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관점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해외 간행물 폐기와 관련해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도 가치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관점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보니 해결접점의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 지속돼 지켜보는 내내 힘들었던게 사실이다.

9월 초 지인에게 지나는 말로 "KISTI가 많은 책자을 버린다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정리는 필요한 과정이겠지만 과학기술정보 전문연구기관이 많은 책을 버린다는 소리에 간과할 수 없는 직업적인 끌림이 있었다.

취재를 위해 출입절차를 밟고 KISTI 별관 3층 자료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상자가 즐비하고 이를 나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이곳이 자료관이 맞나싶어 다시 확인까지 했다.

자료관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에 바구니들도 놓여있다. 또 들쑥날쑥 높이로 아무렇게나 놓인 책, 학술지 등이 창가마다 빼곡히 올려져 있다. 그 옆 기둥에는 '폐기 확정'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감시관처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런데 어림잡아 보아도 상당한 분량이었다. 책자의 제목들을 보니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잡지 단행본도 있었지만 바이오 분야부터 농업, 특허, 화학 등 다양한 해외 간행물들도 보였다. 이공계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전공자라면 욕심이 날만한 초창기 자료들도 있었다.

4층 자료관은 오래된 책자 특유의 향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즐비한 서가, 그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자들. 과학불모지 대한민국을 과학강국으로 이끄는데 기반이 됐을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별도의 자료가 보관된 곳에는 논문 원본을 그대로 필름에 담은 마이크로 필름이 서랍 속에 정리돼 있었다. 연구자들에게 최신 정보를 제공하며 과학기술정보 서비스를 위해 KISTI가 쏟아온 노력들이 필름마다 배어 있는 듯해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자 저널이나 전자 자료의 활용도가 커지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근간이 됐던 오프라인 간행물들의 활용도가 매년 큰폭으로 감소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관계자에 의하면 활용도가 떨어지면서 관련 예산과 인력도 감소, 있는 자료도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 때문인지 서가 곳곳은 먼지가 보였고 장비는 관리가 안돼 구석에 이름없이 놓여 있기도 해 안타까운 상황이다.

기관 운영진이라면 기관의 방향성과 효율적인 기관 경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당연히 기관의 경영 방침에 따라 활용도가 낮은 자료들은 정리할 수도 있다. 부족한 예산과 환경에서는 누구도 그리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0년간 우리나라 과학발전과 역사를 함께 해온 해외 간행물들을 폐기 결정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가치의 관점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버리기는 쉬워도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50년간의 가치들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구성원과 기관 운영진이 사명감과 원활한 소통으로 좀더 일찍 흐름을 간파해 이런 자료들이 방치되기전에 곳곳에 알리며 활용 방안을 논의할 수 는 없었느냐 하는 안타까움도 크다. 또 폐기하기 보다 KISTI 본연의 미션인 과학기술정보연구원답게 과학기술 정보 서비스 기관의 보물로 재가공해 국민 모두가 이를 공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본지 기사가 나간 후에도 KISTI 내부에는 해외간행물 폐기 찬성과 반대의 논란이 여전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는 가치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로 쉽게 좁혀지지 않겠지만 기관 고유의 미션에는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을 테니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또 본지 기사를 본 국립중앙도서관이 폐기 책자 논의를 위해 KISTI에 방문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역사적 자료들이 폐기되는 것보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렇다 할 종합과학도서관이 없다.

우리는 정부와 기업, 기관, 국민 모두 선진국 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수치보다 우리의 미래 인재를 키워줄 과학도서관 건립과 이런 문화를 존종하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 진입이 아닐까.

과학기술정보 전문연구기관인 KISTI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따라서 폐기, 이관 대신 국립중앙도서관의 지원을 통해 적절한 예산 투입과 사명감 있는 인력 보강으로 새 숨결을 입은 해외 간행물 등 과학기술 자료들을 KISTI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KISTI 별관 4층에 마련된 자료관에 들어서면 즐비한 서가와 칸칸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자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랜된 책이 주는 향기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기반이 됐을 자료들을 직접 볼 수 있어 느낌이 남다르다.<사진=대덕넷>
KISTI 별관 4층에 마련된 자료관에 들어서면 즐비한 서가와 칸칸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자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랜된 책이 주는 향기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기반이 됐을 자료들을 직접 볼 수 있어 느낌이 남다르다.<사진=대덕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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