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오성의 과학기술정책] 전환적 과제를 찾아야할
교차로에서

'너희가 목적지를 향하여 확고한 걸음으로 걸어갈 때 너희는 진정 선하다.
 하지만, 너희가 아무렇게나 절름거리며 걸어가더라도 너희는 악하지 않다.
 절름거린다고 꼭 퇴행하는 것은 아니므로.

 크나큰 자아를 향해 갈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언덕의 비밀과 숲의 노래를 담고서
 힘차게 바다로 달려가는 급류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천천히 흐르는 강물로써,
 바다에 이르기까지 강물 굽이굽이에서 스스로를 잃고 배회한다.

 하지만 열렬히 갈망하는 이로 하여금 갈망할 것이 없는 이에게
 "왜 그대는 그렇게 느리고 멈칫거리기만 하는가?"라고 묻게 하지 말라.

 벌거벗은 이를 보고 "그대 옷은 어디 두었는가?"
 집 없는 이에게 "그대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묻는 것은 선이 아니듯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 서론 :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다" 이후···

지난 해 11월 대덕넷 기고에서 연구현장 문제는 그 환경과 구조를 살피는 접근이 필요함을 피력한 후, 필자는 특정 구조적 문제의 실제 해결 전제 조건과 환경 또는 피상적 구호 나열 현상과 원인 등의 여러 문제에 집중했다. 하지만 여러 정책담론의 현장을 보며 아직도 '무엇을 말하기 보다는 왜를 말해야 할 때'라고 느낀다. 모두 열정이 있지만 무엇을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합의의 기초가 너무 허약하다는 생각에서다. 어떤 이는 큰 틀에서 신뢰 부족을 거론하지만 그 신뢰의 문제도 참 모호한 것 아니겠는가?

◆ 어떤 아이 이야기 : 현상적 담론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우울증과 자폐에 빠진 아이가 있다. 이 아이에게 힘내라는 말은 소용없는 무지일 뿐이다. 그 아이가 울면 "이제 그만 울어라", 마음의 병이 깊어져 말도 표현도 못하면 "너는 왜 아무 생각이 없냐"는 치명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를 피해도 또래 아이들의 '왕따'를 피할 수는 없다. 반에서 물건이 없어져도 갑자기 비가 내려 체육 수업이 취소돼도 짜증난 아이들은 아닌 줄 알면서도 이 아이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낄낄거린다.

상담전문의가 아니면 대개 아이의 이상행동에만 주목하고 아이를 나무라는 '백해무익한 조언질'에 그친다. 최악은 자수성가한 아버지 또는 누군가의 "내가 어릴 때는 말야···" 스토리와 같은 고난 극복 영웅담이다.

친구들의 따돌림도 힘든데 누군가의 고난 극복 영웅담은 모든 게 자기 책임이라는 의식을 강화시킨다. 때로 아버지는 이런 푸념도 한다. "누구는 안 그런데 쟤는 왜···." 그렇지만 이 아버지는 결코 무지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많은 시간과 관심을 아이의 치유에 배려했다. 상담 선생님의 호출에 응하고 아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성찰했다. '아이의 자율성이 자라려면 성급한 기대보다 충분히 기다려야 함'을 내면화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젠 기다리다 지쳐 있다. '이 정도까지 노력했으면···' 하는 억울한 마음이다.

엄마는 아이를 직접 낳고 길렀기에 현재의 상태와 장래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사를 한 뒤로 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연구자들 중심의 온실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마음을 주었던 친구가 결정적인 순간 등을 돌리는 사건을 겪으면서 아이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엄마의 자애는 아이가 자폐의 늪에 빠지지 않는 버팀목이었지만 거기서 헤어 나올 동아줄이 되지는 못했다. '나름 전문가'들의 조언도 부담스럽고 혼란을 가중시킨다. 현명한 엄마는 자신의 능력만 아니라 주변 환경의 한계를 알고 최고의 상담 전문가를 꼬박꼬박 찾아간다.

상담 결과, 아이는 정서가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할 뿐 아니라 스쳐 본 것을 다 외울 정도로 지능이 대단히 높고 한 번 들은 곡을 혼자 익힌 피아노로 연주할 만큼 예술적 재능도 빼어나다. 엄마의 착한 마음과 지혜, 아빠의 강한 자기실현 욕망을 모두 물려받았지만 유약한 어린 아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들과 환경의 변화 앞에서 무력감만 커진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천재적이고 감수성이 강한 아이들이 지나야 할 독특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겨내면 아이는 집안을 일으키고 마을과 나라를 구할 재원이라고 상담가는 격려했다.

비싼 상담료를 지출하며 상담이 계속되지만 아이가 처한 환경은 그대로여서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엄마는 희망을 찾고 아이도 희망을 갖는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상담가는 지친 엄마에게 먼저 주목한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건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니어도 좋으니 어서 다른 아이들처럼···" 이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에 힘이 생기고 일어서려면 먼저 부모가 건강해야 한다. 치유의 첫째 관문은 현대 문명의 기술적인 어떤 것에 있지 않았다.

