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 UST 교무처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11월 말 3박 5일의 바쁜 일정으로 독일 베를린 출장을 다녀왔다. 그런데 돌아와 사진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출장 중 틈틈이 작업했던 사진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사진 파일을 저장하는 이동식 하드는 마치 누군가가 출장 직전의 시점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았다. 그 이전까지의 사진 파일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출장 중 옮겨 놓았던 원본 파일과 작업한 파일들만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에 있던 원본 파일이 있어 다시 컴퓨터에 옮겨 작업하기로 하였다. 출장 중 작업한 시간들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르부뤼켄에서 베를린으로 가던 비행기에서 찍었던 하루 분의 파일은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에서도 지워져 있어 영영 사라져 버렸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 전 TV에서 방영된 '트와이라이트 존(Twilight zone)' 이라는 외화 시리즈가 있었다. 원 방송은 미국에서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방송되었다. 내가 언제 이 시리즈를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흑백영화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후 1985년에 리메이크한 시리즈가 '환상특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 방영되어 인기를 모았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경으로 심리학적 스릴러, 판타지, 공상 과학 등의 내용이 가미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흥미를 끌었던 외화 시리즈이다. 원래 영어의 '트와이라이트 존(twilight zone)'은 빛이 도달하는 바닷속의 가장 깊은 층인 약광층(弱光層) 혹은 경계가 불분명한 중간 지대나 그러한 상태를 뜻하는데, 과학적 혹은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소재로 다룬 시리즈물의 제목으로 걸맞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번에 내가 겪은 작은 에피소드도 마치 이 시리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원본마저 증발한 하루 분의 사진 중 지난 번 사진공감에 사용하기 위해 출장 중에 원고와 함께 이메일로 보낸 사진과 페이스북에 공유해놓은 사진들은 작은 크기이지만 사이버 공간에 남아 있어 다시 다운로드를 할 수 있었다. 마치 가치 있는 것들은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함께 나누어 가져야만 한다는 교훈을 알려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 인터넷 공간을 통해 공유했던 내 사진들을 돌아보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사진 혹은 나에게 특별한 느낌이 남아있는 사진 몇 장을 뽑아 소개 하고자 한다.

4월에는 릴레이로 진행되는 '페이스북 5 일간의 아트 챌런지 (Facebook 5 Day Art Challenge)' 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지난 5년간의 4월들을 돌아보면서 매일 사진 속의 한 해씩을 소개하였는데 2015년의 4월을 대표하는 꽃으로 무스카리 사진을 소개하였다. 무스카리는 파란색의 아름다운 꽃이다. 특히 무리 지어 피어있는 이 꽃은 사진으로 담기 참 좋은 꽃이다. 하지만 낮은 키 때문에 땅에 엎드려 찍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아침에 한밭수목원에서 만난 이 꽃 역시 바닥에 바짝 엎드려 찍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세월호 사고 1 주년이 가까이 있어 푸른 빛이 4월의 바다를 생각나게 해서 4월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였다.

4월의 바다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500 s, ISO100
4월의 바다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500 s, ISO100

8월에는 파리에 출장을 다녀왔다. 이른 아침 산책 길가에서 만난 야생당근꽃을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들의 전조등과 겹쳐 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그 때의 작은 흥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일정 중 주말이 끼어 있어 고흐가 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낸 파리 근교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라는 작은 마을과,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다녀올 기회도 있었다. 그들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은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도 올해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파리의 거리에서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500 s, ISO100
파리의 거리에서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500 s, ISO100
올 10월에는 제주도를 두 번이나 다녀오게 되었다. 그 전에도 제주도에 여러 번 가보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유난히 내 관심을 끌었던 꽃이 있었다. 바로 노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있던 털머위꽃이었다. 이번 가을에는 털머위꽃을 원 없이 사진에 담았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제주의 가을-털머위꽃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 s, ISO100
제주의 가을-털머위꽃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60 s, ISO100

11월 초순에는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에 만나게 된 단풍 길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부드러운 아침 빛이 아쉬웠지만 비에 젖은 단풍은 더욱 선명한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길 하나만 보아도 왜 사람들이 이곳으로 단풍구경을 오는 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내가 가을의 절정에 서 있었다.

