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대담①]50돌 맞는 KIST 이병권 원장
"지난 50년 성취의 역사 지속하기 위해 과학계 주도적 제안해야"
"과학계 자립도 높이고, 중‧대형 융합연구 집중해야"

대한민국을 이끈 과학立國 50년 병신년의 해가 밝았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모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출범한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한국 과학기술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달러 남짓하던 허허벌판 국가를 50년 만에 GDP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세계 경제강국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 지금 대한민국은 중국발 지식제조업의 위기, 미래 성장동력의 상실, 세계적 저성장 기조 등 기존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덕넷은 신년을 맞아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한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 한국 대표적 싱크탱크들과의 대담을 추진했다. 이병권 원장, 김준경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 박희재 국가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장, 그리고 젊은 과학자들과의 좌담 순으로 '신년 특별대담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의 편지] 

KIST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이병권 원장은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생존"이라 말하며 미래 백년대계를 준비함에 있어 과학기술을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할 것임을 강조했다.<사진=김요셉 기자>
KIST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이병권 원장은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생존"이라 말하며 미래 백년대계를 준비함에 있어 과학기술을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할 것임을 강조했다.<사진=김요셉 기자>

"우리에게 과학기술은 생존입니다. 자원이 많은 나라와 달리 인재밖에 없는 우리나라에게 과학기술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한국 과학기술계는 경제위기와 과학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힘든 상황입니다. 과학기술 50주년과 향후 백년대계를 위해 한국 과학계가 먼저 변화해야 합니다. 정부와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병권 KIST 원장은 "과학기술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존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반세기 역사 뿐만 아니라 미래 백년대계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과학기술은 우리나라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50년간 세계에서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하는데 과학기술 핵심기관 KIST가 있었다. 1966년 KIST가 설립되면서 해외로 떠났던 우수인력들이 자발적으로 유치과학자 신분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과학기술 진흥과 산업계 기술지원에 힘썼고, 그 결과 산업구조 고도화를 일궈 한국 경제개발 초석의 일등공신이 됐다.

그런 KIST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KIST에서 이병권 원장을 만나 KIST와 한국 과학계 역할과 방향에 대한 고견을 들었다.

 

 

◆ 출연연, 수동적 모습 벗어나 국가 이끌 제안해야

"KIST의 미션은 국가가 필요한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할 수 없는, 대학이 할 수없는 대형융합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경영도 앞으로의 경영도, 이 큰 틀 안에서 철학을 공유하며 운영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를 맞고 R&D 비중이 커지면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일부 시선이 싸늘하다. 과학기술을 평가하는 잣대는 모방연구를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풋 대비 아웃풋 시선으로 바라본다. 당장의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과학기술계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과학기술을 더 관리하려는 정부 차원의 움직임에 평가 압박과 사상 초유의 연구예산 삭감, R&D혁신 등으로 연구현장이 더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이병권 원장은 이런 한국 과학계의 현실을 '성장통'이라 표현했다.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성장통을 슬기롭게 넘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이 원장은 "출연연과 정부 모두 비효율성 부분을 모두 적극 개선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먼저 가장 비정치적이여야 할 과학기술의 정치적 지배구조 정상화와 국가적 과학기술 정책 비전공유를 역설했다.

이 원장은 "건국 이래 국방부, 법무부는 바뀐 적이 없지만 비정치적일 것 같은 과학기술계는 어떠한가"라며 "총리실에서 경제 분야 산하로, 또 과기처에서 과기부 등 정권마다 바뀌는 상황에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은 없다고 봐야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또 이 원장은 "무조건적으로 미국을 벤치마킹하는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튼튼한 기초를 바탕으로 연구를 한다. 이는 자본이 많기 때문"이라며 "자본이 부족한 우리가 이를 벤치마킹하다보니 미국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식으로 할 수 없고 철학도 다르기에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렇다면 정부출연연구관들, 그리고 KIST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원장은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 출연연이 과학기술계를 이끌기 위한 방안을 먼저 제시할 것과 중대형 융합연구를 수행하는 연구문화를 강조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고 우리가 포기하는 모습은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며 "우리가 바뀌면 과학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며 자발적 혁신을 강조했다.

