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발자취! 영원하다 - 上]핵융합 연구 권위자 故 정기형 교수 생전 인터뷰
서울대 은퇴 후 철원서 연구열정 불태워···핵융합 기술자립화 기틀 구축
제자들, 국가 미래 이끌 연구 주역으로 성장

1970년대 한국은 거대과학 연구의 불모지였다. 국내에는 제대로 된 핵융합이나 플라즈마 장치가 없었고, 기초 부품들은 전량 외산에 의존해야 했다. 그 시절에 제자들과 함께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핵융합장치를 연구·제작한 과학자가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훗날 한국원자력연구원, 국가핵융합연구소 등에서 연구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故 정기형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5월 13일 타계했다. 고인은 선진국의 전유물이던 핵융합과 전자가속기, 양성자가속기, 플라즈마 공학 분야에서 국내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일명 ‘망치 과학자’다. 

약 1년여 전 고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기자는 고인의 부고를 늦게나마 전해 듣고 마음이 허전했다. 고인은 한국 과학계에 끼친 영향에 비해 너무나 조용하게 떠났다. 도저히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이 ​'학자는 지식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면서 마지막으로 연구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던 강원도 철원 연구소를 찾았다. 유족, 제자 등을 만나 그의 생애를 역추적했다.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함께 남은자들의 이야기를 '과학자의 발자취! 영원하다 上·下'로 싣는다. [편집자의 편지]

지난 5월 7일 토요일 경기도 성남 소재의 한 요양병원 병실. 몸무게가 약 50kg이 채 안 되는 야윈 몰골의 말기 암 환자가 침대에 허리를 묶은 채 병상에서 진행된 세미나를 듣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지탱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이나 움직임은 전혀 없다. 오히려 발표를 듣는 눈매는 청년 연구자 못지 않을 정도로 반짝였다. 그렇게 매주 1번씩 진행됐던 세미나는 한 주 뒤를 기약했으나 이날이 마지막이 됐다.  

국내 핵융합 연구의 권위자 정기형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가 향년 78세로 지난 5월 13일 별세했다. 화려했던 연구성과와 달리 일명 '망치 과학자'의 장례는 조용하고 검소하게 진행됐다. 남에게 경조사를 알리는 것을 꺼렸던 고인의 뜻대로 ​장례에는 일부 지인과 유족만 참가했으며, 유해는 경기도 의정부의 선산에 안장됐다. 
  
고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도 철원군의 KAPRA 물리기술연구소 첨단전자빔산업기술이용센터에서 열린 정기학술대회에서 고인을 만나게 됐다.

플라즈마·가속기 연구자는 세대별로 크게 구분한다면 ▲1세대: 망치과학자(외산의존) ▲2세대: KSTAR 연구자 등(일부 국산화) ▲3세대: 독자기술·국제협력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시 학회에는 전세대를 아우르는 플라즈마·가속기 연구자가 모였는데 상당수가 그의 제자였다.

사전에 고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전해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고인은 여느 시골 할아버지와 같이 푸근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발표 하나하나 주의깊게 들으면서 이따금씩 날카로운 질문도 던졌다. 

학회의 공식적인 일정이 마무리되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인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고인은 그동안 진행했던 주요 연구와 함께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등을 차근차근 털어 놓았다.

"실리콘 접착제 갖다 쓰려면 그렇게 해. 잔뜩 사놓고는 안쓰고 있어."
"급히 내려가야 하는가? 저녁도 좀 푸짐하게 같이 먹고 내려가지 그래."

