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의 문제 vs 구조의 문제 : 2가지 사례

개인차원(연구자, 연구집단) 문제와 이를 둘러싼 외부의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혼재할 때, 개인적 문제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인가? 아니면, 구조적 문제는 개인적 문제를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악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필요악인 측면이 인정된다면, 그 적정수준은 어떻게 누가 정의하고 어떤 합의의 과정이 있으며, 구조적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는 어떻게 마련되는가? 라는 기본적 질문이 가능하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 출연연 연구사업에 대한 담론이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의 대립과 복잡한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먼저 산책해 보자

◇타이타닉호 사고 원인
1912년 4월15일 타이타닉호 침몰은 어떤 한 사건과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고 초기에는 망루에 오른 견시(見視)들의 관찰부족이나 선주의 사업적 욕심에 의한 대서양의 빠른 횡단 요구 등 운영자의 잘못, 교만, 탐욕 등 개인의 문제가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설계결함(방수격벽이 무용지물이었던)과 제작결함(강철리벳 대신 연철리벳을 사용), 구명보트가 승선인원대비 부족했던 안전관리상의 문제와 안전훈련 부족의 문제가 밝혀졌다. 흥미로운 점은, 사고초기에는 몇몇 개인의 실수와 잘못에 초점이 맞추어지다가 점차 제작자와 제작 감리, 안전운영 규정과 제도 등 구조적, 체계적 문제로 인식의 초점이 옮겨져 갔다는 점이다.

◇청년실업과 경제정의 담론
청년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위로가 한 때 큰 반향과 폭넓은 반감이라는 양면적 반응을 일으킨 사례를 보자.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청춘들의 불안을 주목해준 인생 선배의 조언이 '가뭄에 단비'와 같은 작용을 한 때문일 것이다. 특히 '눈높이를 낮추고 중소기업 등을 통해 경력을 만들어가라'는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을 법하다.

그런데, 다수의 청년층으로부터 반감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중소기업으로부터 경력을 시작해 보라고 조언하지만,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근무환경과 생산성이 대기업대비 1/4 수준으로 떨어진 현실은 기성세대가 익숙한 과거와 다르다. 중소기업은 우리나라 고용의 90% 수준을 차지하지만 생산성은 대기업의 30%이하(2012년)이다.(1980년대에는 50%이상)

OECD 국가중 임금격차가 세 번째로 높으며 OECD최고수준의 비정규직 비율을 감안할 때, 우리 청년들의 체감 임금격차와 고용불안은 세계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토마 피케티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불안은 합리적인 예견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상속자본에 의한 소득 불평등은 저성장, 인구감소 추세에 의해 더욱 심화되는 것을 감안할 때 선제적 조치(소득과 부의 투명성과 자본세 등)를 서두르지 않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할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OECD 국가중 청년실업율 압도적 1위, 세계 최대의 국적 포기 비율과 최저수준의 국민행복지수 등이 청년층의 미래를 압박하고 있다. '헬조선', '흙수저' 용어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긍심의 문제(개인의 문제)가 아닌, 힘겨운 현실의 투영(구조의 문제)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다룬 책은 인기도 없고 (개인적 차원의 힐링, 자기개발, 성공 담론을 다루는 책이 잘 팔린다) 그 해결 방안은 복잡하고 오랜 연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구조적 문제에 관한 담론
구조적 문제는 원인 진단부터 녹록치 않음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담론 시장을 산책해 보자. 대기업 사내유보금의 1%만 투자해도 청년고용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기업에 유리하고 중소기업에는 불리한 산업생태계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여기서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첫째, 대기업은 사회악인가? 이것은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규모의 경제’의 필요성을 감안할 때 우문이라고 간단히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국내 출판본의 의도적 내용 삭제, 왜곡 사태는 대기업 집중 문제와 관련한 구조적 해법을 둘러싼 일종의 지식전쟁을 보는 듯하다.

"만약 불평등이 뒤 처진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작용한다면 불평등은 성장을 촉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평등은 물질적 개선(경제발전)을 깍아내릴 수도 있고 심지어 그것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 이익이 소수에게 너무 집중된 나머지 경제성장을 질식시키고 경제의 작동에 차질을 빗기도 한다."

