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사이언스코리아 – 해외기획취재]연구경영③'연구자 중심 행정 시스템' 풀가동…실험 위한 모든게 다 있는 'R&D 쇼핑몰'최신 고가 장비시설 마음껏 활용…테크니션 존중 문화

"우리의 하루 업무시간 중 연구에 집중하는 시간이 90~95% 정도는 될겁니다. 박사후 연수과정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처럼 정부에 보고서 써내는 행정업무는 이곳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으며, 연구소 행정의 모든 것이 연구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미국 NIH L 연구원)

"정부 지원 연구비는 물론 외부 펀딩 연구비도 모두 연구소 행정부서에서 관리한다. 80여개의 막스 플랑크 각 연구소마다 규모 차이는 있지만 대형장비실, 테크숍, 비품숍이 마련돼 있어 연구자들은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독일 막스 플랑크 K 연구원)

미국과 유럽, 일본 등 과학 선진국의 연구자들은 오직 연구에만 몰입하는 분위기다. 예산관리‧정부 보고서‧평가 등 전반의 서류작업은 행정부서에서,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연구소 내 설치돼 있는 테크숍에서 일사천리로 처리한다.

정부 부처 관료들에게 보고할 자료를 쓰고, 평가 보고서와 연구비 정산처리 문제 등 각종 행정 업무에 상당 시간 할애해야 하는 한국의 연구현장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과학 선진국들에서 만난 과학자들은 "연구자들이 연구 이외의 업무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와 기반이 잘 갖춰져 있다"며 "한국의 연구기관들은 연구자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 행정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한다.

◆ 행정과 연구 철저하게 분리…연구에 몰입하는 연구자들

핵폐기물 처분 안전연구소(INE) 소장을 비롯해 유럽연합 원자력관리위원장 등 유럽 과학계의 리더로 40여년간 지내온 김재일 재독과학자는 헬름홀츠 산하 연구소 소장 재직시 정부 연구비와 외부 펀딩 등 수천억 원의 연구 프로젝트 예산을 관장했다. 하지만 그가 그 많은 프로젝트 예산에 직접 관여한 적은 한번도 없다. 전체 연구 프로젝트의 예산관리는 행정부서에서 모든 것을 관리했다. 연구자는 정해진 기준에서 사용한 영수증을 행정부서에 제출하면 됐다.

막스 플랑크 협회도 연구와 행정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는 구조다. 협회 산하 83개의 연구소마다 행정부서가 별로도 운영돼 연구자는 연구에만 집중한다.

기관 평가시에도 연구자들이 동원되지 않는다. 평가단에 제출할 보고서 등 자료 준비도 행정부서에서 모두 담당하는 구조로 연구자들은 평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원칙의 과학문화가 존재한다.

미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과학자들의 일상이 연구활동이지 행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국립보건원(NIH) 과학자들은 행정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모든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NIH 산하 27개 각 연구기관마다 'administration office'가 있어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가령 학회 참석 후 모든 경비에 따른 영수증과 이에 상응하는 간단한 서류만 제출하면, 여행경비 담당 비서가 이를 모두 일괄 처리해 환불까지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박사후 과정 연구자들에게도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행정 지원을 다한다. 외국인 박사후 과정 연구자들에게는 무엇보다 비자(대부분 2년 후 한번 연장할 수 있는 J-1 비자) 갱신 문제가 중요한데, 이때도 담당 비서가 서류를 준비해 NIH 내부 변호사에게 제출하면 변호사들이 알아서 이민국에 서류를 제출하고 모든 과정을 처리한다.

또, NIH는 연구 활성화를 위해 IT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주력해 왔다. 데이터를 넣으면 곧바로 임상실험 계획과 분석, 방법 등에 대한 모든 제반사항 결과가 나오게 하는 위저드(Wizards) 방식의 IT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중이다. 이 시스템은 환자를 보느라 바쁜 NIH 의사들도 연구를 왕성하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미국 군사전문 기술개발 연구재단 DARPA(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 역시 연구책임자의 행정적 업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예 행정 업무를 아웃소싱한다. ‘The Office of Naval Research’와 같은 외부 기관 사무계약직을 통해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 필요한 시설 장비 깐깐하게 구입하지만 연구에 필요한 인프라 완벽
 

 

한국에서는 값이 비싸 쉽게 신청하기 어려운 액체헬륨캔이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는 사인하나만으로 얼마든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다.<사진=길애경 기자>
한국에서는 값이 비싸 쉽게 신청하기 어려운 액체헬륨캔이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는 사인하나만으로 얼마든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다.<사진=길애경 기자>

 

독일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물리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S 박사 과정생은 과정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계획으로 독일에 왔지만, 지금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연구할 당시 연구에 꼭 필요했지만 1캔에 2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액체헬륨을 한번도 필요한만큼 마음껏 쓸수 없었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오니 달랐다. 액체헬륨캔을 언제든 간단한 사인만으로 얼마든 사용할 수 있었다.

