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신임 원장이 풀어야 할 도전적 과제는?
"현장특성 이해 기반 국부창출 아이템 창출환경 조성 주력"

외부 인사가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기관장이 된 것은 우리나라 IT 연구개발 역사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사건이다. 1976년 기관 설립 이후 34년 만에 처음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대와 우려 속에 기관 설립 최초로 외부 인사가 이끄는 ETRI호가 14일 본격 출범하게 된다.
KT 사장 출신인 이상훈 신임 원장이 기존 정체돼 있던 ETRI의 고질적 문제점을 개혁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반면, 현장 특성을 감안치 못한 섣부른 혁신으로 중장기적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기대대로 될지 우려가 현실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만, ETRI는 '한국 정보통신의 역사'를 운운하며 과거를 회상할 여유조차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적인 IT 진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다. 수년 내 연구소의 운명을 가를 양보 없는 결전을 치러야 한다. 더구나 성장 정체 돌파구로 '새로운 국가 성장동력 창출'이라는 숙명도 떠안고 있다.

같은 IT분야 기업인 출신인 이 신임 원장이 ETRI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도전할 과제가 적지 않아 보인다.

◆ ETRI, 40년 역사 대반전의 시작?…CDMA, TDX, 그리고 다음은?

ETRI는 내년 설립 40주년을 맞는다. 오늘날 모바일 인터넷의 핵심기술이 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를 비롯해 전전자교환기(TDX), D램 반도체 개발 등 우리나라를 IT 대표국가로 만든 성과가 ETRI에서 탄생했다.

문제는 CDMA, TDX와 같은 거대 연구성과의 대를 이을 차기 연구개발 작품이 어느 순간 단절돼 버린 것이다.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 정부, 국회 너나 할 것 없이 ETRI에서 새로운 국가의 희망이 재탄생하길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ETRI가 40년 역사를 맞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 40년을 이끌 신임 기관장의 행보 자체가 진정한 기회인 동시에 위기의 시작이라는 평가가 많다.

사실 거대 연구성과가 창출되려면 대내·외적으로 갖춰져야 할 요소가 많다.
우선 소형 단기과제 중심의 연구수행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이 체제가 더 악화되면 연구 경쟁력은 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프로젝트 연구예산 수주방식(PBS) 도입 이후 지난 20년간 연구현장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이미 그 정책실패의 역사를 검증할 수 있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연구자들이 제대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으면서 중장기 핵심원천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연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CDMA, TDX를 개발할 때 수백여명의 연구진이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다년간 함께 호흡했던 것처럼, 연구방식 자체의 융합집단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비전과 퍼스트무버형 창의적 연구가 근간이 되는 것은 기본이다.

사실 벌써부터 민간 IT기업 출신인 이 신임 원장이 단기 상용화 중심의 연구체계로 이끌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번지는 분위기다. 현장에서는 사업화 연구에 치중하기 보다는 기초·원천연구 환경구축에 방점을 둬 근본적인 국가 ICT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현장과의 소통 필수…"대덕단지 전체를 보고 ETRI 미래상 그려야"

보통 외부 출신 인사가 정부출연연구기관 기관장을 맡게 되면 연구자들이 어떤 연구개발을 하고 있는지 파악부터 하게 된다. 기관장이 된 직후 각 부서들의 보고를 받고 연구성과와 인물 탐색작업이 주로 이뤄진다. 연구중심기관이라고 해서 연구프로젝트만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부나 국회와의 원활한 관계도 구축해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민간나 정부 수탁과제 등의 안정적 연구비를 확보하는 프로세스도 익혀야 한다. 대개 외부 인사가 기관운영을 이해하는데만 적어도 6개월 이상 걸린다는게 정설이다.

외부 출신 기관장이 기관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장·단점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현장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점에서 신임 원장의 시간과의 싸움이 얼마나 효과적·효율적으로 이뤄지느냐에 따라 기관의 성패가 좌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장과 연구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기관을 운영할 경우 좋은 업적으로 퇴임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기관 자체의 이해 뿐만 아니라 국내 대표 R&D 연구소들과 이웃해 있는 대덕연구단지에 ETRI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40살이 된 ETRI는 대덕에 모인 연구소들과 각별히 친해지고 융합될 때가 됐다. 한 연구소만의 역량이 아닌 대덕의 특성을 감안한 특화된 연구개발 기지로 ETRI 미래상을 그려야 한다. 연결, 네트워크의 시대 ETRI가 어떤 기관보다 이웃 연구기관들과 연계돼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해야 한다. 연결이 되려면 우선 이 신임 원장이 지역을 이해하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한다.

기관 설립 사상 처음 외부 인사가 수장이 된 ETRI.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 말이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찌됐든 ETRI의 첫 외부 출신 기관장 실험이 현장 연구자들에게 진정한 힘이 되고, 치열한 IT 연구개발 경쟁 판도에서 활기 넘치는 글로벌 연구환경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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