이러한 선별적 삭제를 포함하여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한다'는 방향으로 책의 주요 부제, 내용을 변경하여 저자로부터 출판본 전량회수 및 ’자유경제원‘ 원장이 작성한 서문 삭제를 요구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둘째, 중소기업에 지원을 강화하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이 문제도 상당히 오랫동안 거론되었고 출연연 구조개혁의 주요 논리로도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 집중문제와 가장 밀접한 문제이며 2014년도 OECD보고서에 의해 지적된 ‘과도한 중소기업 지원 정책(금융과 세제중심의 지원)이 중소기업의 경쟁력 저하의 원인’ 이라는 지적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위 2가지 질문을 포함한 '경제정의'를 둘러싼 구조적 해법은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과의 공정한 거래의 룰, 대기업 업종 제한,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 최저 임금의 인상에 있다는 주장(피케티 2014 ; 장하준 2010, 2014) 등이 지식사회의 주요 담론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는 담론의 다양성 차원에서 얼마든지 좋은 일이지만 <위대한 탈출> 국내 번역본과 같은 반칙은 곤란하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는 다양한 요인과 복잡한 영향 관계들을 봐야하기 때문에 어렵고, 개인적 문제는 원인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쉽게 끝나므로, 구조적 문제 인식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개인의 문제를 부각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이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세계 최대의 국적 포기 비율이 구조적 대책을 서둘러야 하는 경고등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문제가 크다.

더 나아가 <위대한 탈출> 책자의 왜곡이 보여주듯, 구조적 문제의 인식과 진단을 왜곡하거나 이러한 반칙에 논리를 제공하는 전문가들의 활동은 곤란하다. 이런 위기 불감증, 책임 전가적 대안, 편견과 왜곡에 관한 전문가 윤리 문제, 이해관계자에 의한 논리 포장 문제 등에 관하여 ‘국가 R&D 혁신에 관한 담론’은 자유하다고 할 수 있을까?

2. 도전적 연구 환경에 관한 구조적 문제들

연구 정책관련 담론 중에 구조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축소되는 주제는 상당히 많다. 기술로드맵 문제도 자주 거론되지만 국가 기술로드맵의 실효성 확보와 상시적 기술로드맵 전문위원회 구성에 관한 지원체제 등은 거론되지 않고 있다. 각종 위원회/공청회를 통한 정당성 확보의 경우도 회의 소집자 입맛에 맞게 구색을 맞추는 경우 그 공정성과 공공성이 쉬이 훼손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토론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 글에서는 도전적 연구환경 조성에 국한하여 구조적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자.

어떤 전문가 토론에서 거론된 인상적인 발언을 소개한다.

"연구자들은 산업계에서 개발하는 분들에 비해 너무 안이합니다. 이 연구결과가 실제 시장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질지에 대한 치열함을 찾기도 어렵고, 연구 기간이 늘어지는 문제도 흔히 발견됩니다."(산업연구계 전문경영인)

이는 매우 흔히 만날 수 있는 비판이고, 최근 대덕넷에 올라온 여러 댓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지식인의 펜 끝은 구조적 문제 속에 갇혀있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윤리성, 자기개발, 자력구제를 종용하는 접근이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과 지속가능한 변화를 담보할 대안을 향해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도전적 연구환경 조성을 위해 ‘성실실패’가 거론되고 있고, 실효성확보를 위한 성실실패 판단의 객관성 문제 수준으로 담론은 축소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담론에 대해 필자가 한 토론회에서 제기한 보다 거시적 차원의 문제점과 대안은 이러하다 :

 "성실실패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다루는 전형적 사례이다. 성실실패의 ‘허용, 용인’이라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실패를 전제로 연구에 뛰어 들 수 있는 ‘실패 장려 문화’로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고는 누가 도전적 연구에 나설 수 있을까? ‘성실 실패’외에도 ‘위대한 실패’라는 평가항목을 만들어 이러한 도전연구에 대한 실패의 자산화, 실패한 사업의 재도전 기회제공 등이 필요하다. 또한, 연구기획선정 평가 체제에서는 도전적 기획에 대한 인센티브도 없고, 도전적 연구수행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연구수행의 유연성(목표조정, 추진체계 변경 등)이라는 인센티브도 없으며, 도전적 연구성과가 뛰어날 경우 해당 연구결과를 사업화로 이어갈 수 있는 지원체제도 부족하다."

