 리더십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무엇부터 고칠 것인가? 선진 연구기관의 운영철학 - ‘국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 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운영철학 위에서 장기성과 안정성을 기반으로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매우 정교한 견제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점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구체성과 실효성(예산과 인적 자원이 반영된)을 갖춘 중장기 기술개발로드맵을 꿈꿀 수 없는 환경, 자체적 기획조정 범위가 매우 한정된 환경에 처한 조직에 대해 과연 얼마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무엇부터 고칠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외의 몇몇 좋은 사례를 방법론적으로 추종하는 형태여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 바탕이 되는 견고한 철학, 그리고 환경의 차이를 들여다 보고 가시적 변화를 서두르기 보다 기초부터, 방향성부터 확고히 다져가야 한다. 그동안 여러 가지 시도와 대책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변화가 없었던 근본 원인에 대한 물음과 분석도 중요하다. 독일의 놀라운 교육 시스템, 노사 협력 체제가 2차 대전의 전체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듯이…. 역사가 토인비가 말했듯이 '과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부의 R&D 혁신은 매우 힘겨운 도전 앞에 있다는 점이다. 체제전환 수준의 혁신안이 요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산을 넘기 위해 불철주야 고뇌하시는 여러 정부관계자들과 리더십 되시는 분들의 고뇌 앞에 다시 한 번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내면서 사실과 배경에 대한 이해가 짧은 졸견에 넒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안오성 항우연 실장은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실장은 '안오성의 과학기술정책'을 타이틀로 현재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제도 개선의 화두중 반복되어 제기되거나, 첨예한 이견이 있는 주제에 대해 역사적, 문학적,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안오성 실장은 현재 항우연에서 항공기획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을 10년동안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 서브시스템 체계종합과 착륙장치 PM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중입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을 통합한 장기적 항공우주 산업육성 전략, 항공우주분야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대형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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