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씨의 위험한 고민>

원종우 필자 소개: 필명 파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록 뮤지션으로 데뷔하고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 2008년 SBS 창사 특집 환경 다큐멘터리 〈코난의 시대〉 작가로 휴스턴 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과학 팟캐스트 방송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저서로 《과학하고 앉아있네》 《태양계 연대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가 있다.

 ◆ 종말 시나리오③: 문명 종말

종말 시나리오 3가지 가운데 마지막은 바로 '문명의 종말' 입니다. 문명의 종말은 인류도 꽤 살아남았고 생태계도 비교적 멀쩡한데 문명이 멸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만약 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 대중교통, 전력공급, 의료와 위생서비스, 쓰레기 수거 가운데 하나라도 기능이 정지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상하수도 시스템이 정지하면 단 몇 시간 만에 수도 권 지하철은 물에 잠길 겁니다. 의료 서비스가 중단되면 당장 전국의 중환자들이 목숨을 잃고 장기적으로는 가벼운 질병만으로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전력공급이 끊기면 위에서 열거한 나머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핵전쟁이 벌어져서 각국의 도시가 궤멸된다면 우리는 다시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과학기술은 구석기로 퇴보하고 세상은 중세의 야만을 닮아갈 겁니다. 중세의 잔인성이나 중세의 부도덕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 목숨 하나 지키기 어렵고 폭도로부터 딸과 아내를 지키기 급급할 겁니다. 남자는 더욱 참혹한 노동과 원시 전쟁의 도구로 쓰이다가 죽고 여자는 번식과 성욕의 대상으로 끌려다니다가 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와 기술의 욕망까지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문명이 붕괴한 상황에서는 구석기인보다도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핵전쟁이 당장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통해 2017년까지 핵무기를 1500기로 줄이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2015년 현재 전 세계에는 아직도 17,000기 이상이 존재한다. <사진=메디치미디어>
미국과 러시아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통해 2017년까지 핵무기를 1500기로 줄이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2015년 현재 전 세계에는 아직도 17,000기 이상이 존재한다. <사진=메디치미디어>

◆ 인류를 구한 한마디 "컴퓨터의 오류인 듯하다"

전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이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짜 영웅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바로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라는 소련군 소령입니다. 그는 적국에서 만약 이상 징후가 발견되거나 핵미사일이 포착되면 상부에 보고를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983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사상 최악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했고 한국의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 벌어졌습니다. NATO는 전면적인 핵공격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고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지병으로 누워 있어서 전 소련군은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1983년 9월 26일 자정. 페트로프 소령이 근무하던 관제센터에 핵전쟁 경보가 울렸습니다. 그가 담당하고 있던 인공위성으로부터 "미국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한 발을 발사했다"는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소련의 고정식·이동식 핵미사일 발사대에 비상이 걸렸고 페트로프 소령은 졸지에 핵전쟁을 시작할 권한을 떠맡았습니다. 미국의 ICBM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극도로 짧았습니다. 페트로프 앞에서 핵전쟁 시작 버튼이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페트로프는 소련의 대도시 다섯 개가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정말로 핵공격을 하려 했다면 모든 핵미사일을 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섯 개밖에 안 쐈을까?' 실제로 핵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ICBM 수천 개로 선제공격을 하여 상대를 초반에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핵미사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섯 발만 쐈다가는 똑같이 핵미사일로 보복을 당해 패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페트로프 소령은 핵전쟁 취소 코드를 입력하고 상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컴퓨터의 오류인 듯하다."