아이의 빛나는 미래를 확신하고  아이의 존재를 감사히 여기며 불안보다는 믿음을 갖고 지켜보는 것에 상담가는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전투 같은 과정은 여러 번 고비를 맞는다. 지친 마음과 사람들의 시선 등 모든 게 어려운 상황이지만 마음의 치유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지혜로운 부모들은 결국 받아들인다.

아이는 회복의 증거로 자신을 거칠게 표현한다. 울고 아파하는 표현의 강도가 세어지는 것이 부모는 힘겹지만 상담가는 반긴다. "네가 이러면 안 되지, 네가 저렇게 하지 그랬어···" 라는 섣부른 '책임론'이나 대안 제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들은 이해했고, 대화는 항상 "다른 아이는 문제되지 않는 것이 너에게 힘든 이유는 네가 특별한 선물을 받아서 그런 것", 또는 단순히 "네 잘못이 아냐" 라는 격려로 시작되었다.

아이가 제 목소리를 내고 그것을 수용하고 지지해주는 환경의 변화를 확인한 순간, 상담가는  아이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뿐 아니라, 마음 한 편에 왜 저런 아이가 태어났어! 하던 아빠는 "저 아이 덕에 나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한다.

그 모든 과정을 온 몸과 영혼으로 겪고 난 뒤에야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특별한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영리한 만큼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해서 피상적 관계와 정치공학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힘겨웠음을. 무엇인 문제인지 몰라 혼란했지만 부모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어서 빨리 '치유된 보통의 모습을 흉내 내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이 모든 것은 지혜로운 아빠와 엄마가 기술적 변화가 아닌 존재론적 변화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음을 직시함으로써 가능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의 문제와 변화는 부모의 한계와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우주의 선물이었다는 해석은 주관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자라서 영화 '굿 윌 헌팅'에서 MIT의 천재적 청소부 청년 윌 헌팅을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돕는 사려 깊은 상담가인 심리학자 숀의 원형이 된다. 이 모든 스토리는 출연연의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해법을 고찰해 보기 위해서 가정한 가상의 스토리다.

◆ 이야기의 비유와 적나라한 현실

R&D 투자의 공공성 : 국가혁신·경제성 담론으로 수렴

국가 주도 과학기술 투자는 2차 대전 이후 전(全)세계적으로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일반화된 방정식이다. 1980년대 이후 기초 응용연구가 어떻게 산업적 효과로 이어질지, 산업적 효과 외에도 공공의 가치는 무엇인지, R&D자원 공급위주 정책 외에도 민간의 R&D와 혁신을 유인할 수 있는 환경은 무엇인지 등등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국가의 투자는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산업(국방 등 전략기술, 보건, 환경 기술) 외에도 일반 산업체가 선행투자하기 어려운 혁신적 기술에 선도적으로 투자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공급하고 관련 인프라 구축과 고급인력 육성이 강조되었다. 국가혁신체제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런 개별 주체의 육성만이 아니라 혁신 주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제도(IP보호, 지재권 등)와 지원제도(클러스터, 네트워크 형성 등)를 통한 긴밀한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경제체제 속에서 국가주도의 과학기술투자의 효과성 제고를 위한 논란은 경제학자들을 비롯해 선진국에서도 뜨거운 주제다. (자세한 내용은 '후기' 참조)

전환적 정책과제의 무게 : 합당한 책임과 희생양 사이

우울증에 빠진 그 아이는 바로 이런 거시적 컨텍스트 속에서, 무수한 이해관계자들과 혁신체제의 성숙과제 속에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는 출연연 연구자들 개개인이다. (관료는 푸대접, 국민은 무관심... "나는 한국 과학자", 대덕넷, 2015 참조) "이제 좀 그만 울어라", "너는 왜 아무 생각이 없느냐"고 하는 가까운 친인척은 출연연을 둘러싼 환경 구조 역사보다는 현상적 문제만 바라보는 일부의 언론과 정책인에 비유할 수 있다.

반 아이들이 툭하면 아이 뒤통수를 때리듯 언론은 과학기술정책의 모든 문제를 출연연에 묻는 기사를 쏟아낸다. 현상적 비판과 섣부른 대안을 거론하지만 그 현상을 잉태한 근본적 원인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통합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풍선효과와 같이 또 다른 부작용만 커질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국가연구사업 수행 주체(기업 외의 각양의 연구수행 주체) 중에서 출연연 연구 결과가 투입 대비 성과(기술료 중심)로 볼 때 다른 주체들보다 2배 이상 성과가 높은 점(산업기술연구회 통계자료, 2012) 혹은 완벽하지 않아도 가장 윤리적인 연구주체라는 점(과학기술 전문 대(大)기자의 평가)은 거론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구조적 문제를 거론하면 '그래도 네가 좀 잘 하면 되지···'의 대응이 돌아올 뿐이다.

