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前 UST 교수
하루 전만 해도 에어콘 없인 못 살 것 같던 더위가 하루 사이에 에어콘은 커녕 선풍기도 필요 없고 저녁이면 문을 닫고 자야만 하는 서늘한 날씨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여름과 가을의 경계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자연이 대체적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바뀌어 가는 아날로그 세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날씨도 디지털화 되어 가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유난히도 덥고 길었던 여름의 뒷모습은 어찌 보면 쿨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갑자기 변심하여 돌아선 애인 같이 무언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얼마 전 8월 마지막 목요일에는 그동안 몸담아 왔던 학교에서 퇴임식이 있었다. 연구소에 있으면서부터 교수로서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연구소를 정년퇴직하고 대학 본부에 와서 새롭게 교무처장이라는 보직을 맡아 교육행정을 한 기간은 2년이 조금 넘었기 때문에 퇴임식까지 해 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론 학교를 처음 만들 때부터 참여하여 학교 발전을 위해 수고해 온 동년배 교수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그 분을 위한 장을 만들면서 함께 퇴임하게 되는 나도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식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일했던 연구소를 정년 퇴직할 때 가져보지 못한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준 학교 측의 배려가 고마웠다.
퇴임식이 있기 며칠 전 갑자기 무언가 기념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떠오른 게 나의 작은 사진 전시회였다. 그동안 많은 사진들을 찍어 페이스북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해왔고, 본 칼럼을 연재해 오면서 제법 많은 사진들이 모였다.
퇴직하기 전에 작은 사진전을 한 번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던 차였다. 짧은 시간에 쉽게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가지고 있던 작은 액자에 맞는 엽서 크기의 사진들로 미니 전시회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퇴임은 영어로 리타이어(retire)다. 리타이어는 16세기 쯤에는 '호젓함을 위해 어떤 장소로 물러나다(withdraw)'라는 의미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사실상 은퇴라는 개념이 없었다.
평균수명이 길지 않았던 오래 전 농경사회에서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였을 것이다. 188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나이가 들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직업에서 떠나 국가에서 주는 연금을 받는 제도의 아이디어가 고안되었으며 8년 뒤 독일에서 정년퇴직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당시 퇴직 연령은 70세였다고 하니 대부분 정년을 다 하지 못하고 일하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는 평균수명 100 세 시대라고 하는데 퇴직 연령은 오히려 더 낮아졌다. 그래서 누군가 이제는 평생 동안 직업을 세 번 쯤은 바꾸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영어의 리타이어(retire)를 '자동차의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운다(re-tire)'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정년퇴직이 한 직장에서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한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퇴임식에 맞추어 준비한 나의 미니 사진전은 '호젓함을 위해 조용히 물러나다'라는 원래의 뜻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re-tire'의 의미도 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전시회에 오는 손님들에게 작은 기념이 되기를 바라면서 내 사진으로 만든 작은 책갈피도 준비했다. 사진전의 메인 타이틀 사진으로 사용한 선씀바귀 사진으로 만든 책갈피 속에는 이번 미니 사진전의 컨셉과 너무 잘 어울리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넣기로 하였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길고도 지독했던 무더위가 지나간 8월 말의 한밭수목원을 아침에 잠시 들러 보았다. 아직 더위에 지쳐 힘을 잃은 모습으로 꽃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피어난 꽃범의꼬리 꽃에서는 박각시나방이 꿀을 먹느라 바쁜 날갯짓을 하고, 자세히 풀밭을 들여다 보면 사랑스럽게 피어난 작은 이질풀 꽃 뒤에서 귀여운 먹부전나비 하나가 마치 까꿍놀이라도 하듯 아침 휴식을 취하며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머지 않아 기운을 차린 풀밭에는 가을 꽃들이 피어나리라. 지독한 여름의 열기가 휩쓸고 간 풀밭도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가을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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