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왕 박사의 노벨상이야기下]내가 만난 노벨상 수상자들

세계적인 연구업적 중에서도 세기의 발견을 한 과학자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행운에 속한다. 나는 연구인생 60년간 미생물학분야에서 최초로 병원체를 발견한 과학자는 3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동안 내가 직접 만난 노벨상 수상자는 의학상 수상자 3명을 포함해 총 5명이다.

◆ 황열병백신을 만든 막스 테일러 박사

Max Theiler 박사.<사진=Wikimedia Commons 제공>
Max Theiler 박사.<사진=Wikimedia Commons 제공>
첫 번째로 만난 수상자는 1965년 9월에 뉴욕시내에 있는 록펠러(Rockefeller) 연구소에서 만난 1951년도 수상자인 막스 테일러(Max Theiler) 박사였다. 그때 나는 일본뇌염연구를 NIH연구비로 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최신 연구정보와 기술을 얻기 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연구소를 방문한 것이다.

테일러 박사는 황열병백신을 만든 공로로 노벨의학상을 받았기에 나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황열병은 열대지방에서 모기에 물려 생기는 열병으로 간장이 손상되어 황달이 생기는 열병이며 우리들이 아프리카나 남미로 갈 때 모두가 그의 백신을 맞아야 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국적이었지만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아주 인상 좋은 아저씨 같은 분이었으며 매우 겸손하게 절족동물매개바이러스의 항혈청을 복수종양을 가진 생쥐에서 만들고 있다고 자기가 하는 일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은 학자임에도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생각으로 황열병예방백신을 만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우연이었다(It was an accident.)"라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에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는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작은 것이고 우리들의 제일 큰 문제는 인구증가라고 말했다.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나는 그를 1977년 2월에 뉴헤이븐(New Haven)에 있는 예일대학교 절족동물매개바이러스 연구소에서 다시 만났다. 12년 후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때 나는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하고 미국 NIH 초청으로 미국내 유명연구소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강연 후 다과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아주 많이 늙어보였고 대학에는 시간나는대로 특별강연같은 것을 듣기 위해 온다고 했다. 그의 나이 70대 후반이었으나 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나의 새로운 연구방법이 앞으로 20년간은 쓸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했기에 기분이 좋았다.

◆ 쿠루병 연구의 대가 칼턴 가이듀섹 박사

Carleton D. Gajdusek 박사.<사진=wikipedia 제공>
Carleton D. Gajdusek 박사.<사진=wikipedia 제공>
두 번째로 만난 의학상 수상자는 1976년에 뉴기니(New Guinea)의 쿠루(kuru)병 연구로 수상한 칼턴 가이듀섹(Carleton D. Gajdusek) 박사다. 그는 미국 NIH 지연성바이러스연구부 부장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학자였는데 1978년 2월 나의 초청도 없이 자기발로 서울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역사적으로 한국을 찾은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내가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으며 자기 눈으로 나의 연구결과를 직접 보고 사실여부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는 6.25때 미국 육군 군의관 대위로 출혈열연구를 했는데 일본에서 군용기로 의정부에 있는 미군 출혈열환자 병원에 여러 번 다녀갔다고 했다. 그때 국무총리를 지내신 김상협 교수가 고대 총장이었는데 총장실에서 가이듀섹 박사를 만난 김총장이 그에게 조선시대의 한양지도를 선사하고 저녁에는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중국요리도 대접하면서 나에게 그를 잘 접대해야 좋은 일이 생긴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 후 그와 나의 관계는 친구사이로 발전했으며 그가 2011년에 사망할 때까지 2년씩 교대로 그의 미국 NIH연구실에서 연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독신이고 뉴기니에서 20여명의 소년을 양자로 미국에 데려와 공부시켰다. 말년에 이 중 한 명의 미성년 남자아이와 성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1년 하게 되는데 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광우병에 관한 발언이 정치화된 복잡한 내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이듀섹이 워싱턴 비행장 입국자 수화물검사대에서 두 명의 FBI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갑을 채우고 체포되어 연행되었는데 현행범도 아닌 사람은 이럴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은 가이듀섹이 2일 후에 UN본부의 강당에서 광우병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사전에 제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이 노벨상수상자에게 무자비한 구속을 선행한 데에는 그럴만한 깊은 사연이 있는게 분명해 보였다. 국익에 반하는 행위는 절대로 묵과하지 않는 것이 미국이란다. 그가 옥중에서 나에게 보낸 편지 30여통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순진한 과학자였는데 가끔 말이 몇 시간씩 길고 많은 것이 탈이었다. 그는 6개 국어와 수개 종류의 뉴기니 원시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도 능통한 언어학자이며 천재적인 분석 능력을 가진 과학자였다. 한국형출혈열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장염의 원인이 동일하다고 1950년대에 주장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2011년 노르웨이에서 85년 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 한국인 제자를 자랑하던 하워드 테민 박사