화풀이에 일정부분 책임을 인정하더라도,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본질적·구조적 문제에 대한 담론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정책 현장 : 현상 vs. 전환적 과제의 축소와 외면

왕따시키는 친구들은 정부 R&D의 파이를 나누는 이해 관계자들이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정체 모를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은 출연연 성토가 역사적 사명인 줄 알지만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성찰은 없다. 이들은 각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더 많은 관리와 평가, 혁신도약형 연구라는 명분과 결과 중심의 인센티브가 해결책이라 여기지만 국방 R&D의 경우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도록 관리 중심으로 진화한 결과 결국에는 '관리의 함정'에 빠진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관리적 절차와 평가를 강화한 결과, 주어진 절차대로 준수하면 결코 실패란 없지만 아무 혁신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 - 우리나라 국방 R&D의 성공률은 100%이지만 국방 수입규모는 전(全)세계 세 번째이고 특히 기계와 IT산업 기반이 발전한 국가 중 세계 1위의 방산 수입국 - 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업 관계자들은 출연연 연구가 자신들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고 혹평한다. 이는 이해 관계자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이러한 책임전가 속에서 기업이 장기비전 가운데 연구수요를 제기하지 않고 추격형의 경쟁 행태에 매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업 주도의 빠른 연구개발이나 단기성과형 산업 전략과 대별되는 다른 정책수단은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즉, 우리나라 산업 전략의 전환적 변화와 관계된 과제라 볼 수 있음에도 간단히 출연연에 책임을 묻고 지나가는 것이다. 또한, 출연연이 단기성과를 요구하는 PBS과제가 아니라 자체사업을 통해 성숙시킨 역량을 통해 기업의 기술적 난제를 풀어주고 해결해 준 눈부신 성공 사례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CDMA와 같은 과거의 대형 성공 사례와는 차이가 있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런 성공은 이어지고 있다). 출연연의 성공적인 연구 사례들의 공통점인 안정적 연구환경과 연구리더십은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많은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독일 프라운호퍼식 빠른 변화를 주문하지만, 독일정부가 기업지원 연구를 위해 제도화한 다양한 연구 환경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첫째, 기업지원형 연구를 위해 필요 인력은 해당 연구부서 재량으로 자율적 추가 연구원 모집이 가능하다. 둘째, 기업지원형 연구를 위해 필요 핵심기술 확보를 위한 별도 선행연구가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셋째, PPP(Public-Private Partnership) 사업을 통해 민간이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산업에 대해서도 출연연이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협력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넷째, 독일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국가 연구사업 수주보다는 필요한 연구를 프라운호퍼에 의뢰하여 그들의 전문성을 통해 지원받는다. 우리나라 영세 중소기업들 중 한 두 명의 연구원을 고용하고서 R&D 명목의 실제적인 국가보조금 사업을 확대하거나, PBS 체제 속에서 출연연과 경쟁 구도 속에 있는 사례들과는 대조된다.