S 연구원은 "연구에 사용되는 액체헬륨 가격이 만만치 않아 한국에서는 신청할 때마다 눈치가 보였던게 사실"이라며 "막스 플랑크에는 헬륨 리커버리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재료를 마음껏 쓰면서 연구에 재미가 더해져 연구하느라 늦게까지 남고 주말에도 나오고 했더니 리더가 쉴때 쉬어야 한다고 조언하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연구소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대형 장비실과 비품 저장고를 갖추고 있다. 연구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대형장비를 별도의 공간에 설치해 운영하는 장비실부터 연구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간단한 소모품과 연구재료를 언제든 갖다 사용할 수 있는 비품숍까지  갖춰져 있다.

물건 하나를 구입할때마다 청구서를 작성하는 일은 없다. 소모품은 연구자의 사인만으로 고가의 재료는 그룹 리더의 사인만 있으면 구입이 가능하다.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 내에는 비품 숍이 있어 연구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한 소모품부터 연구 재료를 갖다 쓸수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 연구소 내에는 비품 숍이 있어 연구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한 소모품부터 연구 재료를 갖다 쓸수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NIH에도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비품숍과 같은 공간이 있다.
NIH 본원 연구소 지하 2층 '셀프 서비스 스토어'가 있다. 일종의 R&D 쇼핑몰이다. 실험을 위한 각종 시료와 기구들이 즐비해 있다. 1회용 숟가락부터 DNA 킷, 실험장갑, 분석시약 등 실험에 필요한 모든 게 있다. 연구자들은 연구소카드로 100만원 내외는 마음껏 구입해 사용한다. 별도의 IT 주문시스템이 있지만, 이것도 연구자들은 귀찮아 해서 직접 내려가 카드로 결재해사용한다.

NIH에는 실험장비 전담 매니저가 별도로 있어 각 연구실마다 장비에 대한 업그레이드를 신속히 대응해 준다. 덕분에 세계에서 첨단 고가장비들을 가장 먼저 사용하는 그룹이 NIH 연구자들이 된다. NIH 연구자들도 유지비만 1만불이 드는 수억원짜리 장비를 사용하는데 부담이 없다.

1초에 3천개 셀을 분석할 수 있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장비를 비롯해 디지털 PCR, 6가지 색상으로 세포를 분석할 수 있는 유세포분석기(Flow cytometry) 등 NIH 연구자들은 최신 장비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효율을 맛보며 연구에 임한다. 연구장비를 제 때 구입을 못해 연구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는 만들지 않는다.

 

 

NIH 본관 병원 지하 2층에 있는 R&D쇼핑몰 'NIH supply center'(위), 최의묵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연구원이 R&D 쇼핑몰에서 실험 시약을 구입하고 있다.(아래) <사진=김요셉 기자>
NIH 본관 병원 지하 2층에 있는 R&D쇼핑몰 'NIH supply center'(위), 최의묵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연구원이 R&D 쇼핑몰에서 실험 시약을 구입하고 있다.(아래) <사진=김요셉 기자>
 

 

◆ 막스 플랑크 연구소마다 '테크니션 숍'…NIH 실험실마다 '테크니션 활약'

"막스 플랑크 연구소마다 테크숍이 따로 있고 테크니션들은 모두 정규직이다."

막스 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에서 그룹리더로 참여했던 김상규 박사(IBS 유전체교정연구단 연구위원)는 독일의 테크니션 제도에 부러움을 표시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테크숍이 갖춰져 연구자들은 언제든 테크니션과 논의하며 아이디어를 구체화 할 수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막스 플랑크 연구소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테크숍이 갖춰져 연구자들은 언제든 테크니션과 논의하며 아이디어를 구체화 할 수 있다.<사진=길애경 기자>

테크니션은 대부분 우리나라 기준으로 하면 기술전문학교(독일의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기능직으로 막스 플랑크의 연구원으로 참여한다. 프로젝트 그룹 리더는 연구 진행시 연구자와 테크니션, 행정직 비율을 조정하는데 테크니션은 연구자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정규직으로 독일의 급여 방식(학위 기준)에 따라 급여를 받지만 기간이 늘면서 호봉이 올라 연차가 높은 마스터 테크니션의 경우 연구자보다 급여가 많은 경우도 다수다. 또 평가에서도 연구자와 차별대우는 없다.