필자가 경험한 사업중 이러한 도전적 연구 장려 환경에 가장 가까웠던 사업은 과학기술부가 주관한 ‘21세기 프론티어 기술개발사업’(이하 ‘프론티어 사업’)으로서 10년간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상당 수준의 연구 자율성과 안정성을 제공해 준 사업이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경험을 통해 도전적 연구와 성과는 개인의 사명감이나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  도전적인 연구에 장기간 몰입할 환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발견했다.

'스마트무인기기술개발사업(‘틸트로터’개념의 고속 수직이착륙 항공기 기술개발 사업)' 은 프론티어 사업의 하나로서, ‘도전적 연구 수행을 위한 목표 조정’, ‘사업진행 중 Moving Target 조정’ 등의 최신 연구기획·관리 개념이 유연하게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업초기에 목표로 하였던 'CRW(Canard Rotor Wing)' 개념은 사업단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기술개발에 도전한 미국 보잉사의 X팀이 개발 실패로 문을 닫음(2004년)으로서 현실성이 없는 '지나친 도전성’이 확인되었다. 사업단은 자체적인 개념비교연구를 통해 이러한 판단을 보잉보다 먼저 내리고 틸트로터 개념으로 개발 목표를 바꾸었으며(2003년), 수직이착륙 무인항공기로서는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비행속도 성능을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기술개발 성공이 가시권에 들어온 7차 년도(3단계 진입)시기에, 사업단은 원천기술개발 성공에의 자신감으로 국내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시도를 한다. 즉 상용화로 성공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사업목표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 가능한 도전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누구의 요구가 아닌 연구자들 스스로 합의에 의해. 모호하고 피해갈 수 있는 정량적 목표 지표를 모두 철회하고, 체공시간 성능 등 시장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는 기술지표 항목 12개를 추가하고 비행을 통해 검증하는 구체적 검증조건까지 성과목표로서 사업계획서에 못 박아두는 '배수의 진'을 쳤다.(누구도 요구하거나, 이런 변화로 인해 외부적인 인센티브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3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 과제가 마칠 때에, 일부 목표는 충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론티어 사업중 가장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되어 2011년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과학기술 및 산업성과 25'에 삼성전자, 현대 등 굴지의 기업들의 연구개발 성과와 함께 나란히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세계 최대 수직이착륙 항공기 제작사인 미국의 시콜스키사가 기술제휴를 통해 미국 국방성에 유-무인기 혼합 운영 개념을 제안하자는 논의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도, 중동의 UAE가 자신들이 투자하여 상용화를 같이 해내자는 제안이 구체화 되어 협상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도 무용지물이었다. 성과에 대한 국내 의견들은 스마트 무인기의 해외 상용화 실적(추격형 R&D 패러다임에서만 유효한 관점)이 없다는 점, 실용화 개발이 국방 중기계획에 반영이 안됐다는 점을 들어 시장성, 경제성이 불투명성하다는 비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례 - 도전적 연구성과를 내어도 실제 산업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 - 를 다룰 때에 ‘산업이 필요로 하지 않는 연구개발’이라는 관점의 비판만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 역시 구조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관점보다는 개인적 차원, 즉 연구 주체에 대한 책임만 강조하는 오류를 나타낸다.