더욱이 영국의 국가혁신체계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Mazzucato 교수(영국 Sussex대학교 경제학과)는 그의 저서 '사업가적 국가(Entrepreneurial State)'에서 중소기업 연구지원이나 기업들(대기업, 중소기업을 무론하고)이 수행하는 R&D에 주는 세제 혜택 혹은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의 유효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혜택이 혁신활동 증가로 유의미하게 연결되지 않고 재정보조 외의 다른 기능을 갖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가차원의 전략적인 중대형 연구개발 과제를 만들어 이끌어가자는 새로운 '공급' 중심 국가주도형 정책패러다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Mazzucato 교수의 문제제기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대안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공급을 추가하는 입장보다는 시장의 기존 강자를 긴장하게 하고 신규 진입자를 유인하는 정책, 즉 경쟁형 공공구매사업 기반으로 민간 혁신을 유인하는 '수요 중심의 산업 생태계적 정책'이 IT와 같이 빠르게 진화하는 산업에서는 더 유의미한 '새로운' 패러다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 모델의 성공적 적용 사례는 최근 중국 정부가 발표한 기술혁신을 전제로 한 대규모의 전기차 공공구매계획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업생태계 구조에서 중소중견 기업의 취약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고용과 미래성장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중소기업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OECD보고서도 인정하듯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대기업 주도 시장경쟁 상황에서 GDP에 미치는 경제정책적 효과는 낮지만, 고용을 유지하는 복지정책 측면도 있다. 즉 우리나라 경제 기조가 대기업 위주로 운영되고 중소기업 지원과 보호에 대한 제도가 약한 구조적 측면을 감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가 후자를 대신할 수준은 아닐 것이며, OECD 보고서가 주문한 것도 응급수혈식 지원의 유지보다는 보다 구조적인 방향 전환이다. 구조적 방향전환 중에는 중소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혁신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인함과 동시에, 각자도생 방식의 경쟁이 아닌 국가 연구기관의 매개를 통해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협력하는 우리만의 새로운 정책모델 고안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영국의 사례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 대상 R&D사업에 의존하는 기업생태계에 대한 우려가 깊다. 실제로 중소기업 지원에 관용적인 정부 R&D 제도를 악용하여 회사 이름을 바꿔가며 정부 R&D로 연명하는 기업도 있다고 한다. 일부의 사례는 정책대안담론의 논거로는 불충분하고 '중소기업 육성의 중요성'이라는 대전제를 근거로 볼 때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영역이다. 다만,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이런 다차원적 문제와 정책 관여 요인에 대해 단순히 '출연연의 중소기업 전진기지화'나 혹은 '중소기업 지원 실적을 기관평가에 반영' 등과 같은 행정적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계와 각종 지방사업 등등 정부 R&D의 파편적 운영의 결과는 최근 놀라운 수치로 드러나 더 이상 유보적 판단에 머무는 것에 위기감을 던져준다. 작년 한 해 로봇관련 연구개발 사업만 해도 500개가 넘는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연구주체가 매우 제한되었으나 신성장 산업으로 예상되는 00분야는 200여 개, 00분야는 300여 개 사업이 한 해 동안 지원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렇게 파편적으로 추진되는 R&D 현실은 R&D 주제에 관한 중복성 심사, 부처별 역할 구분, 주관기관에 관한 경쟁체제를 통해 시도한 효율적인 정책목표를 무력하게 하고 바로 이것이 연구개발 거버넌스에 시급하게 파괴적 혁신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일례로 지식 허브로써의 출연연 역할이 강화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술한, 독일 프라운호퍼의 기업연계 연구 특성, 즉 기업이 원하는 연구를 국가 연구기관에서 대행하여 결과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거버넌스 체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실 이러한 연구개념은 고학력 연구자가 기업에 의해 유지되기 어려운 모든 전략산업에 적용 가능한 것으로써, 캐나다의 경우 시장실패 특성을 갖는 항공우주에 관한 R&D에 이 개념을 적용하여 미국과 유럽의 패권 속에서도 자국 항공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해 오고 있다. 또한 특정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우리가 폐지한 전문화계열화를 오히려 국가가 전략적으로 관리하여 기업이 장기적 안정적으로 혁신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인하며, PPP 제도와 국제협력·옵셋 활용 등 국가차원의 주도적 협상과 지원 제도를 통해 시장경쟁에 의존하지 않고도 시장독점적 지위에 있는 산업체의 혁신을 정책리더십에 의해 유도한다.
 
학계나 각양의 단체가 요구하는 각종 연구개발 사업의 필요성, 시급성, 구체적 방향에 대해서도 출연연이 전문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지식허브로써 이미 보유한 지식과 기술, 전략에 기반하여 '전문인력 파견 지원' 혹은 '단기 속성 기술지원' 또는 '전략적 조정' 형태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면 국고절약뿐 아니라 출연연이 보유한 지식과 기술을 공공재로 활용하는 '본연의 임무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다. "출연연은 과연 이런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목적지를 향한 확고한 걸음'을 언제나 무겁게 한다(추후 재론하되 이 문제는 전술의 문제이지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출연연을 통한 국가 R&D 사업의 효율화(산업화 중심)의 책임이 강조되려면 전술한 독일의 경우와 같이 기업 연구 지원에 관한 국가적 제도정비가 필요하다. 특히, OECD가 지적한 다음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정부는 방대한 종류의 기업 활동 및 중소기업 지원을 수행하고 있다. 다양한 사업들의 타당성과 효과 그리고 중첩되는 사업을 피하는데 중점을 두고 일부 간소화를 단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OECD, 한국산업기술정책보고서 요약본, 2015, 17-18) 산-연 협력이 낮은 문제의 원인으로 출연연에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출연연과 연계하지 않아도 R&D 과제를 충분히 수주할 수 있는 환경, 경쟁적 상황에서 기인하는 상호배제의 인센티브, 국가 R&D 사업의 기술적 혁신의 불충분성 등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환의 실기(失期) :  끈질긴 앙시엥 레짐

