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나무에 하얀 꽃이 주렁주렁 열리면서 꿀 내음이 가득한 향기가 코끝에 느껴지기 시작하면 눈 감고도 5월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5월은 아까시아꽃 말고도 유난히 흰색 꽃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는 계절이다. 길가에는 조금 멀리서 보면 흰 쌀밥 같은 꽃을 가득 달고 있는 이팝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이팝나무꽃을 보고 있노라면 가늘고 긴 꽃잎들은 봄 바람에 유난히도 흔들려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숲가에는 고운 향기를 전하는 찔레꽃이 수줍은 미소를 지며 피어나고, 산딸기, 층꽃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등에도 하얀 꽃들이 피어난다. 정원에는 하얀 꽃방울을 양손 가득 든 수국백당도 핀다. 또 길가에는 녹색과 흰색의 향기가 어우러져 피어나는 앙증맞은 작은 꽃의 쥐똥나무도 있다.
물론 다른 색의 꽃들도 피긴 하지만 유난히 흰색 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마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지닌 신록의 잎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모든 어린 잎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그중 막 피어난 메타세쿼이아 잎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무공해 빛으로 자라난 연녹색의 잎 사이에서 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벌과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는 녹색과 대비가 뚜렷한 흰색으로 피어나는 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봄꽃을 사러 화원들이 모여있는 동네에 간 적이 있다. 아내가 여기 저기 꽃을 둘러보는 사이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 있었다. 다양한 원예종의 꽃들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일은 마치 금광맥을 발견한 광부처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바구니에 가득 담긴 작은 송이들이 모여있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화원 주인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한데 정확히 이름을 알 수가 없어서 였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는 안개꽃이라고 알려주었다. 안개꽃이라면 장미나 다른 꽃을 장식하기 위해 부재로 많이 사용하는 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보니 정말 안개초라고도 불리는 그 안개꽃이었다. 늘 다른 꽃의 조연으로만 찬조 출연하는 안개꽃이어서 유심히 들여다 보지 않았었지만, 예쁜 바구니에 홀로 가득 담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주연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안개꽃의 꽃말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래서 그 사진에 '5월의 순수한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여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그랬더니 그 사진에 페이스북 친구 한 분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놓았다. 내용을 조금 다듬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분의 아내가 꿈에서 저승에 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어떤 남자는 장미꽃 한 송이, 다른 남자는 튤립 두 송이, 또 다른 남자는 모란 세 송이를 들고 가더라고 한다. 물어보니 꽃송이 수는 이승에서 사랑했던 여자의 숫자를 의미 한다고 했단다. 그런데 이 분은 큼지막한 안개꽃 한 다발을 들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아내가 꿈을 핑계로 지청구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룬 후 자신은 안개꽃이 싫어 졌다는 내용이었다.
결혼 한 지 40년이 된 내 아내도 가끔 이와 같이 꿈 속에서 내가 서운하게 한 꿈을 꾸고 나면 지청구를 하곤 하였다. 가끔 영문도 모른 채 투정을 받아야할 때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게 보통 부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봄에는 화원에서 아내가 사온 여러 가지 색의 수레국화가 아름답게 베란다를 장식하고 있어 마치 꽃이 핀 들판에 와 있는 듯 기분을 좋게 한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모 세대나 우리 또래의 많은 엄마와 아내들은 늘 '아이들의 엄마' '남편의 아내'처럼 조연으로 살아갈 때가 많았다. 이 오월에는 내 아내를 포함해서 모든 엄마와 아내들이 바구니에 홀로 가득 담긴 안개꽃처럼 순수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재발견되기를 소망해 본다.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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