자발적 혁신의 사례로 이 원장은 KIST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한 '중대형융합연구'를 설명했다. 산업화는 기업이, 기초연구를 대학연구소에서 하고 있으니 KIST와 같은 종합연구소는 국가가 필요한 '중대형융합연구'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원장은 "뇌과학연구소는 KIST의 대표융합연구 사례"라고 꼽으면서 종합연구소 강점을 살린 거대사이언스와 융합연구를 통해 뇌과학연구소와 차세대 반도체, 로봇 등 대학이나 기업이하기 어려운 연구를 지속 수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10년 전 KIST 뇌과학연구소가 발족하기 이전에는 교수나 연구자들이 개인 차원에서 연구성과를 내고 있었을 뿐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전문 연구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생소해 보이던 뇌과학 분야에 집중투자했고, 10년이 지나자 KIST 뇌과학연구소는 치매진단기술과 우울증 연구 등 뇌와 관련된 질병연구를 통해 신약물질과 사전진단방법을 발견하는 등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지원하는 미래형 융합연구단에 선정돼 치매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로봇 분야도 마찬가지로 KIST 내부 다양한 연구진과 융합을 통해 로봇이 실제 수술이나 재활 등에 활용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중이다. 반도체 역시 한계에 다다른 실리콘 이용 반도체에서 한 단계 뛰어넘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할 목표를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KIST의 행보에 다른 출연연들도 관련 연구소를 발족하며 중대형 연구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중대형융합연구에 철학을 갖고 운영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역대 원장들과 의견을 교류하고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KIST는 외부에서 원장이 온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철학을 공유하며 연구소 운영의 큰 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2016년부터 2억 원 이하 연구과제 하지 않을 것"

KIST는 대학과 기업이 하기 어려운 '중대형융합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사진=김요셉 기자>
KIST는 대학과 기업이 하기 어려운 '중대형융합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사진=김요셉 기자>

"올해부터 2억 원 이상 과제만 신청토록 할 계획입니다. 연구자들이 작은 구멍가게 사장을 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KIST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일부의 반발과 우려가 있지만 이같은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KIST는 출연연 중 유일하게 미래창조과학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정부수탁과제 중 1억 5000만 원 이상 과제만 신청하는 연구비 하한선 제도를 도입, 지난 2013년 이후 적극 운영 중이다. 올해부터는 2억 이상 과제만 신청토록 할 계획이다.

이 원장에 따르면 KIST 운영의 절반은 정부에서, 절반은 연구자가 직접 연구비를 수주한다. 사실 정부 대형과제 수가 줄어들어 작은 과제라도 악착같이 끌어 모으는 것이 연구기관 운영에는 더욱 유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IST가 소형연구과제를 지양하는 이유는 당장의 성과보다 대학이나 기업이 하기 어려운 사회문제 해결형이나 국가 전략적인 중대형 연구개발과 기초기술 등 세계를 선도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비 하한선 제도에 내부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은 이 원장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과제 수주의 어려움으로 인해 KIST 운영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연구 집중도를 높이면서 국가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비 하한선 제도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청계천 인근에 임시 사무소를 두고, 18명의 과학자를 유치해 시작한 KIST가 지금은 수십여개의 출연연들을 탄생시키며 한국 과학기술의 모태이자 맏형으로 역할을 해왔다.

이 원장은 50주년을 맞은 2016년에도 미래영역 도전과 개방·융합·협력, 글로벌 협력을 확대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개방·융합연구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라며 "더 나아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전체에 융합과 협력의 문화가 뿌리깊이 정착될 수 있도록 적극 선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 그는 "KIST가 그간 다각적 글로벌 협력을 추진해왔지만 동·북유럽 등 협력이 미약했던 국가·지역들과의 협력도 활성화해 나갈 것"이라며 "이를 위해 KIST 유럽연, 한·인도센터 등 우리의 해외조직을 그야말로 글로벌 협력거점으로 육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베트남에 KIST 경험을 전수해주는 V-KIST에도 박차를 가한다. KIST에 따르면 V-KIST 설립 관련 법안이 지난해 베트남 현지에서 통과돼 기공식을 가졌다. 이 원장은 "그간 KIST가 축적한 모든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하여 국제사회에 KIST의 리더십을 각인시키는 계기로 삼겠다"고 덧붙였다.

KIST는 오는 2월 50주년 개원기념식을 시작으로 역사관 개관, 홈커밍 데이 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 중에 있다.

KIST에서 30여 년간 환경과 에너지 분야 연구개발 해온 과학자 출신 이병권 원장은 "올해는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변화와 위기들이 한국 과학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 과학계가 국가와 국민에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움직일 때"라고 다시 한 번 한국 과학계의 자발적 변화를 강조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