'나름 전문가'의 개입은 어떻게 비유될 수 있을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의 결여, 통합적 정책 대안 형성에 한계를 갖는 모든 레토릭이다. 일례로 '장기적인 플랜에 기반한 기초기술 투자 강화가 핵심이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기존의 블랙박스 담론(즉, 과학기술투자는 사회경제적 효과로 반드시 이어지므로 '비목적형' 의 기초기술을 포함한 모든 과학기술투자는 그 자체로서 정당하고 장려되어야 한다는 논리)이 빠르게 위력을 잃고 있다. 목적형 기초연구(Use-Inspired Basic Research) 또는 아무리 도전적 연구라 하더라도 3~5년에 걸친 짧은 기간 동안 전문가들, 특히 연구전문 리더십(PM) 중심의 자율적 연구거버넌스 체제(DARPA식) 중심으로 추진하는 것이 이상적 모델로써 지속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런 모델은 '탈-추격형' 연구전략 담론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우리나라의 지역적 컨텍스트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또한 안정적인 투자가 이뤄지더라도 지역(국가)산업의 기술수용역량(RIS, Regional Inno-
vation Systems)이 고려되지 않으면, 그 성과는 해당 지역(국가)보다는 기술수용성 높은 다른 나라(예: 미국 등)만 이롭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를 유럽의 R&D정책학자들은 제기한다. 우리의 경우 IT와 해양플랜트 및 국방·전략산업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견된다. 핵심원천기술·부품을 해외에 의존한 채 제품·시스템을 목표로 하는 '과시성'전략이 원인일까? 핵심원천기술·부품을 강조한 개발전략도 혁신속도 문제(Time to Market)와 앞서 언급한 RIS 취약성으로 저조한 성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면적 접근(산업생태계/인프라조성, 인력양성, 시범사업 등)을 병행하는 '선택과 집중'의 투자는 어떤가? 이런 접근은 여러 부처의 참여와 거대 예산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에는 예산만 커지고 부실의 규모만 키운 결과로 귀결되기도 한다. 대안으로써 '혁신도약형 연구',  '전략적·도전적 연구', '융합연구'가 '전략사업·분야 발굴' 레토릭과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혁신의 성패는 계획보다는 기회포착·대응의 민첩성과 역량의 축적, 네트워크에 있다. 아무리 탄탄한 계획·전략도 유효성을 속히 잃는 시대이다.

따라서 연구정책은 사업발굴이 아닌 연구현장·환경·사람을 지향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연구리더십, 연구자의 자율성 확대, 산학연 협력과 관련한 거버넌스 체제, 지역(국가)산업의 기술수용역량과 이에 근거한 전략적 조정체계 등 근원적 개편은 거론되지 않고, '무빙 타겟', '성과에 대한 확실한(과도한) 보상', '질적 평가' 심지어 '추적 평가'등 행정적 대안으로 회귀하게 된다.

강력한 대안 : 전환적 철학공백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이를 자폐의 늪에 빠트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야기 속 친구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인들의 순수한 열정을 결정적으로 소진시키거나, 공공재로써의 연구자의 자발성과 정체성을 훼손한 다양한 사건과 환경 일부는 지난 기고에서 언급했다. 보다 개념적 사례로는 연구 자율성보다는 연구 예산 중심의 국가 R&D 개혁론, 연구 주제의 광범위한 지원과 단계적-질적 성숙보다는 단기적 톱다운식 국가주도 개발에 의한 양적 성장 추구와 이런 논리에 대한 광범위한 경로 의존, 연구의 창의성과 자율성보다는 윤리성을 강조한 제도 개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상위 1% 이공계 석박사들이 해외로 나가게 되는 연구 환경은 심각하다. '외국에서 국위선양하면 되지'라는 의견도 있지만 상황의 심각성과 이로 인한 기회비용, 잠재가치의 상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과기인 모두가 우장춘 박사는 아니며, 제 2, 제 3의 '우장춘' 박사들은 대부분 해외로 나가서 그 남은 꿈을 실현하고 있다.
 
선진연구기관들 특히 프라운호퍼의 성공적 결과를 모방하려면 그 연구환경과 구조에 주목하고 장기적 변화를 모색해야만 한다. 우리와 대별되는 프라운호퍼의 연구자율성(평가는 5년에 한 번 부서 평가가 전부)과 지원제도(기관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산업과의 연계 및 기술선도를 위한 기술주제 발굴 추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프라운호퍼만의 운영특성이 아니다. 선진국들이 행정부 간섭으로부터 연구기관 보호에 공을 들인 것은 오래 된 실제 속에서 축적된 다양한 경험과 교훈에서 유래한 과학기술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한 과학기술인 사회의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연구자의 정체성 : 국가 R&D의 고객과 주체는 누구인가?

비유에서 엄마와 아빠는 무엇에 비견될까? 어떤 이는 정부라고 할 것이다. 일부겠지만, 과학기술정책 관련 파트너이자 협력자로서 상호이해보다는 강력한 갑-을 역학관계로 굳어진 결과일 것이다. 깨어 있는 정부관료는 과학기술인들의 정책마인드 부족이나 의지 부족을 탓하고, 깨어 있는 연구자들은 정책관련 정보의 역비대칭성을 탓하며 고민해도 반영 안 될 것이라는 무력감에서 자신이 잘하는 전문성 강화에 몰입하거나 생활형 연구자에 머물면서 사명감 운운하는 이들의 피상성을 탓하기도 한다.
 