Howard Martin Temin 박사.<사진=Nobelprize 제공>
Howard Martin Temin 박사.<사진=Nobelprize 제공>
세 번째로 만난 의학상 수상자는 1975년에 종양바이러스의 유전자연구로 노벨의학상을 받은 위스콘신대학의 하워드 마틴 테민(Howard Martin Temin) 박사이다. 우리는 1987년 7월에 위스콘신대학의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그는 약속시간에 2층 복도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만큼 예의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위스콘신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캐나다의 강칠용 교수가 우리들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대학로 근처의 햄버거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자기 제자인 강 박사의 자랑을 많이 했다. 나하고 전공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학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이가 나보다 많아서인지 형님같이 다정한 분이었다.

◆ 중국계 미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 양전닝 박사

양전닝 박사.<사진=wikipedia 제공>
양전닝 박사.<사진=wikipedia 제공>
네 번째로 만난 수상자는 195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중국계 미국인 양전닝(楊振寧) 박사인데 1998년 11월에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의 중화민국중앙연구원에서 만났다. 나는 태평양과학협회(PSA) 한국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고 그는 대만 대표 겸 회의 의장이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다변이었고 대만의 연구정책과 학술연구단지 내 연구시설 자랑만 한 시간이나 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학자풍보다도 행정가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 겸손하고 예의바른 일본의 노요리 료지 박사

노요리 료지 박사.<사진=대덕넷>
노요리 료지 박사.<사진=대덕넷>
다섯 번째로 만난 수상자는 일본의 노요리 료지 박사(野依良治)로 2001년에 촉매를 이용한 불재수소화반응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학자이다. 2004년 대한민국학술원 창립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겸 아시아학술회의(SCA) 학술대회를 조선호텔에서 개최하였는데 그때 내가 SCA 의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초청연사로 초청했다. 그는 아무 조건없이 쾌히 승낙하고 서울에 왔다. 노벨상을 받은 직후였는데 특별한 강사료도 지불하지 않았다. 영어가 서툴다 하여 통역관을 내세우고 일본어로 강의한 기억이 난다.

그때 100여명의 서울대학교 화학과 학생들이 회의장을 메웠다. 그는 겸손하고 젊고 예의바른 일본이었고 그 후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학술원 명예회원으로 모셨다. 현재 일본의 유명한 이화학연구소의 이사장이다.

이상과 같이 다섯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보았으나 그들에게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보통사람과 같았고 도리어 보통사람보다 더 겸손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대만의 양 박사만은 수상 후 연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행정가로 변신해 고급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직업이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 탄생 후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여 왔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생각났다.

나는 2001년도 노벨상 수여식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자격으로 초청되어 참석한 일이 있다. 수여식은 스웨덴 국왕이 참석하고 스웨덴 국가가 울려 퍼지는 국가적 행사였다. 또 전국 각지에서 온 어린 남녀고등학생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식장 내외에서 참가자의 안내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예쁘게 보였다. 이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고 세계화에 앞장서게 하는 교육의 일환이라고 했다. 

선진국의 문턱을 갓 넘어선 우리나라 국민이 노벨상 115년의 긴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란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뿐이다. 이것도 세계 유일의 분단된 전쟁 위험이 있는 국가의 대통령이 받았기에 의의가 크며 또 이것으로 우리도 노벨상 수상국의 대열에 끼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를 찾아 온 첫 번째 노벨상 수상자는 의학상을 받은 가이듀섹 박사이며 1978년이었다. 이렇듯 세계적인 학자의 방한이 1970년대 말에서야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국제학술교류가 미약하고 늦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적 학술교류도 과학수준이 비슷해야 잘 이루어지며 또 훌륭한 과학자들은 그 나라의 귀중한 지적재산이며 국력인 것이다. 어쨌든 하루속히 우리나라에서도 노벨과학상, 문학상, 또는 경제학상 수상자가 탄생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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