인터뷰 중간마다 철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 대전, 전주 등지로 떠나는 제자들이 인사를 청해 왔다. 그는 헤어짐에 아쉬워 하면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모습이었다. 표정에는 잠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선진국의 전유물이던 핵융합과 전자가속기, 양성자가속기, 플라즈마 공학 분야에서 국내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망치과학자 故정기형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강민구 기자>
선진국의 전유물이던 핵융합과 전자가속기, 양성자가속기, 플라즈마 공학 분야에서 국내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망치과학자 故정기형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강민구 기자>
◆ SNU-79부터 KSTAR 개발까지···"서울대 퇴임 후 철원서 플라즈마 연구 개척"

"해외에는 공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연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비를 아껴 장비를 구매해 연구실에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수위들이 연장을 쓰고 있고, 국산 장비는 어지럽게 널려 있었죠. 방만 둘러봐도 공학적으로 우수한 학생이 누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허허허(웃음)"

정 교수에게 자신에 대한 짧은 소개를 부탁하자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일본인의 번역을 따와서 원자로라고 불리는 장치를 연구해 왔다"면서 "이 장치에는 중성자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원래는 중성자 공학로나 핵로(Nuclear Reactor)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당시 미국 프린스턴 TFTR(Tokamak Fusion Test Reactor), 일본은 JT(JAPANESE TOKAMAK)-60, 유럽에서는 JET(Joint European Tokamak) 등을 활용하고 있던 반면, 한국은 핵융합 연구장치가 전무했다.

정 교수는 "젊은 교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개발해 놓은 기술 데이터를 받아서 쓰기만 하고 우리가 기술 자료를 남에게 줘본 적이 없었다"면서 "가속기 중에서 기술 데이터 추출이 가능한 반데그라프 가속기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권숙일·이문종·조성호 박사 등이 제작했던 '1.5 MeV 싸이클로트론'에 이어 서울대에서는 2번째인 반데그라프 가속기 'SNUT-79'를 1975년부터 제작해 1979년 이를 완성했다. 여기에 사용된 모든 부품들은 정 교수와 제자들의 손을 거쳐 탄생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작한 초전자석은 훗날 KSTAR에 활용되는 초전도 자석을 만드는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정 교수와 제자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SNUT-79'.<사진=강민구 기자>
정 교수와 제자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SNUT-79'.<사진=강민구 기자>
정 교수는 "다른 장치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많은데 토카막(Tokamak)은 가속기의 한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면서 "전류나 전압을 키우거나 낮추는 등 변수를 조절하는 것으로 원리는 같은 장치"라고 말했다.  

국가핵융합위원회가 창설되고 KSTAR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정 교수는 선택의 기로에 들어섰다. 구리코일로 전자석을 만드는 토카막 장치 개발을 원하는 원자력연구원 소속 연구자와 초전도 자석 개발을 원하는 연구진들이 대립했다. 

"KSTAR 프로젝트는 정근모 장관이 계속 초전도 자석을 하자고 밀어붙여서 되었습니다. 이왕이면 선진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죠. 제자들이 양쪽에 다 진출해 있었는데 결국 초전도 자석 개발을 지지했더니 다른 제자들이 저를 원망했습니다. 아쉽지만 국가 미래를 생각한 결정이었습니다."

KSTAR 프로젝트는 이경수 現 ITER 사무차장을 주축으로 시작되었으며, 연구자들이 부족해 정 교수의 제자 10여명이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정 교수는 "그 때 참여한 제자들이 모두 나이가 들어 소장, 간부가 됐다"면서도 "KSTAR를 지을 때 반대하던 그룹도 다 합쳐서 하자고 했는데 결국 타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고 털어 놓았다.

고인은 지난 1991년부터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한국플라즈마가속기협회를 서울대 안에 설립해서 연구를 수행했으며, 과학기술처(미래부 전신)의 승인을 받았다. 후학들을 위해 서울대를 떠날 결심을 한 그는 1999년 천안 소재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거쳐 2001년 철원으로 옮겼다. 2000년대 노무현 정부 때 지역균형발전이 추진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의 우수 연구자 유치가 활발해졌고 철원군청에서 연구소 유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정 교수는 민간의 투자를 받아 폐교였던 송동분교와 수련원 건물을 개조하고, 새로운 연구실도 지었다. 철원군청에서는 분교와 수련원 부지를 20년간 임대하고, 전력도 무료로 사용토록 했으며, 인근의 군부대에서도 지원했다.

