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발자취! 영원하다 - 下]철원 연구소 설립자 떠났지만 재정비 태세
안전관리자 등 신규 합류···기존 장비 등 활용해 재정비 준비

북한을 코 앞에 두고 강원도 철원군 서면의 한적한 산골 마을. ‘상승 백골(常勝 白骨)’이라는 큰 간판을 내세운 군부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약 3분 정도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녹색 간판과 함께 차단봉 너머로 연구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고인의 자취를 찾고, 유족을 만나기 위해 1년여 만에 철원을 다시 찾았다. 한국플라즈마·가속기협회 물리연구소는 故 정기형 교수가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 연구진들과 함께 처음으로 정착했던 곳이다. 황무지를 연구소로 개척하면서 연구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던 그의 열정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전기도 들어 오지 않고, 수풀만 가득했던 이곳은 지난 15년간 '제4의 물질'인 플라즈마와 가속기를 연구하는 공간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정보현 박사가 차단봉을 직접 열어 주면서 기자를 반겼다. 정 박사는 고인의 3남 1녀 중 막내. 형들은 미국에 있고, 누나는 서울에 있어 그는 홀로 연구소에 남아 정리 작업에 한창이다. 더운 날씨 탓인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건물은 외관상으로는 허름하다. 정 박사의 안내로 연구소 안으로 들어서자 기름 묻은 각종 연구장비와 도면으로 가득 차 있다. 도서관, 회의실, 세미나실, 공구실, 연구실 등 구색은 모두 갖췄다. 연구실로 이동하면서 계단에서 본 작업용 크레인과 도서관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작업용 크레인과 도서관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사진=강민구 기자>
작업용 크레인과 도서관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부품들과 함께 조화된 서적.<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부품들과 함께 조화된 서적.<사진=강민구 기자>
◆ 학교 떠나 철원서 연구 매진···"마지막 순간까지 연구 생각"
 
"부친은 기인이셨어요. 사실 대화한적도 별로 없어요. 부친의 한마디면 두말 없이 따랐죠. 철원에서 일하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줄곧 교수님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정 박사가 회의실로 안내했다. 내부는 에어콘이나 선풍기 하나 없어 자연스럽게 땀이 맺혔다. 민간과 정부세금으로 연구소가 구축된 만큼 돈을 최대한 아껴서 지어야 한다는 고인의 의지가 반영돼 온·난방을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방식의 자연채광으로 지었다. 때문에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

아직 부친을 떠나보낸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정 박사가 다소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 1999년 9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단극발전실에서 폭발사고 발생 이후, 집에 거의 들어 오지 않고 이곳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사고로 대학원생 3명이 숨지고, 1명이 큰 부상을 입게 됐다. 폭발사고의 원인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 교수는 안전지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다.

고인은 철원에서 정착한 이후,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철원군은 겨울에 눈이 잘 녹지 않는데 고인은 눈폭탄주의, 화재주의 등을 각 건물마다 붙이고, 인근의 산을 직접 돌면서 산불주의 현수막을 게시했다. 또, 새벽 6시에는 항상 안전모를 착용하고 건물 주위를 순찰했다. 각종 장비 관리시에도 직원 2명 이상을 배치해 교차점검 하는 등의 주의를 기울였다.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정보현 박사는 취업을 앞두고 이따금 부친을 찾아 미래에 대한 상담을 받곤 했다. 잠시 이곳에서 연습생으로 일했던 그는 이탈리아 소재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정 박사는 부친의 요청에 따라 귀국 후 철원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 

정 박사는 "원래 귀국 후 좀 쉬다가 한 달 이후부터 일하라고 하셨어요"라면서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전화를 주셔서 당장 내일부터 근무하라고 하셨죠. 그때가 학회 준비를 하루 앞둔 때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고인은 자식에게는 무뚝뚝하고, 엄한 편이었다. 정 박사가 유학을 가서 전화를 해도 왜 자꾸 전화를 하냐고 할 정도였다.  

철원을 떠나 한국연구재단, 양성자가속기센터 등에서 근무하던 그는 올해 1월 부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철원 연구소로 합류했다.

정 박사는 "지난 2008년부터 지병인 고혈압을 앓고 계셨어요. 제 결혼식에도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찾아 오셨죠"라면서 "처음에는 병원을 몇 번 가시더니 그만 두고 처방받은 혈압약만 계속 드셨어요. 패혈증으로 돌아가신 조부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으셔서 병원을 싫어하셨어요"라고 말했다.

