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한 KBSI 박사 연구팀, 흑린 반도체 박막 대량생산 기반 마련
액상 박리법 통해 고결정성 저차원 흑린박막 생산···'사이언티픽 리포츠'에 게재

 최근 흑린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제시하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주한 박사(왼쪽)와 서순주 박사.<사진=박은희 기자>
최근 흑린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제시하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주한 박사(왼쪽)와 서순주 박사.<사진=박은희 기자>
"소설이다."
"데이터 조작이다."

정말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과학자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연구한 결과에 '소설', '데이터 조작'이라는 의문부호가 달렸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를 놓고 조작 소동(?)이 벌어진 곳은 다름 아닌 기초과학지원연구원 나노표면연구팀.

수 개월이 지난 일이지만, 연구책임자인 이주한 박사는 "실험 데이터 결과가 너무 깨끗해 조작했다고 판단을 한 듯하다. 해프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컸다"며 "우리의 연구 결과가 현 과학계에서 볼 수 없는 결과로 저널이 놀랐으니, 앞으로 더 놀랄 일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밝혔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은 '흑린(Black Phosphorus, BP)'. 흑린은 인(P)을 고온 고압으로 찌면 나오는 검은 인이다. 흑린은 약 100년 전에 발견됐지만 그동안 쓸모가 없어 관심 밖의 물질이었다. 

그러다 최근 흑린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실리콘 이후 차세대 전자소자를 만들 소재로 흑린이 떠오르고 있는 것. 흑린은 인 원소로 구성된 2차원 반도체 소재 중 전자이동도가 가장 큰 물질이다. 구리보다 전기전도성이 뛰어나고 두께도 원자 한 층에 불과하지만 전기 전도성을 제어하기는 어렵다. 

이 박사가 흑린에 관심을 가진 건 한 대학의 연구 보고서 때문이었다. "논문을 쓰기 전 과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묻기 위해 아카이브에 글을 많이 올려요. 미시간 대학의 한 보고서였는데, 주제가 '흑린이 그래핀을 대체할 수 있을까'하는 내용이었어요.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관련 논문을 찾아보니 세계적으로 3편에 불과했어요. 물론 우리나라는 단 한편의 논문도 없었죠."

흑린의 가능성을 간파한 이 박사는 서둘러 연구팀을 구성했다. 불과 1년여 만에 연구팀은 안정적이고 활성이 뛰어난 '흑린-이산화티탄(Ti02) 광촉매' 재료를 제조하는데 성공했다. 

기존에는 고가장비를 이용한 금속산화물 코팅 기술을 이용해 흑린 기반 광전자 소자를 구현했지만, 연구팀은 저렴한 가격으로 단순한 졸-겔 반응에 의한 금속산화물 치환 기술을 이용해 연구의 가치를 높였다. 

이 박사는 "당시 연구는 흑린을 화학적인 방법으로 박리하는 방법과 흑린의 구조를 안정화할 수 있는 단순한 금속산화물 치환법을 발견했다는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첫 연구 성과로 흑린이 기존 그래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더 크게 갖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바이오센서에서 흑린의 활용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최근에는 흑린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제시, 학계를 놀라게 했다. 
 
◆ 흑린, 고결정성 저차원 박막 생성 성공···'사이언티픽 리포츠'에 게재    

"단기간에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유력 학술지에 논문 게재를 요청했는데, 심사만 한 달이 걸렸어요. 보통은 일주일 정도 답변이 오는데, 그만큼 꼼꼼히 살펴봤다는 거죠. 하지만 답변은 연구 결과가 믿기지 않기에 저널에 실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우리의 과학 수준을 저평가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여곡절 끝에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최근 '사이언티픽 리포츠(Scientific reports)' 온라인판에 실렸다. 학계를 놀라게 한 연구는 '고결정성 저차원 흑린박막 생성'이었다. 

액상 박리법을 이용해 흑린 덩어리에서 결정성 높은 원자층 단위의 흑린 박막을 얻는데 성공한 것. 이번 연구에서 얻어진 저차원 흑린 박막은 삼각형 모양의 단결정들이 겹겹이 쌓인 층구조로 이뤄져 있다. 또한 에너지가 안정적인 면으로 박리되는 경향성을 보여 차세대 2차원 반도체 물질로 주목받고 있는 흑린 박막 소자 실용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평가다. 