이것은 과기정책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다. 아버지는 우리 사회를 상징한다. 우리 사회는 과학기술투자에 비교적 너그러우면서도 오래 기다려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버티기가 힘들고 아버지의 눈에는 슬픔이 짙게 드리운다. "얘들아, 아빠가 언제까지 너희들 뒷바라지하고 싶지만···" 이것이 아버지인 우리 사회가 연구자들을 바라보는 아픈 심정 아닐까. 그러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또한 그 아버지는 우리 자신(과기인의 확장된 자아로서)이다. 과기인은 이 사회의 가장 능동적인 주체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명감에 호소하는 것이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체제가 못 된다 하더라도, 상위 행정부서만 만족시키면 된다는 의식이나(연구자의 경우), 그런 시각으로 연구자들을 일반화하는 것(외부자의 경우)은 곤란하다. 이곳 대덕넷에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자성의 목소리는 아이와 아버지의 사이를 이어주는 지혜자 '아니마'의 목소리요 그 거칠음만큼 희망적이라 본다. 현재의 문제를 '정부실패'로 모두 환원시킬 수 없듯, 그 실패의 책임과 결과에 대해 연구자들은 주변인으로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에.
 
◆ 결 론 : 새로운 꿈은 시지프스의 신화일까?

'도전적 연구성과 : 사명감, 보상의 문제 아니다'는 지난 기고에서 주장한 "구조적으로, 장기적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하자"는 주장에 대해 한 독자의 반응은 "구조적, 장기적, 철학적 접근을 한국 현대사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데 과연 가능할까요?"였다. 총론만 백화점식으로 무성하고 각론인 실천적 방식이나 과정에 대한 몰이해와 철학적 숙고와 합의의 부재로 인한 사분오열은 비단 과학기술계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과제들도 동일하다.
 
하지만 특정 집단에 책임을 전가하기 보다는 아이의 치유에 관한 책임을 주체적으로 내재화해 아버지 또한 존재적 변화를 경험했듯이 과학기술정책과 연구자의 정체성, 우리 사회의 전환적 과제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보다 분권적, 전문가 중심 사회로 전환하는 과제는 과학기술계만이 아닌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본질적 과제이다. 매킨지 보고서(2013)는 우리의 국가적 위기의 원인이자 대안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정치환경 조성'을 지적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 과제는 과학기술인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사회적 합의는 다양한 의견(숨은 위험, 가치확장의 기회요인, 다양한 대안과 제한조건 등)이 민주적인 소통의 환경에서 다뤄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때, 권위주의적인 우리 사회가 그나마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과학적 합리성' 이므로. 지난 기고문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지금 여러 영역에서 단기속성형 성과의 이해관계자들과 대기업 자본이 만들어낸 논리구조 속에 갇혀 있고, 구조적 문제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많은 경우 전문가들도 그 구조의 하부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거래한다. 옥시 사태처럼 전문인들은 이 거대구조에서 논리를 위한 논리제공 하도급자의 유혹 앞에 놓여 있다. 이는 서울대 특정 교수들만 직면한 도전일까?

어떤 학자들은 우리나라와 대만 등 아시아 선도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직면 과제를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탈피하지 못한 제도적 민주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종종 우리 사회와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또 다시 행정력의 강화와 보완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 지성인들 특히 과학기술 정책인들과 연구자들의 '가부장적 문화에의 적응', 또는 우리 사회 전반의 '경로의존성'(전환적 과제에 대한 감각부재)을 잘 보여준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이제 불연속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새 술은 새 부대가 필요하듯 전환적 정책 대안과 새로운 꿈은 새롭고 견실한 철학적 토대를 요구한다.

과학기술정책의 발전 담론도 '이전보다 나은 무엇'이 아닌 전환적 변화를 위한 성찰의 교차로에 있다. 불만 표출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식에 기반한 사명감과 철학으로 응집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계의 자율성과 안정적 연구의 중요성에 관한 선진사례, 이론적 토태는 충분하다. 하지만 자기 그림자를 직면하지 않고 성인이 되는 길은 없다. "과학기술투자 왜 국가가 해야합니까?"라는 질문에 "당연한 것"또는 "국가의 의지"라는 단순한 레토릭은 곤란하다. 우리가 '적응해 버린 현실'에서 어떻게 자성과 위기의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와 국가적·지역적 컨텍스트에 입각한 한국적 과학기술철학, 한국적 과학기술이상(Ideology)의 탄생, 그리고 이를 지원하고 외란 속에서 지켜낼 전문학자의 개입이 요청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과학기술자들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시지프스는 바위를 밀어올리고 있다.

◆ 후 기: 컨텍스트의 변화와 연구자·정책인의 책임

'한국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단결해서 극복하는 데는 뛰어나다. 그렇지만 쇼크나 위기가 없어도 잘 대응하는지 의문이다' 라는 매킨지 보고서(2013)의 또 다른 경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력과 자본에 의존적이지 않은, 독립성을 갖고서 견제 역할을 할 나팔수의 부재, 국내 지성사회의 활동 공간의 허약성을 꼬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전문가의 절대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 정책 현장의 핵심 화두에 개입하고 견제역할을 할 장(場)의 부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STEPI와 같은 조직의 중간자적 역할이 중요하다. 과학기술 정책학·행정학·과학기술철학·기술경영·과학기술사회학은 정책현장의 핵심 화두에서 배제되기 쉽다. 핵심 화두를 정책시장에 노출하고 학문적 연구와 소통을 자극하는 매개 역할이 성장해야 한다.
 