고인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해 5월. 고인은 얼마나 더 살겠는가라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다시 연구활동에 매진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건강 상태가 악화되면서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하게 됐다.

정 박사에게 들은 당시 병상의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냉장고에 고인의 요청으로 그가 사온 소주로 가득 찼던 것. 지인들이 하나 둘씩 찾아 올 때마다 고인은 음식을 대접했고, 이따금 약주도 청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어떻게 이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병원에서 정밀검진 후 더 이상의 치료 방도가 없다고 진단하자, 고인은 성남 소재의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정 박사는 매일 병상을 찾았다.

정 박사는 "평소라면 왜 매일 오냐고 말할 부친이 별 말씀이 없으셔서 의아했어요"라면서 "일주일을 조금 넘기고 별세하셨어요. 아마 죽음을 직감하셨던 것 같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재 연구소에서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인프라는 이제 어느 정도 구축되고 있지만 인력 수급이나 과제 수주 등이 쉽지 않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정 박사를 포함한 직원들은 재정비 태세를 갖춰 나가고 있다.

정 박사는 "민간연구소로서 인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매각하거나 재도전해야하는 시점에서 이대로 마무리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다시 해보기로 결정했고, 한국가속기·플라즈마 협회에서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부친이 계실 때보다 벽이 생각보다 크네요. 전자빔가속기 장비 등의 활용 방법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죠"라고 힘줘 말했다.

병상에 있던 고인이 막내아들인 정보현 박사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사진=정보현 박사 제공>
병상에 있던 고인이 막내아들인 정보현 박사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사진=정보현 박사 제공>

◆ 제자들 "고인은 진정한 리더···연구소 자립 위해 최선 다할 것"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교수님이 외국이 출장을 가셔서 제자들이 모두 안심하고 각자의 연인들을 만날 생각에 부풀었었죠. 그런데, 교수님이 불연듯 귀국하셔서 학생들에게 어디냐고 연락하셨죠. 다들 연구실로 황급히 복귀했어요. 당시 대학원생 대부분이 장가를 못 갈 정도로 연구에 몰입했죠.(웃음). 또 학생들을 종종 구로에 보내서 외국산 모터 등을 사와서 직접 조립하고 만들면서 작동원리를 알도록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백광현 플라즈닉스 대표)

"제자들이 아침을 안 먹고 찾아 오면 전날 고구마를 삶아서 따뜻하게 건네셨죠. 닭 요리를 못 먹는 제자에게는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주시는 등 제자 맞춤형으로 신경을 쓰셨어요. 특별히 김치찌개가 맛있는데, 미국에 있는 제자들이 그립다고 할 정도에요. 물질로 주는 것보다는 자상한 마음이 감동을 주는 분이셨죠."(이강옥 한국가속기·플라즈마협회 박사)

고인의 제자들 중 철원에서 직접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는 제자로는 백광현 플라즈닉스 대표와 이강옥 한국가속기·플라즈마협회 박사가 있다. 백 대표는 정 박사의 안내를 통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 박사는 전화 통화를 통해 고인에 대한 회고를 들었다.

백광현 대표는 이곳에 상주했던 기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업체 대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백 대표는 90년대 말 실험실에 합류했다. 플라즈마 발파 관련 전문가인 백 대표는 현재 기술을 활용해 인도, 홍콩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백 대표는 "한 테마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서 이만큼 꾸려 오기 쉽지 않은데 고인은 누구보다 의지가 강했던 연구자"라고 하면서 "공무원들이 철원군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을 정도였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한국가속기·플라즈마연구협회의 이강옥 박사는 고인과 가까웠던 제자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1997년 서울대에서 포스닥 과정을 수행하면서 고인과 사제의 연을 맺은 그는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면서도 약 20년 동안 고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박사는 고인을 진정한 리더였다고 추억했다. 연구를 중요시하면서 주변인을 따뜻하게 챙기고, 일은 멀리보는 혜안을 갖춘 진정한 연구자였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약 20년 동안 교수님 곁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교수님이 존경받을 만한 리더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서 "제자들이 핵융합 장치를 빌리러 오면 무상으로 빌려주고, 책도 빌려주고 하셨죠. 퇴임하신 후에도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셔서 제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정도로 참 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법규를 절대로 어기지 않았고, 기업윤리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이 박사에게 마지막에 친필로 써준 것도 공무원의 자세다. 고인 앞으로 왔던 상품권도 바로 반송처리했다. 외부인이 와도 과제비로 식사한 적이 없고, 자신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이 박사는 고인이 추구했던 연구소의 자립을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이 박사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할 정도로 박식하고 역사의 산증인이셨던 교수님이 떠나서 허탈하다"면서도 "제자분들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안전관리자와 재료분야 연구원이 새로 합류한 만큼 연구소자립과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굳은 연구의지를 밝혔다.