근무 조건에서도 충분히 조율이 가능하다. 슈투트가르트 막스 플랑크 테크숍의 한 테크니션은 육아문제로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해야 했다. 조직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연구자들은 그의 일정에 맞춰 지원을 의뢰했다.

우리나라는 테크니션이 점점 사라지며 기술 공황이 우려되고 있지만 독일은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온 젊은 테크니션이 지속적으로 충원되며 기술강국 독일의 버팀목 역할을 톡톡이 하고 있다.

일본의 테크니션은 각 연구소에 소속돼 안정적으로 연구자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테크니션에 대한 대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테크니션 스스로의 자부심이 크다. 또한, 연구자와 테크니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다. 테크니션에서 시작해 연구자로 전직하는 경우도 꽤 있다. 연구자들도 테크니션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미국 NIH 역시 연구자와 밀착돼 실험데이터를 분석해 주는 테크니션들이 실험실마다 1명꼴로 활동하고 있다. 테크니션들도 연구자들처럼 평생 직업으로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다. 만약 실험실이 없어져도 테크니션은 새로 신설되는 실험실에 0순위로 추천돼 일하게 되는 직업 문화가 존재한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가진 연구자를 위해 모든 실험실 문을 자동문으로 교체한 것도 NIH의 ‘연구자 중심’ 행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NIH의 청각 장애 연구자들에게는 전담 수화 통역사가 배치돼 온종일 그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기도 한다.

 

 

청각 장애 연구자에게는 수화 통역사가 전담 배치된다.<사진=김요셉 기자>
청각 장애 연구자에게는 수화 통역사가 전담 배치된다.<사진=김요셉 기자>

◆ 노벨상 수상 배경…실용화 위해 뛰는 행정지원 인력 가동

"LED 램프는 전기 공급이 어려운 전 세계 15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쐈다."(노벨상 수상 위원회가 밝힌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유)

아카사키 이사무 나고야 대학 교수가 2014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첫 걸음을 내딛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아키오 이시다 JST(Japan Science and Technology Agency) 스태프 멤버. 이시다 씨가 아카사키 교수를 찾아간 것은 1985년 11월이었다. 아카사키 교수 연구실에서 투명한 질화갈륨(gallium nitride) 결정체를 본 그는 보통 결정체가 아님을 직감했다.

당시 이시다 씨는 아카사키 교수의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고 실질적인 실용화 성과를 만들기 위해 JST(과학기술진흥기구)의 산학 공동연구 펀딩 프로그램인 A-STEP에 합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카사키 교수는 '본인은 순수 학문에 집중하는 연구자일 뿐'이라며 거절했다. 이시다 씨는 아카사키 교수를 여러 번 찾아가 설득했지만 번번이 'No'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 달 후, 이시다 씨의 끈질긴 설득에 아카사키 교수가 "도요타 고세이(Toyota Gosei·豊田合成)란 기업이 내 연구 결과에 관심이 있다"며 그들과 연결시켜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시다씨의 직관과 판단, 끈기가 청색 LED의 실용화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히로유키 카네코 JST 산학공동개발부 부장은 "노벨상 수상의 배경에 아카사카 교수가 수행하는 연구의 탁월성을 사전에 직감하고 상업화 하도록 적극적으로 그를 설득한 이시다 씨 같은 행정 지원 구성원들이 있었다"며 "그 당시에는 일본 전역의 실험실을 돌아다니며 좋은 과제를 찾아다니는 부서가 있었고 그들이 추천한 연구 테마는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히로유키 카네코 부장에 따르면 현재는 이노베이션 프로모션 매니저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 주제를 찾아내고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과제가 공모로 진행되므로 매니저들은 지원 심사에 응모하도록 제안하는 일을 하며 심사할 때 이런 부분들도 고려가 된다. 매니저들은 임기가 없고 특정 부서에 속하지 않으며 각 분야 협력의 중심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한국 과학계 한 원로는 "우리나라 연구환경이 70~80년대 맨땅에 헤딩하던 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할 수준으로 발전을 이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행정체계와 시스템은 아직 개선되어야 할 요소가 많다. 무엇보다 연구자 중심 경영으로 한국 과학계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히로유키 카네코 부장이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배경에 JST의 A-STEP 프로그램과 스태프 멤버였던 이시다 씨의 산학연계 노력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히로유키 카네코 부장이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배경에 JST의 A-STEP 프로그램과 스태프 멤버였던 이시다 씨의 산학연계 노력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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