출연연은 이야기 속의 아이와 같지 않지만 '주체적 존재로서의 존중은 상당히 위축(16년 세종미래전략포럼)'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초·원천 기술의 중요성과 장기 안정적 연구의 중요성을 비판적 견지에서 주장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힘겹게 찾아가고 있는 과학기술계로서는 새롭고 거대한 도전 앞에 있다. 글로벌 경제체제 속에서 과학기술정책의 난맥상이 선진국을 필두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용돌이와 국내 산업현실을 감안할 때 '장기적 안정적 투자'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원론적 담론으로는 일관성 유지도 과기정책 이해관계자들과의 근원적 소통도 어렵돼 되었다. 컨텍스트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초과학에 대한 광범위한 Grant 형 투자를 비롯해 최고의 과학기술 투자국인 미국의 경우도 정책기조는 '경제적 목적' 및 경제성에 연역한 효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America COMPETES Act of 2007'과 이 법령의 2010년 재인준 등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 학자들은 글로벌 경쟁이 가속화된 경제 환경과 탈냉전으로 인한 군사전략기술 투자유인이 줄어든 것을 그 원인으로 언급한다. 그동안 묻지 마 영역이었던 '블랙박스(과학기술투자와 경제성의 연결고리)'에 여러 경제학자들이 주목하고 있고, 거기에 새로운 전략과 지식을 주입하고 있음을 국내의 정책인들과 연구자들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적 평가', '성실실패' '톱다운' 이라는 대안도 제한적이다. 선정·평가위원회 중심 체제에서는 위험회피 요인으로 한계가 있음이 이미 선진국의 사례에서 확인되었다. Peer Review의 효과성도 예산경쟁이 심하거나, 예산축소 과정에서 왜곡되는 특성을 해외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자치의 질적 성장'과 이를 지원하는 환경 즉 분권화, 견제와 균형, 단거리 속성형 경쟁력과 장거리 전략적 경쟁력의 병행 등이 관건이다. 이를 우회하는 모든 시도는 재고가 필요하다.

한국전기연구원의 조용하면서도 성공적인 내부혁신 사례와 이런 혁신을 가능하게 한 연구 거버넌스 환경, 안정적 예산 환경, 리더십 육성 과정의 사례, 그리고 어려운 연구환경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낸 몇몇 연구리더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이다. 선과 악을 가르거나 속성의 대안을 찾는 조급증을 뒤로 하는 겸허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 전환을 외부의 힘과 영향력을 빌려서 조급히 시도하면 필경 패착에 이를 것이다.
 
퍼즐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파괴적 혁신성과도 산업적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거나 해외만(혹은 해외를 더) 이롭게 하는데 여기에는 연구자나 산업이 풀 수 없는 상당히 거시적인 요인도 관계한다. 지역(개별 국가)역량의 문제만 아니라 갈수록 심화되는 비대칭성, 즉 미국 등 선진국의 강력한 지식흡수역량, 혁신기술수용역량이 관계하고 있다. 우리만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보다 잘하는 나라의 핵심에는 거버넌스정책(산학연 연계협력, 국제협력 등에 관한), 연구리더십 (적극적 위험수용, 미래가치 공유, R&R 등에 관한), 세밀하게 분화된 제도(예산편성·정책·리더십에 관한 견제와 균형, 과제선정·평가에 관한 위임과 책임 등에 관한), 풀뿌리 연구의 전략적 운용과 연구자 중심의 단계적 성숙 체제 등에서 발견된다.
 
당면한 거시적 정책방향수정은 몇몇 부문에서는 이미 명확하다. 예를 들어, '기술개발'에 관한한 단기적 성과가 아닌 '혁신역량(Innovation Capability)의 유지(전방기술 수용성·접근성, 전문가 네트워크, 산업클러스터 관점)'와 '점진적 혁신(Incremental Innovation)의 지속(기존 R&D 결과의 재사용과 지속적 진화·성장의 강조, 산업연계를 강조하는 관점에서)'이 정책적 화두로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이와 조응하는 전략적 화두가 회자되고 있다. 연구자 중심으로의 전환, 선도형이 아닌 탈추격형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하지만 연구자 중심, 탈추격형 산업전략의 의미는 다시 종전의 패러다임 속에서 해석되는 듯하다. 과학기술계는 이에 관해 얼마나 구체적인 안을 내놓고 공감의 기반을 확장할 수 있을까?

GDP수치로 나타나는 경제발전과 대기업 중심으로 달려온 우리 사회가 다음 역사의 장으로 발전하는 전환적 과제와 과학기술정책의 혁신과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전환적 고비에서는 보다 실제적이면서도 구조적인 성찰에 다가서야 한다. 먼저 익숙한 레토릭·합리화를 버려야 한다. 