◆ 연구실이 곧 박물관···"스크랩·서적 등 고스란히" 남아

정보현 박사의 안내를 받아 물리기술연구소와 인근에 위치한 첨단빔이용센터로 이동하면서 각종 시설을 둘러봤다. 돋보기, 사용하던 노트부터 각종 공구와 플라즈마 장치 등이 아직 정리되지 못한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인들에 따르면 고인은 새로운 연구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중요한 부분을 복사해서 제자들에게 1장씩 주곤 했다. 말수가 적었던 정 교수는 중요한 것은 문서화해서 전달하는 습관을 가졌다. 제자들이 질문하면 책을 건네주기도 했다.

기록과 보관의 대가였던 고인은 1926년부터 고인이 모아 온 신문 기사와 각종 기술설명자료 등을 모아 왔다. 전자빔을 활용해 멸균한 컵·바이오매스 목재 등도 보관돼 있다. 고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대신 전한다. 

고출력 고주파원 장치인 클라이스트론(Klystron).<사진=강민구 기자>
고출력 고주파원 장치인 클라이스트론(Klystron).<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자재들이 곳곳에 남아있다.<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자재들이 곳곳에 남아있다.<사진=강민구 기자>

플라즈마빔은 강철포까지 뚫을 만큼 강력하다.<사진=강민구 기자>
플라즈마빔은 강철포까지 뚫을 만큼 강력하다.<사진=강민구 기자>

핵융합 실험장치.<사진=강민구 기자>
핵융합 실험장치.<사진=강민구 기자>

강원도 철원군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한국·가속기플라즈마연구협회 첨단전자빔산업기술이용센터.<사진=강민구 기자>
강원도 철원군의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한국·가속기플라즈마연구협회 첨단전자빔산업기술이용센터.<사진=강민구 기자>

전자빔센터. 플라즈마를 이용해 멸균처리 등이 가능하다.<사진=강민구 기자>
전자빔센터. 플라즈마를 이용해 멸균처리 등이 가능하다.<사진=강민구 기자>

직원들이 직접 만든 우편물함이 흥미롭다.<사진=강민구 기자>
직원들이 직접 만든 우편물함이 흥미롭다.<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기술 관련 자료.<사진=강민구 기자>
각종 기술 관련 자료.<사진=강민구 기자>

이순신을 존경했던 고인이 일본의 대학 도서관에서 찾은 이순신 관련 평가 자료. 고인은 어렵게 복사본을 구해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했으나, 도서관측에서 원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해 무산됐다.<사진=강민구 기자>
이순신을 존경했던 고인이 일본의 대학 도서관에서 찾은 이순신 관련 평가 자료. 고인은 어렵게 복사본을 구해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했으나, 도서관측에서 원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해 무산됐다.<사진=강민구 기자>

이순신 자료, 연구자의 덕목 등. 고인은 중요한 글귀 등을 게시하고 직원들이 보도록 했다.<사진=강민구 기자>
이순신 자료, 연구자의 덕목 등. 고인은 중요한 글귀 등을 게시하고 직원들이 보도록 했다.<사진=강민구 기자>

1926년부터 1994년까지의 각종 자료. '기업윤리', '이순신 자료' 등의 파일이 보인다.<사진=강민구 기자>
1926년부터 1994년까지의 각종 자료. '기업윤리', '이순신 자료' 등의 파일이 보인다.<사진=강민구 기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고인은 추운 날이면 온실에 들어가 연구했다고 한다.<사진=강민구 기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고인은 추운 날이면 온실에 들어가 연구했다고 한다.<사진=강민구 기자>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가속기·플라즈마 연구자.<사진=강민구 기자>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가속기·플라즈마 연구자.<사진=강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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