서순주 박사는 "기존에는 흑린 덩어리 상태에서 원자층 단위의 박막을 얻고자 할 때 테이프를 이용해 떼어내는 형식의 물리적 박리 방법을 사용했다"며 "이 경우 불규칙한 형태와 두께로 제작돼 원자층이 기판 전체에 균일하게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소자에 응용하기엔 부적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연구팀은 기존 액상 박리법과는 달리 에탄올과 물을 사용하는 간단한 액상 박리법을 활용했다. 서 박사는 "액상 박리법이 처음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유기 용매를 사용했다"며 "반면 에탄올과 물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더욱이 결정성이 높고 질 좋은 흑린 박막을 얻을 수 있어 실제 전자 소자 제작에 바로 응용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연구팀이 이론적 계산과 모델링을 통해 얻은 삼각형 형태의 흑린 단결정 박리는 박막의 두께, 크기, 커버리지(coverage) 등 여러 변수의 제어를 통해 질적으로 우수한 박막을 대량 생산 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처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는 연구팀조차도 결과를 믿지 못했다. 현미경을 통해 본 흑린 박막 층 구조가 분명했으며, 삼각형 모양의 흑린 단결정 원자층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동안 발표된 어떤 논문에서도 볼 수 없는 결과였다. 

이 박사는 "처음에 연구 결과를 확인하고 믿을 수 없었다. 주사 탐침 현미경으로 박막 표면을 확인하는데, 탐침에 장착하는 팁에 불순물이 붙어 삼각형 모양의 단결정이 반복돼 보이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서 박사도 "처음에는 예사롭지 않은 결과에 실험을 반복하고, 양을 늘려 농도를 짙게 분사하기도 했다.  실험 데이터도 여러 곳에 가서 찍었는데 같은 결과였다. 절대로 실수가 아닌 우리의 연구 결과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연구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액상 박리법으로 얻어진 흑린 박막의 활용 가능성을 직접 실험했다. 박병남 홍익대 교수팀과 함께 트랜지스터를 제작해 특성을 조사, 흑린을 이용한 소자가 아세톤을 선택적으로 감지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 박사는 "트랜지스터를 제작해 진행한 실험은 우리의 연구가 소자에 응용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 이었다"며 "흑린 박막이 특정유독가스에 대한 센서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보여줬다. 이는 실제 소자 제작이 가능한 실용화 단계로 발전된 연구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 흑린 반도체 박막 대량생산 기반 마련···고순도 흑린 국내 제작 목표도 

이주한 박사와 서순주 박사는 "흑린의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앞으로의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박은희 기자>
이주한 박사와 서순주 박사는 "흑린의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앞으로의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박은희 기자>
"흑린 박막을 만드는 방법이 간단합니다. 더욱이 저렴합니다. 만들기 쉽고 싸다는 것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존 그래핀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은 예상보다 빨리 올 수 있습니다."

이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로 흑린의 미래를 밝게 진단한다. 흑린이 광촉매 및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응용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아직은 풀어야 할 과제도 많지만 연구팀에게는 즐거운 숙제다. 

이 박사는 "흑린이 그래핀을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상호 보완을 통해 미래용 소자를 만드는데 크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반도체 소자에 응용하기 위해서는 선행돼야 할 연구들이 아직 많다"고 밝혔다. 

흑린의 국내 제작도 넘어야 할 산이다. 현재는 흑린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유럽에 소재한 흑린 제조업체가 독과점하고 있어, 가격과 품질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박사는 "인 자체는 엄청 싸다. 흑린을 우리가 직접 만든다면 경쟁력은 상당해 질 수 있다"며 "현재 연구원에서 흑린을 생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약 80% 정도 성공했다. 국산화가 이뤄지면 고품질의 흑린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흑린이 갖고 있는 장점만큼이나 큰 장애물인 불안전성은 우리가 연구로 해결해야 한다. 연구 분야가 많고 넓지만 우리가 선도해 나갈 수 있기에 즐거운 연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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