사실 스마트무인기 사례는 도전적 성과가 산업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어 준다. 해외 기업과 투자자의 적극적 관심표명 (미국 시콜스키社 2011~2012, UAE 므바달라社 2011~2012, UAE 정부 2015, 및 칠레/인도네시아 등 T-50 수출관련 절충교역 기술이전 수요 대상국 들)은 High Risk High Return 기술 가치에 대한 식견을 보여주는 반면, 국내 기업과 투자자는 Low Risk의 안전한 사업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을 확인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다른 분야는 논외로 하더라도 시장성이 불투명한 방위산업 분야에서는) 기술개발 성공 후 4년이 흘렀지만, '고속수직이착륙 무인기 개발 사업'(대한항공이 스마트무인기기술개발 결과를 이어받아 세계 최초의 틸트로터 양산 무인기 개발에 도전하는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는 표류하고 있고, 국방 중기계획 반영은 상충된 이해관계(사단급무인항공기와 획득수요 충돌, 무인헬리콥터와 무인틸트로터의 경쟁 구도 등)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다른 대체제의 진화가 무서운 속도로 좇아오고 있다.

이렇게 지연되는 동안 해외 각국은 지속적으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우리가 개발한 '틸트로터'개념의 고속 수직이착륙 항공기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중국과의 센카구 열도 분쟁에 대응하고 있고 중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등도 이 기술의 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임철호 前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부원장, 前 스마트무인기기술개발사업단장)

하지만, 정부와 기업 모두 수요와 수익이 보장된 안전한 국내용 국방사업에 몰입하고 있다는 비판은 불충분하다. 국방산업 관련 국제무대의 냉혹한 현실을 감안할 때, ‘수출가능성’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며 수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개발전략이 신중히 다뤄지지 않을 경우 그것은 또 다른 부실을 키워내는 명분이 될 수도 있으므로. KF-X사업 관련 토론에서 기술이전 책임추궁이나 자체개발 가능성 관련 논쟁으로 담론이 축소되고, 수출물량이 매우 긍정적으로 예측되는 현 상황이 좋은 사례이다. 연구개발 전략에 관한 보다 큰 차원의 질문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개발기술의 지속가능성(선진국과 경쟁가능한 수준으로 산업이 진화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연구 투자의 지속가능성과 전략적 구체성), 미래 국방환경에서의 가능한 위협과 국방전략에 관한 정의,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하는 다른 여러 대안에 대한 거시적 차원의 비교연구와 각각의 장단점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연구자들이 배수의 진을 치고 도전적 연구성과를 이뤄내더라도, 그 연구성과가 꽃피지 못하게 되는 현재의 환경에 관하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한 주요 인사의 현실진단을 통해 들여다 보자.

"민간 기업의 경우 도전적 연구를 도전하여 대박을 이뤄내면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가 있지만, 정부 R&D의 경우에는 이런 인센티브가 부여되기 어렵다."

위 인용에서 적시한 인센티브가 물질적 보상을 의미한다면, 스마트무인기기술개발 사업의 경우, 현물로서는 해결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대한항공에 기술이전(2012년)을 통해 개발자들은 일정수준 물질적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바라는 보상은 물질적 보상이 결코 아니다. 특히, 10년 동안 몰입했던 사업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국민이 생각하는 국고 투자에 대한 보상도 단순히 기술이전에 관한 언론 행사와 이벤트가 아닐 것이다. 산업화와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는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왜 잘 연결되지 않을까? 추적평가나 보상을 강화하면 해결될까? 여러 가지 논의가 가능하지만, 이 단원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와 연관된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자.