후에 이 사태는 '인공위성이 태양빛을 미국의 ICBM 발사 섬광으로 잘못 해석하여 보고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로 퇴보할 뻔한 위기에서 전 인류를 구한 영웅입니다. 1983년 9월 26일 이후의 모든 인간은 페트로프 소령 덕분에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이 일화는 1998년에야 외부에 알려졌고 페트로프 소령은 세계 시민상과 UN의 표창장 그리고 세계 분쟁과 폭력을 막은 이에게 주는 드레스덴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일화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은 결국 인간 전체를 파멸시킬 힘을 만들어냈지만 그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도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냉전시대에 핵전쟁의 위기는 최소 150번 있었다. 소련의 페트로프 소령은 핵무기 관제센터의 컴퓨터 오류를 발견해 우발적 핵전쟁을 막아낸 인류의 영웅이었다. <사진=메디치미디어>
냉전시대에 핵전쟁의 위기는 최소 150번 있었다. 소련의 페트로프 소령은 핵무기 관제센터의 컴퓨터 오류를 발견해 우발적 핵전쟁을 막아낸 인류의 영웅이었다. <사진=메디치미디어>

◆ 이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어. 파란 약을 먹으면 꿈을 꾼 것처럼 이 상황에서 벗어나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돼. 빨간약을 먹겠다면……. 토끼굴이 얼마나 깊숙이 이어지는지 보여주지."

미래 사람들이 가상세계에 점점 빠져서 그 속에서 '실제 삶'을 살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현실 세계는 아마도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 비슷한 꼴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바깥 세계의 중요성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가상세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현실과 달리 미남이나 미녀가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습성과 욕망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생각해봤을 때, 과연 불가능한 미래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세계가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현실 세계로 가면 영화 <매트릭스>처럼 누더기를 입고 항상 굶주리며 언제 기계의 습격을 받아 비참하게 죽을지 모릅니다.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선택할까요?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매트릭스'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철학과 과학은 이 물음을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상세계 시뮬레이션 가설을 발표한 옥스퍼드 대학 철학교수 닉 보스트롬 교수. <사진=메디치미디어>
가상세계 시뮬레이션 가설을 발표한 옥스퍼드 대학 철학교수 닉 보스트롬 교수. <사진=메디치미디어>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합니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다수의 인공적인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컴퓨터가 극도로 발달한 시대라면 인공적인 의식을 하나만 만들어서 가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상세계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서 가동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아주 비슷한 시뮬레이션을 돌릴 확률도 매우 높습니다. 그 가상세계 속의 가상의 인간들은 자신이 가상의 인물이며 자신의 세계가 가상세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상상이 가능합니다. 가상세계 속 사람들이 문명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창조주와 똑같이 창조주가 되어 가상세계 속 가상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상세계 속 가상세계가 또 가상세계를 만듭니다. 이것은 무한이 될 수 있습니다.
 
가상세계 속 가상세계가 수없이 반복된다면 결과적으로 가상세계는 수백억 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의 세계는 어느 쪽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요? 하나의 진짜 현실인 '1'에 있을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수백억 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확률이 높을까요? 우리 세계는 수백억을 넘어 수조, 수경 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일개 철학자의 사고실험에 불과할까요?

◆ 당신의 유토피아 나의 디스토피아

저는 유토피아에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토피아에 살기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얼마나 절제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절제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누구나 "내가 양보하겠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눈앞에 타인이 유토피아로 가는 계단과 내가 희생해야 하는 낭떠러지가 동시에 펼쳐져 있다고 가정해보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극대화된 곳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겉보기는 유토피아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면 문명의 이기조차 닿지 않는 곳이 방금 이야기한 '계단과 낭떠러지'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곳이 실재합니다. 바로 멕시코시티입니다. 중심가 부유한 마을의 아파트에는 각 층에 개인 풀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슬럼가가 있습니다. 인도, 특히 뭄바이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그만큼 모든 게 풍족합니다. 하지만 뭄바이의 중심지를 둘러싼 거대한 슬럼을 봅시다. 부(富)는 슬럼가 같은 주변의 삶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21세기 과학 최악의 미래'를 이야기했고 그런 세상을 피하기 위한 여러 미래 세계를 살펴봤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세계가 결코 SF소설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자들은 21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가 말하는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잘못하면 지구, 인간, 문명의 종말 가운데 하나가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다음 칼럼) 과학과 휴머니즘의 해후(이명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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