늦가을을 위한 벤치-선운사의 가을_Pentax K-3, 30 mm with smc PENTAX-DA* 16-50mm F2.8 ED AL [IF] SDM, F/3.5, 1/30 s, ISO400
늦가을을 위한 벤치-선운사의 가을_Pentax K-3, 30 mm with smc PENTAX-DA* 16-50mm F2.8 ED AL [IF] SDM, F/3.5, 1/30 s, ISO400

올 들어 활동을 시작한 500px라는 인터넷 사진 사이트가 있다. 세계적으로 600백만 명 이상의 전문사진작가와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활동하는 사이트인데, 매일 게시된 사진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측정하여 자체적인 계산방식으로 펄스라는 점수를 부여하고 이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사진을 전시해 주고 있다.

장르별 순서와 함께 여러 장르를 어우르는 전체 순서 화면이 있는데, 이 화면에서 대략 30 위 정도가 되는 사진들을 1면에 게시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전체 1면에 드는 사진들은 그날 이 사이트에서 최고 수준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 아마추어에게는 꿈과 같은 무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비가 내리는 아침 자동차 앞 유리창에 붙어 있던 단풍잎을 찍은 사진이 이날 접사부분 1등을 차지하면서 전체 1면에 진출한 적이 있다. 아마추어인 나에게는 참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사진에 '슬픈 가을 잎'이라는 제목을 붙였었는데 이 사진은 '기쁜 가을 잎'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슬픈 가을 잎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7.1, 1/30 s, ISO400
슬픈 가을 잎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7.1, 1/30 s, ISO400

11월 말에 바쁘게 다녀온 독일 출장도 기억에 남는다. 지난 번 사진공감에서 소개한 자르브뤼켄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찍었던 마술 같은 프로펠러 사진의 원 파일은 정말 마술처럼 사라져 버려, 마치 내가 트와이라이트 존에 등장하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베를린을 떠나던 날, 이미 겨울에 들어선 길거리의 한 식당 앞에 남아있던 가을의 흔적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다행히 이 사진의 원 파일은 남아 있었다.

지나간 가을의 추억에 등불을 켜고–베를린의 거리에서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80 s, ISO200
지나간 가을의 추억에 등불을 켜고–베를린의 거리에서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80 s, ISO200
12월에 들어서자 겨울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첫눈도 제법 내려 하얀 눈 세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가을이 숨어 있어 가을과 겨울의 중간지대인 트와이라이트 존이 존재하고 있다. 자연은 0(영) 아니면 1인 디지털 세상이기보다는 계절이 변화하는 것 같이 대체로 중간지대를 지나 아날로그적인 변화를 한다. 붉은 단풍잎 위에 쌓인 첫눈과 나뭇잎 끝에 매달린 작은 고드름 속에 가을과 겨울의 중간지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의 트와이라이트 존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5.6, 1/100 s, ISO200
가을과 겨울의 트와이라이트 존_Pentax K-3,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5.6, 1/100 s, ISO200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사진과 글을 통해 사람들과 작은 즐거움을 나눌 수 있음이 감사할 일임을 깨닫는다. 마크 안토니는 '나는 남에게 준 것 외에는 전부를 잃어버렸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의 끝에서 이채 시인이 꿈꾸듯 예쁜 사랑의 꽃씨 한 알을 가슴마다 심는 12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12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12월엔 그대와 나
따뜻한 마음의 꽃씨 한 알
고이고이 심어 두기로 해요
찬바람 언 대지
하얀 눈 꽃송이 피어날 때
우리도 아름다운 꽃 한송이
온 세상 하얗게 피우기로 해요

이해의 꽃도 좋고요
용서의 꽃도 좋겠지요
그늘진 외딴 곳
가난에 힘겨운 이웃을 위해
베품의 꽃도 좋고요
나눔의 꽃도 좋겠지요

한 알의 꽃씨가
천 송이의 꽃을 피울 때
우리 사는 이 땅은
웃음꽃 만발하는 행복의 꽃동산
생각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사랑이 될 때
사람이 곧 빛이요 희망이지요

홀로 소유하는 부는 외롭고
함께 나누는 부는 의로울 터
말만 무성한 그런 사랑 말고
진실로 행하는 온정의 손길로
12월엔 그대와 나
예쁜 사랑의 꽃씨 한 알
가슴마다 심어 두기로 해요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