짧게 말하면, 스마트무인기기술개발 사업 결과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후속 양산 사업으로 이어갈 수 있는 예산 지원 구조가 없었고 이만한 규모의 무인기를 자체투자를 통해 세계적 제품으로 승부를 걸어볼 산업생태계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연구개발 부문별로 예산 파이를 정해두고(예산 씰링) 그 안에서 조정하게 하니, 성과가 우수하든 아니든 일단 종료되면 항공분야의 다른 연구개발 사업에 길을 내어줘야 하는 압박이 존재하였고 국방과 연계한 또다른 예타사업을 창출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은 이해관계자의 입장차이로 상당한 시일이 지연되고 있다. 그런데, 정부예산 지원에 의존한 구조적 관점만 견지한다면 이 또한 오류이다. 이 사업에 참여한 기업(KAI)는 왜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술이전을 받지 않았고, 왜 스스로 투자하여 사업화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는 이미 국방사업에 종사하는 국내 산업체들의 도전성 결여의 문제 제기를 전술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좀 더 많은 논의가 가능하지만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논외로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틸트로터 기술을 자력개발한 스마트무인기개발 사업의 성과는 세계 최대 수직이착륙 항공기 제작사인 시콜스키사의 주목을 받아, 그들의 초청과 지원으로 2011년 미국 AUVSI 행사(세계 최대 무인항공기 전시대회)에서 그들의 전시 부스에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함께 전시한 이유는 위그림(우측 상단)처럼 시콜스키가 개발한 유인항공기와 한국이 개발한 틸트로터 무인기의 공동 운영에 의한 작전개념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미국 언론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좌측 그림). 우측 하단은 당시 전시장 현장 요원으로 활동하던 사진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틸트로터 기술을 자력개발한 스마트무인기개발 사업의 성과는 세계 최대 수직이착륙 항공기 제작사인 시콜스키사의 주목을 받아, 그들의 초청과 지원으로 2011년 미국 AUVSI 행사(세계 최대 무인항공기 전시대회)에서 그들의 전시 부스에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함께 전시한 이유는 위그림(우측 상단)처럼 시콜스키가 개발한 유인항공기와 한국이 개발한 틸트로터 무인기의 공동 운영에 의한 작전개념을 미국에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미국 언론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좌측 그림). 우측 하단은 당시 전시장 현장 요원으로 활동하던 사진이다.

그런데, ‘제도만 바꾸면’ 구조적 문제가 해결될까? 도전적 사업에 대한 인센티브 설계와, 도전성 평가에 대한 ‘공정성’ 확보와 관련한 것으로 담론은 축소될 수 있다 ‘성실실패’ 제도도 살리고, ‘도전적 기획’에 대한 인센티브와 공정성을 담보할 제도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 R&D 제도를 보면 참으로 많은 제도들이 있고 선진국의 좋은 제도들은 거의 다 차용해 왔다. 문제는 그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거나,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도전적 연구환경 조성 포럼’ 2015.11, 한 토론자)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OECD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강력한 정부주도의 연구전략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확산중심적인 혁신정책’ 의 문제(‘2014 한국경제보고서’, OECD), 즉 거버넌스 체제와 관계된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 되며, 그 ‘구조’라는 것은 제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3. 담론의 확장과 숙의가 필요한 때  - 구조적으로, 장기적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하자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고 쉬이 언론을 달구는 접근법은 사회구조적 관점을 배제한 ‘개인적 차원’의 담론이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한 전문지로 자리 잡고 있는 대덕넷조차 초기에는 ‘연구자들의 의식 부족’에 무게를 둔 기사가 쏟아지다가 점차 심층적인 분석과 해외사례 연구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기사가 많아지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연구자들 스스로도 연구환경과 관련된 구조적 문제 인식보다는 개인적 문제 인식에서 맴도는 모습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한 저명한 해외 학자는 우리 사회의 상향 지향적 의식구조를 주목한다. 우리 사회는 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회,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낮은 사회이면서 이와 동시에 ‘이를 견제하고 독립적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 집단’은 매우 취약하다.

특정 논리가 선택적으로 조명되는 것을 전문가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일수록 정무적 판단이 과다하게 작용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들의 활동영역을 스스로 축소하는 역설이 작용한다. 전문가들이 보다 큰 틀의 정책적 안목과 문제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합의에 관한 리더십 발휘도 불가능하고,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갈 것이다. 지나친 표현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게임의 룰일 뿐이라고. ‘갑’의 논리에 봉사하고 연구과제 따오는 ‘보이지 않는 거래’가 무에 그리 허물이 되느냐고. 하지만, 사대강 사업의 정당성을 부여한 과학기술인들의 사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과학적 전문성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어’ 종교를 대신하는 수준의 정당성 부여라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과학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과학시대의 혜택에 부합하는 책임의식, 윤리의식으로 우리는 무장하고 있는가?

"사이비 지식인은 주인의 집을 지키는 개에 불과하다."(지식인을 위한 변명, 싸르트르)

따라서 부실한 기획, 부실한 의사결정은 참여자들의 비전문성 혹은 공정성에 관한 담론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피제를 완화하거나 녹취록, 평가감독인 등을 시도하고 있지만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보다 큰 틀의 구조적 접근과 전문인 스스로의 문제의식, 윤리적 이해가 요구된다.