정 교수는 "이공계 연구소는 반드시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고민한 끝에 철원군을 선택하게 됐다"면서 "전국적으로 700~800여곳의 폐교가 많은데 장소탓을 하지 말고 식구와 떨어져도 연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설립 이후의 연구소 운영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철원군이 별도로 재단법인 철원플라즈마산업기술연구원 설립 등에 나서면서 지원이 감소했고, 정 교수는 운영비 확보를 위해 정부출연연연구진 등과 경쟁하면서 과제 수주에 나서야 했다. 운영비 확보가 쉽지 않자 직원 상당수가 연구소를 떠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도 겨우 기회가 있어 이만큼 시설을 확보했는데, 설립 이후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해서 안타깝다"면서 "공부만 하던 사람이 과제를 수주하고 운영하려니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 교수는 "국가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연구는 국가가 나서서 비전을 세우고 순수연구, 상업연구 등 각 연구별 특성을 고려한 체계적인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사립연구소는 자립 능력이 부족해 연속성이 결여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플라즈마공파 기술로 한·미·일 특허를 낸 이후, 건설부 등 각종 부서를 찾아다니면서 보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과 사고 발생 등을 우려한 공무원들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 3년의 시간이 소요됐고, 결국 홍콩·인도 등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직접 돌아다니면 관련 연구자를 찾는데 우리는 그러한 부분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민간연구소에서 직원들의 급여를 주고 운영을 해야 하는데, 이처럼 결정이나 지원이 미뤄지면 결국 못하게 됩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국민이 요청할 때 신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가속기·플라즈마 연구자.<사진=강민구 기자>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가속기·플라즈마 연구자.<사진=강민구 기자>
◆ 기초는 뇌리속에 항상 있어야···측정부터 하나하나 '제대로'

"1970년대 초창기 과제를 수행할 때만 하더라도 국산 기술로 개발한 자가 없어 일본 미쓰도요(Mitsutoyo) 자를 사용했습니다. 제자들이 회사·연구소 등으로 가서도 이를 사용하면서 이 자가 확산되었어요. 한 번은 표준연구원 회의에 가서 계측하는 자만이라도 국산화를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연구진들이 어느날 자를 개발해서 가져왔어요. 그런데, 일본 제품과 대조했더니 15센티미터의 측정값에서 0.5밀리미터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속기는 1000분의 1mm 이하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죠. 금속 재료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정 교수는 측정과 기초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온도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을 무시할 정도로 내구성이 있어야 하며, 측정에서 오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길이, 무게, 시간 등 물리학 기본단위 측정기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어 미국, 일본, 유럽서 수입에 의존한다"면서 "전체적으로 팔리는 것이 적어 개발을 못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그래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제자들의 발표 중 발생하는 고장사례를 자세히 살펴 보면 반도체, 스위치 등 전자회로를 잘못 연결해 생기는 고장으로 판명되는 사례를 보게 된다"면서 "기초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다 잊어버리는데 사고가 나면 방비책이 없기 때문에 항상 뇌리속에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핵융합을 연구할 때도 100만·1000만·1억도 안에 들어야 상업로가 될 수 있다"면서 "임계플라즈마 조건 내에 들어가야 핵융합로가 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온도가 어떻게 견디고, 전극은 어떠한 재료를 사용하는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계측과 측정 과정에서도 신뢰성 있는 방법과 기준 확보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미국재료시험학회(ASTM)나 일본공업규격(JIS)에 규정돼 있는 측정 방법을 사용해 데이터 신뢰성을 높여야 하며, 필요하면 국방부 테스트 방법 표준(department of defense test method standard)처럼 내구성을 인증받은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미국, 일본 등 수입한 물질이라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물리학 척도(파라미터)와 같은지 여부부터 테스트하는 것이 기초"라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측정법을 활용하다보면 거대 프로젝트나 연구는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거짓말이 계속 쌓이게 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계속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전쟁을 위해 기초를 계속 다진 국가"라면서 "왜놈이라고 무시하고, 사과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기초를 다지면서 일본 보다 월등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약 1년여전 학회에 참석한 제자들과 고인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오영국 국가핵융합연구소 KSTAR연구센터 부센터장, 김기만 국가핵융합연구소장, 故 정기형 서울대 명예교수, 최원호 KAIST 물리학과·원자핵공학과 겸임교수, 권면 前 국가핵융합연구소장)<사진=강민구 기자>
약 1년여전 학회에 참석한 제자들과 고인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오영국 국가핵융합연구소 KSTAR연구센터 부센터장, 김기만 국가핵융합연구소장, 故 정기형 서울대 명예교수, 최원호 KAIST 물리학과·원자핵공학과 겸임교수, 권면 前 국가핵융합연구소장)<사진=강민구 기자>
◆ 망치 과학자의 마지막 가르침···"연구자, 전체 보는 안목 필요"

