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는 기득권을 상징, 기득권 버리고 개혁해야 성공 "
IBS·대덕넷, 18일 UST서 상상력포럼D 개최···이광훈 작가 연사로

"상투를 잡은 '선비'와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라는 망했고, 한나라는 세계 패권에 도전했습니다. 상투의 상징은 기득권입니다. 메이지유신에서 사무라이는 상투를 자르며 귀족 계급을 내려놓고 하층계급 신분제를 없앴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개혁에 성공했습니다."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 쓴 이광훈 작가는 일본을 악의 축으로 바라보는 선악론 관점이 아닌 역사의 본질을 파악해 근현대사의 새로운 관점을 조명하자며 이같이 강조했다.

18일 오후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총장 문길주)에서 열린 올해 두 번째 상상력포럼D를 찾은 이광훈 작가는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의 주제로 역사의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비춰나갔다.

이광훈 작가는 강연에서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의 주제로 역사의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비춰나갔다.<사진=대덕넷>
이광훈 작가는 강연에서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의 주제로 역사의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비춰나갔다.<사진=대덕넷>
그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은 비슷한 운명을 유지해왔지만, 운명은 메이지유신 전·후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해 세계 패권에 도전할 수 있었던 시발점으로 '요시다 쇼인'의 쇼카숀주쿠 사설학당을 꼽았다.

요시다 쇼인이 이끈 야마구치 쇼카숀주쿠 사설학당은 1857년 11월에 개설해 1858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약 13개월 동안 90명의 메이지유신 주역 제자를 배출한다.

요시다 쇼인은 신분을 초월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하층민과 고급 사무라이와 동문수학을 실시했다.

작가는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 아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모두 천민 출신이다"며 "획일적인 교육방식을 타파하고 자유토론에 의한 강론을 펼쳐온 것이 메이지유신 주역 제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어 작가는 현재 일본의 교육관을 설명하며 "요시다 쇼인은 페리 함대에 밀항을 시도하다가 막부 감옥에 수용됐을 당시 2년간의 투옥생활 동안 600권의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일본의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는 교육관이 이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 한 명인 '다카스키 신사쿠'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1863년 사무라이만으로 편성된 정규군을 대체할 기병대를 창설했다. 신분과 관계없이 기병대 지원을 허용하고 국민 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 창설에 기반을 뒀다.

작가는 "신사쿠 역시 요시다 쇼인의 교육관 영향을 받아 인재확장을 통한 총력전 체제를 구축했다"며 "기병대 2000명 중 70%는 농민이고 그중 90%는 둘째였다. 하층민들이 존재감을 과시해야 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웠다. 일본 육군의 모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또 다카스키 신사쿠는 1864년 12월 80명의 병사로 쿠데타를 일으켜 죠슈번의 4000명 병사를 정복하고 이어 10만여명의 막부군을 물리치며 메이지 유신의 기반을 다졌다. 이 작가는 "다카스키 신사쿠는 사쿠라야마 신사에 살아있는 사람의 무덤인 생묘와 묘비를 써놓고 싸울 정도로 목숨을 걸었다"며 "안 될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이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일본인들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상투'를 자르며 근대화에 앞장섰고, 그 결과가 메이지유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작가의 해석이다.

작가는 끝으로 "일본은 봉건사회의 기득권 세력인 상급 사무라이들이 상투를 자르며 생명을 건 개혁을 펼쳐왔다. 반면 조선의 상투를 잡은 선비는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끝까지 개화·개혁에 반대해왔다"면서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의 본질을 파악해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대원군의 쇄국 정치는 '잘못된 선택'···"기득권 내려놓아야 개혁 가능"

질의응답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시간이 됐다. 

조선 말기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본과 조선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지적에 이 작가는 "당시 조선의 경제 규모는 일본의 2/3 정도 였다. 당시 상황이 일본보다 부족하긴 했지만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썼느냐를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1905년 조선의 공식 조세 수입은 300~350만원 정도 였다. 한 해 정부 예산이 500만원 정도였으니 150만원이 적자였다. 일본이 1907년 조세 개혁을 실시하고 5년 여만에 조세 수입이 630만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며 "당시 경제 상황이 갑자기 좋아질리 없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망할 정도가 아니였지만, 부패가 심했기에 내부적으로 자멸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일본의 개방이 빨리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은 하이테크를 선두 해 가는 것은 우리보다 늦었지만 퍼트리는 것은 빨랐다"며 "대표적인 예가 필사문화다. 필사에 능한 테크니션이 서양문물의 핵심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그림과 글로 필사해 퍼트렸고, 이런 것들이 팔리면서 시장까지도 형성됐다. 신지식 보급을 우리보다 쉽게 대중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흥선 대원군이 쇄국 정책이 아닌 개방 정책을 폈다면 조선의 미래가 달라졌겠냐는 질문에 이 작가는 '잘못된 선택이 부른 결과'라고 못박았다.   

이 작가는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미국과 손잡고 유리한 내용으로 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개방에 대한 충격도 최소화하려 했다"며 "우리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미국은 모두 개방에 좋은 상대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을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척화비를 세우고 문을 닫았다. 잘못된 방향을 설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일본 개방 이후 펼친 정책에 대한 질문에서는 "파워엘리트의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전제하며 "일본도 혁명 초기에는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내란, 암살 등으로 기득권 세력이 죽으며 이토 히로부미 같은 천민 출신이 권력을 잡았다"면서 "이들은 가진 것이 없었으니 갚아야 할 빚도 없었고, 개혁에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UST에서 열린 올해 두 번째 상상력포럼D는 산학연 관계자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사진=대덕넷>
18일 오후 UST에서 열린 올해 두 번째 상상력포럼D는 산학연 관계자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사진=대덕넷>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