다시 한 번 OECD의 2014년도 보고서에서 강조한 문제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선진국의 경우 연구사업의 기획평가에 관한한 의사결정은 몇 주에 걸친 숙의와 토론의 과정(영국 2.5주, 프랑스 8주, 미국 몇 주)을 거치지만, 한국에서는 단 한 시간동안 이뤄진다'는 문제점 말이다. 즉, 현재의 의사결정 프로세스 자체가 숙의와 수평적 토론을 담아내는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톱다운(Top-Down) 식 연구사업 기획‧선정 체제나 정무적 판단의 과용도 지적 될 수 있지만 이를 견제할 마땅한 장치가 없거나,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직한 전문적 중재자(Honest Broker)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정책, 정부 R&D의 비효율성 문제에 대한 해법에 있어서는 개인이냐 구조냐의 이분법적 접근이 아닌 다섯 가지의 접근이 가능하다 ①개인적 차원의 접근, ②구조적 차원의 접근, ③개인과 구조적 차원의 동시 접근, ④개인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 ⑤구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

개인적 차원의 해법: 연구자들의 사명감과 연구윤리, 전문성, 산-학-연 협력의 중간매개자로서의 노력을 당부하거나 이것에 대해 평가와 연계하여 강제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관점의 한계는 이해관계자들인 산업과 학계, 타 출연연들과의 협력/융합기획 시도를 통해 잘 드러났다 : "출연연이 과제를 만들어 주거나, 예산을 줄 것도 아니면서 이런 협의를 통해 아이디어만 뺏기지 않을까 염려된다. 앞으로 계속 참여할지 고민된다." 출연연 응용연구· 개발연구 사업에 관한 산업 연계성 확보는 오랜 숙원이지만, 출연연이 산업과 학계에 대한 리더십을 발휘할 ‘임무와 권한부여’는 다뤄지지 않은 현실을 잘 대변해 주는 발언이다.

구조적 차원의 해법 : 연구자를 PBS로부터 완전 해방해 주는 문제, 출연연 운영 (예산, 인력 채용, 인사 문제 등)에 있어서의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개인과 구조적 차원의 양비론적 접근 : 양 극단의 장단점을 인식하는 차원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 또는 문제해법의 우선순위에 다가서는 데에 있어서는 한계가 크다. 정책 담론이 본질적 문제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백화점식-나열식 개혁안이 대표적 사례.

개인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해법 : 최근 들어 상당부분 시행되거나 제도 개선이 시도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연구자들의 윤리성과 전문성이 확인되면, 또는 연구기관의 자율성이나 책임성이 성숙되면 이러저러한 거버넌스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으로서, 상당한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은 이미 이러한 접근을 오래전에 넘어서서 다음 단계의 해법으로 국가 R&D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있다.

구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해법 : 선진국형 연구정책 - '국가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는 않는다'- 기조에서 잘 드러난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자율성 부여의 대가로서 책임도 확고하게 묻는(프라운 호퍼의 경우, 인사 조직 예산 등의 모든 권한을 자율에 맡기지만 5년 단위 연구부서 평가를 통해 해체여부 결정 및 재배치를 하는 사례 등)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4. 맺음말

국가 R&D 사업의 규모와 복잡도가 커져감에 따라 장기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전략이 필요하므로, 도전적 연구와 혁신적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사명감이나 개별 보상에 관계된 제도를 넘어서서 연구 운영·환경과 관련한 체제의 구조적·근본적 개선이 절실하다.