그 버림·깨어남은 우리의 '아버지'가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시작될 것이다.  그런 레토릭 뒤에 편리하게 숨은 모순(책임은 모두 아버지에게 돌리면서 온전한 자율성을 요구하는)은 이미 고통을 되돌려주고 있다. 그 유사한 '패러독스(지원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선진국의 사례에서도 이론적 근거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권위주의적 문화와 행정중심의 경로의존성을 고려할 때 충분한 근거도 갖는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아들·딸이다. 선진국이나 관료의 아들이 아닌.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에게서 미래를 기대해주는 우리사회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그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규모대비 취약한 성과는 규모대비 취약한 연구환경(자율성만 아니라 예산·인적규모 등)에서 찾아야 한다는 반론도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25개 출연연의 예산은 국가 전체 R&D 예산의 6.6%, 연구자는 국가 전체 연구자 규모의 3.3%에 불과하다(2014년 기준, 정규직·비정규직 포함, 행정직·기술직·기능직 제외). 하지만, 우리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사회 구성원의 능동적 일원으로서 온 몸으로, 더 주체적으로 느끼고 우리의 역할을 찾아갈 때에라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사회와 연구자율에 관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경쟁으로 강화되고 있는 선도국의 산학연 연계체제, 지역적·국제적 네트워크 속에 가속화된 개방형 혁신역량, 지식패권국으로 집중되고 있는 '혁신역량의 빨대효과'와 '그들만의 리그화(블록화) 되어가는 첨단산업(항공우주·바이오·로봇·신재생에너지 등). 이러한 거시적 변화속에 무력화 되고 있는 국내의 혁신수용역량, 점점 사라지는 희망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산업현장과 정리해고 소식, 청년실업 문제와 고급이공계인력 엑소더스 등은 과학기술투자의 전략과 효율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변화하는 글로벌 컨텍스트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산업의 고유한 특성, 새로운 미래비전을 통해 전환적 과학기술 철학과 담론을 서두를 때이며, 과학기술인들 또한 이러한 전환에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조급한 조치나 피상적 책임전가는 더욱 곤란하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마술과 같은 '국가전략 R&D' 주제발굴이 아닌, 전환적 R&D 정책, 연구자들의 새로운 정체성,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새로운 거버넌스일 것이므로.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위 작품은 불운의 천재 반 고흐의 작품 중 유독 희망과 긍정이 넘치는 작품이다. 가난했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했던 화가 고흐에게 쉼과, 자아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공간이면서, 사랑하는 친구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따듯한 추억이 배경이 된 그림이다. 집은 없어도 화실은 소유할 수 있었고 그 안에 소중한 기억을 담았던 고흐처럼 연구자들도 사업가나 19세기의 귀족은 아니지만,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허락되어 있고, 생활인으로서의 연구자 이상의 의미를 찾아가는 도상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흐의 작품세계를 망친 것은 친구 고갱의 “섣부른” 조언이었다고 한다. 상품성을 갖고 좀 생활의 여유를 찾았으면 했던 친구의 의도였겠지만, 고흐의 명작들은 대부분 고갱이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아를의 반 고흐의 방', 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위 작품은 불운의 천재 반 고흐의 작품 중 유독 희망과 긍정이 넘치는 작품이다. 가난했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했던 화가 고흐에게 쉼과, 자아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공간이면서, 사랑하는 친구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따듯한 추억이 배경이 된 그림이다. 집은 없어도 화실은 소유할 수 있었고 그 안에 소중한 기억을 담았던 고흐처럼 연구자들도 사업가나 19세기의 귀족은 아니지만,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허락되어 있고, 생활인으로서의 연구자 이상의 의미를 찾아가는 도상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흐의 작품세계를 망친 것은 친구 고갱의 “섣부른” 조언이었다고 한다. 상품성을 갖고 좀 생활의 여유를 찾았으면 했던 친구의 의도였겠지만, 고흐의 명작들은 대부분 고갱이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안오성 항우연 책임연구원.안오성 항우연 책임연구원.
현재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제도 개선의 화두 중 반복되어 제기되거나, 첨예한 이견이 있는 주제에 대해 역사적, 문학적,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틸트로터 무인항공기의 기획 및 비행체 설계와 체계종합,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 T-50 개발사업에서 비행체 설계통합·서브시스템 체계종합·착륙장치 PM 등을 경험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항공우주부문 자문연구원과 민군기술협력센터 기술기획 소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성실도전 체계 TF에도 참여했습니다. 현재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수학 중이며, '과학기술정책과 사회적 책임', '창조국방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우리나라 산업 환경 및 국제동향, 국내 정책 환경의 컨텍스트 속에서 항공우주(산업) 및 거대공공과학 분야에 대한 장기적 육성 전략, 민·관·연 협력 체계, 국가 R&D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혁신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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