"학회에 참석해 서로 식사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고민들을 털어놓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런데 자꾸 대의명분만 내세우고 감춰요. 진솔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 교수는 제자나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같이 답했다. 정 교수는 잔소리를 하면 피해 달아나서 안하게 된다면서도 "제자들이나 후학들의 발표를 보면 대학생처럼 자신의 흥밋거리만 갖고 와서 발표를 하고, 전체의 흐름을 보거나 목표설정·전략 추진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종합과학장치인 핵융합장치 연구를 위해서는 각자 맡은 분야의 장치 연구만 할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세계적인 학술·기술 추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하 273도 이하에서 냉각되는 저온 초전도체를 예로 들며, 세계적인 추세가 고온초전도체로 발전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동향에 주목하면서 자신들의 장치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자신의 분야에서 필요한 연구만 하고, 정년퇴직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끊임없는 연구와 조사를 통해 과학적인 질문과 과학적인 답변을 하면서 연구 개선을 위해 싸워들고, 달려 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플라즈마·가속기 연구의 1세대로서 변화하고 있는 세대 특성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자 정 교수는 "세대가 다른데 이야기한다고 되겠는가"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 교수는 "1세대가 무조건 닥치고 연구해보자고 했다면 지금은 보신주의가 많다"면서 "시대가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맞춰 교육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머리가 좋다는 것은 기억력이 좋거나 창조하는 두뇌가 있다는 것으로 구분했다. 이를 선생들이 잘 개발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고 정의했다. 

정 교수는 미래 교육의 방법으로 전쟁박물관과 석탄박물관을 예로 들었다. 정 교수는 "교육은 과거 보다는 현대의 모습을 보면서 미래 발전상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령 전쟁박물관은 한국전쟁 당시의 무기만 전시할 것이 아니라 최신 현대 무기는 어떻고, 현대에 한국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단번에 제압해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군인이 총을 쏘거나 대검을 찌르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전자파를 활용하면 첨단무기전에서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생각만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능한 첨단무기를 고안하고 대중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강원도 소재 석탄 박물관도 석탄을 난방에 사용했던 과거 보다는 이를 카본 나노튜브 등에 활용하고 있는 현대 과학과 결합된 교육을 하면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       

정 교수는 "교육은 과거 보다는 현재의 활용 모습을 보면서 미래를 위한 탐색의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학생들이 전시물을 보면서 과거는 이렇고, 현대는 이렇게 왔으며, 미래는 이렇게 될테니 내가 연구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의 필요성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 정 교수가 연구자료, 신문기사 스크랩 등을 보관한 전시실로 안내했다. 전시물들을 함께 둘러보던 중 또 다른 후배들이 연구실로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제자인 이강옥 박사에게 시설 안내를 대신 부탁했다. 기자와 작별인사를 청하며 제자들을 만나러 가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정 교수는 연구실 의자에 앉아 후학들을 위한 아낌없는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열정 가득한 설명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떠한 세대 간 벽은 볼 수 없었다.
 

고인이 철원까지 찾아 온 후학들을 위해 조언을 해주고 있다.<사진=강민구 기자>
고인이 철원까지 찾아 온 후학들을 위해 조언을 해주고 있다.<사진=강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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