구조적 관점의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폭 넓은 안목과 공부, 현장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구조적 문제에 다가서다가도 다시 개인적 문제로 회귀하기도 한다. 청년실업 문제의 경우에도 구조적 문제에 대해 ‘쓸데없이 대학에 너무 많이 진학하는 것이 문제’(인물과 사상, 왜 높은 대학 진학률이 사회적 비극을 가져오는가? : 고등교육 버블, 강준만)라며 교육버블 문제를 언급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교육으로 미래의 불안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경향은 분명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식중심 사회로 이행하는 문제가 교육버블 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자원인 우리 사회가 지식중심 사회로 재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성 확보와 관련한 시대적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일례로 인천대교와 영종대교도 우리가 건설했다지만 엔지니어링 산업의 핵심인 기획과 초기 설계는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건축, 토목 등은 저부가가치인 ‘시공 산업’ 위주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산업규모의 확장 기회를 엔지니어링 산업(고부가가치 지식산업) 육성기회로 연결하는 데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열심히 몸집은 키우지만 머리는 줄고'있는 셈이다. 이 문제를 정부가 주목하고, 해외 유수의 엔지니어링 센터에 국내 전문인 파견 사업 등 지원 사업을 시작한 지도 십년이 넘었지만 사태는 더욱 심각해 졌다. 교육과잉이 문제라기보다는 고급인력들이 일해야 할 기회를 해외 용역에 편리하게 의존해 온 산업현실과 이 문제에 대응한 산업-학계-정부 공조 정책의 실패를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은 보다 폭넓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들을 요구하고 정책 전문인을 통한 심도 있는 조사 분석을 요구한다. 단기적인 공청회, 위원회 등으로는 곤란하다. 단기간에 전문가를 매수하고 여러 자원을 압축적으로 동원하여 논리를 만들기 쉬운 이해관계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리가 왜곡될 것에 대한 견제장치와 전문가들의 성찰, 윤리성이 관건이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그것이 때로는 현실적으로 대응 가능하고 시급한 조처를 외면하는 구실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개인적 차원의 접근이나, 평가관리 잣대 강화(성실실패, 추적평가)와 결과중심 인센티브 강화(성과 좋으면 떡 하나 더 주겠다는)를 통해 연구자들을 더욱 긴장하게 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부분적인 실효성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현재의 국가 R&D 사업의 부실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연구 기획, 관리, 평가 제도나 출연연 거버넌스 개혁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연구조직의 자율성의 수준, 리더십, 복지와 교육훈련 체계, 보상체계의 공정성과 유연성, 그리고 연구자들 스스로 국가 출연연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연구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문화... 이 모든 것이 관계할 것이다.

다층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연구가 보장되면 다음과 같은 오래된 연구정책 대립 사안도 입체적인 해법을 찾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OECD와 우리나라 내부의 관점이 극명하게 대조된 구체적 정책 사안인 ‘연구 기획자와 연구 수행자 분리’ 문제에 대해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OECD 보고서는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여러 국가의 관행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잠재 과제의 발굴에 대해서 연구를 수행하는 기업, 연구소가 아니라 많은 부분 주무기관인 KEIT(산기평)이 주도한다. 유망 연구개발과제의 발굴과 ‘해당 과제의 수행 팀’ 승인 간에 평가과정이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정부가 최종 클라이언트가 되는 정부의 연구개발 조달에는 적절할 수 있지만, ‘연구수행기관들로부터 발생하는 유망 아이디어 지원’이라는 바램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연 최고의 아이디어와 기업가정신을 가진 최고의 인재를 동시에 동원하는데 이러한 절차가 최적인지 의문이다. 한국의 사전평가과정에는 공청회와 위원회 업무라는 광범위한 과정이 포함된다. 이러한 과정은 주요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나, 혁신시스템 내 소규모 비주류 참가자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가 큰 과제에 대한 기회를 주는 대신 주류(mainstream)에 맞는 보다 안전한 과제들로 집중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OECD, 2014 한국경제보고서)

하지만, R&D 기획선정에 대한 국내 대부분의 주요 오피니언 리더들은 국회정책 토론회에서 나왔던 발언과 유사한 다음과 같은 기조를 견지하고 있다 :

"연구기획 기관과 연구수행자는 선수-심판의 분리원칙과 같이 분리되어야만 공정하고 혁신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이 관점은 추격형 R&D 패러다임(연구 목표를 시작부터 분명하게 특정할 수 있는 사업 단계)이 주로 적용되는 사업유형에 유효하다. OECD의 제안(연구자가 제안한 과제에 대해 심사를 통해 지원하는 체계)을 우리나라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면 도전적 연구와 창의적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OECD의 제안이 선수-심판의 분리를 주장하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은 ‘개인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의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프레임에서는 사명감의 강조와 징벌, 보상 외에는 다른 대안이 나오기 어렵다.

‘선수-심판 분리’ 담론을 둘러싼 OECD의 주장과 국내의 주장의 대립을 들여다 본 이유는 ‘구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으로 진화가 당위라 하더라도, 기존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탈출>이라는 책자의 왜곡 사례나, 피케티나 장하준 교수의 제안이 시장만능주의에 천착한 학자와 정책인들에게는 오류투성이로 폄훼되는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조적 변화는 제도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의 변화, 문화의 변화, 리더십의 변화, 무엇보다 리더십 양성체제의 변화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연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연구자 중심의 연구체제로의 구조적 변화가 선진적이고, 장기적 의미에서 유효한 제도라는 점은 다양한 사례에서 이미 확인된 사항, 장기적으로 유효한 방향이라는 신념이 우선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자에 대한 정부 통제 권한의 상당부분을 포기하거나 위임하는 것으로서, 이미 권한을 가진 기관 혹은 그 하위 기관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선수-심판 분리 논리가 국내에서 절대적인 논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에는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 특성과 신뢰의 부족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세 가지 함의를 갖는다 :

첫째, 우리나라 연구정책이 ‘구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으로 진화하려면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성, 개방성, 투명성에 기반하여 우리 사회와 출연연의 상호신뢰성 증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국내 다수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권위와 압력에 따라서 정책적 방향성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연구정책에 관한 철학과 독립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은 한 두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연구자 중심 연구체제로의 정책전환이 장기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라는 이해 가운데, 현재의 문제들을 해석하고, 여러 가지 한계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공부하며 정책적 소양을 갖춘 연구자와 정책전문인으로 성장해 가는 이들이 많아져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 사회는 ‘흥행’, ‘여론’, ‘주류’를 떠나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치열하게 현실을 파고드는 전문가, 학자들이 필요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도전적 연구 환경 조성과 관련하여 ‘개인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에서 ‘구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측면의 통합적 접근’으로 진화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가? 한국적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연구자들의 임무와 권한을 확대해 가는 것과 더불어 지속적인 조직문화 개혁의 과정이 관건이다. 그 ‘과정’의 불편함과 조급한 기대를 인내할 신뢰와 철학이 가장 큰 걸림돌일 것이다.

무엇보다, ‘현 체재로는 더는 희망이 없다’는 위기감이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우리에겐 과연 이러한 공적 차원의 위기감각이 있는가? 아니면 각자 적응하고 버텨내려는 몸부림뿐인가?

◇후기

이 글의 주제는 지난 6월 정부 R&D 혁신안에 대해서,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토론회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는데, 평소 사명감을 스스로 강조하던 관점에 갇혀 있던 필자로서는 젊은 학자들이 보여준 열린 사고와 문제의식이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증거기반 담론과 기존 이해관계자들의 주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비평적 접근에 관한 안목을 열어주신 김소영 교수님, Xaq Frohlich 교수님, 박범순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연구자가 국가 과학기술의 대표자라면, 연구 사업을 둘러 싼 환경과 전략, 프레임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책임범위에 속한다고 본다. 구조적 문제에서 파생된 한계를 개인의 사명감으로 돌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구투자에 합당한 가치를 찾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명감이 아닌, ‘좋아서 하는’연구 문화가 확산되어지길 소망한다. 연구자의 사명이 있다면 십년 뒤에도 몰입하고 확장해 갈 수 있는 주제, 후배들에게도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길을 찾는 것이라고 믿는다.

◆안오성 항우연 실장은

안오성 항우연 실장.
안오성 항우연 실장.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실장은 '안오성의 과학기술정책'을 타이틀로 현재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제도 개선의 화두중 반복되어 제기되거나, 첨예한 이견이 있는 주제에 대해 역사적, 문학적,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안오성 실장은 현재 항우연에서 항공기획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을 10년동안 담당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 서브시스템 체계종합과 착륙장치 PM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중입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을 통합한 장기적 항공우주 산업육성 전략, 항공우주분야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대형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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