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 소강당에서 정태형 박사 퇴임식…후배 과학자들에 연구경험 공유
조그만 성과에도 과기부 장관 축하 전화 '감동'
후배들 "연구소 전통으로 만들어 가며 연구자 자긍심 높이고 싶다"

후배연구자들이 마련한 정태형 박사의 퇴임식이 8일 오후 ETRI에서 열렸다. 사진은 행사 후 기념촬영하는 모습.<사진=길애경 기자>
후배연구자들이 마련한 정태형 박사의 퇴임식이 8일 오후 ETRI에서 열렸다. 사진은 행사 후 기념촬영하는 모습.<사진=길애경 기자>
"KIST에서 연구를 시작해 1989년부터 ETRI에서 연구를 했으니 올해로 27년째네요. OLED 연구분야가 지금은 많은 연구들과 융합이 이뤄지고 있어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 주니 감사합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디스플레이를 실제 상용화하고 싶었는데, 그 부분은 후배들에게 맡기겠습니다."(선배 정태형 박사)

"대학에서는 퇴임 교수님을 위해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퇴임식이 있는데 연구소에서는 임기 끝나면 그냥 책상 정리해 나가는 게 관례죠. 형식은 간소하지만 선배의 연구활용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큰 자긍심이 됩니다. 앞으로 전통으로 만들어 가고 싶고요."(후배 이정익 박사)

ETRI 소강당에서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흔하게 보이는 플래카드, 자료 한장 없었지만 행사가 시작되기 전 연구자들이 삼삼오오 강당의 자리를 채웠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행사가 시작됐다.

국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연구 기반을 닦은 'OLED 대부' 정태형 ETRI 박사의 조촐한 퇴임식이 지난 8일 오후 4시 후배와 지인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후배들이 직접 행사를 마련하고 정 박사의 연구활동 내용과 열정,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듣는 자리로 진행됐다.

정태형 박사는 발표에 앞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후배와 그동안 같이 연구하며 도움을 준 많은 동료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초기 OLED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제 진행시 경험 등을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1989년경 KIST에서 ETRI로 오게 되면서 당시 같이 연구했던 김장주 서울대 교수의 제안에 공감해 OLED 연구를 시작하게 됐는데 국내에서는 연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 KAIST에서 고분자 물질을 제공받아 시작할 수 있었지요."

정 박사는 "고분자 물질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처음부터 플렉서블 플라스틱 기판에 구현하겠다는 목표로 디스플레이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면서 "하지만 90년대 초반 LCD 디스플레이가 각광을 받던 시기로 과제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다행히 ETRI에서 내부과제로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시작해 OLED 기판 구현의 가능성을 보이는 연구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정 박사가 OLED 기판 가능성을 보인 당시 연구결과와 보고서.<사진=길애경 기자>
정 박사가 OLED 기판 가능성을 보인 당시 연구결과와 보고서.<사진=길애경 기자>

정 박사는 "지금 돌아보면 너무 미미한 성과였는데 가능성을 보였다는 성과만으로 주목을 받았다"면서 "언론에도 소개가 되면서 그때 과기부 장관(서정욱 장관)이 '잘했다'고 직접 전화까지 했다. 하지만 후속 지원으로 과제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울면서 씨를 뿌리며 나간 자, 기쁨으로 거둬들인다'는 성경구절을 항상 신념으로 삼으며 연구에 집중했다"면서 "이후 연구과정을 정리해 고분자 관련 학회지에 투고했는데 이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처럼 활용했다고 하더라. 지금보면 무척 보잘것 없는데 연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정 박사는 90년대 초 ETRI의 연구 조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OLED 연구는 그야말로 당장 상용화도 안되고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당시 원장님(양승택 전 원장)이 기초기술부라는 조직을 만들고 미래를 위한 연구를 하라는 혜안이 있어 가능했어요. 원장님이 '나중에 두루마리 디스플레이 나오는 건가'라고 웃으며 해보라고 하셨죠. 다른 조직에서 질투도 많았어요. 돈만 쓰고 성과는 없는 연구를 한다는 질책도 있었지만 당시 연구했던 내용들이 지금의 연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 박사의 연구는 OLED 유기반도체 기술을 트랜지스터 소자 개발에 접목하며 국책과제에 선정됐다. 그는 "당시 LCD 등 각종 디스플레이가 각광을 받고 있었고 OLED 연구는 뒤쳐져 있던 상황이었다"면서 "과제를 발표하는데 심사위원이 모두 쟁쟁한 LCD 전문가들이었다. 어렵게 과제에 선정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려움 속에 과제가 선정돼 정말 열심히 했더니 2년 만에 목표를 달성하게 되더라. 그런데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니 거기서 끝났다"라며 "과제도 2년 만에 끝나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고 개인적인 아쉬움을 표했다.

정 박사는 이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며 그의 공식적인 OLED 연구를 마무리 하게 됐다. 하지만 정 박사의 초기 연구가 후배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TRI가 OLED 분야 연구를 선도하고 OLED 조명 분야 첫 표준을 마련한 것 등이 정 박사가 연구 토대를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라는 평이 적지 않다.

정 박사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정 박사는 "많이 인용되는 말인데 논어에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라는 말이 있다. 후배들이 연구하는 동안 즐기는 마음으로 해주면 좋겠다"면서 "해보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연구들이 남았는데 후배들이 꼭 이뤄주면 좋겠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디스플레이와 무선 전송시 몸체열을 사용하는 OLED 디스플레이를 꼭 성공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 박사와 함께 연구했던 김장주 서울대 교수는 "30년 전 ETRI 기초기술부에서 나노 양자소자 퀀텀 등 그 시기에 생각하기 어려웠던 미래 연구를 했다. 당시 했던 문자, 음성 인식 기술이 최근 스마트폰에 다 들어가 있다"면서 "기초기술에 대한 혜안과 연구가 중요하다. 연구소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날 퇴임식은 후배들이 마련한 조촐한 만찬까지 이어졌다.

부산에서 올라온 황도훈 부산대 교수는 "정태형 박사님 실험실에서 석사, 박사에 이어 포스닥까지 하면서 연구 열정, 신념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도 자주 연락을 드리는데 이후 시간이 되시면 후학 양성도 부탁드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ETRI의 한 참석자는 "지금은 100세시대다. 앞으로는 인생의 황금기가 60~75세라는 말도 있다"면서 "건강을 잘 유지하며 경험을 통한 새로운 기여를 당부한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선후배간 다양한 이야기 꽃을 피우며  간소한 퇴임식이 ETRI 뿐만 아니라 연구기관의 전통으로 이어지길 소망했다.

퇴임식 후 ETRI 내부에 마련된 만찬장. 선후배간 기념촬영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왼쪽부터 이정익 ETRI 박사, 정태형 박사, 황도훈 부산대 교수(왼쪽사진), 왼쪽부터 김정주 서울대 교수, 정태형 박사, 김호영 ETRI 박사(오른쪽 사진).<사진=길애경 기자>
퇴임식 후 ETRI 내부에 마련된 만찬장. 선후배간 기념촬영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왼쪽부터 이정익 ETRI 박사, 정태형 박사, 황도훈 부산대 교수(왼쪽사진), 왼쪽부터 김정주 서울대 교수, 정태형 박사, 김호영 ETRI 박사(오른쪽 사진).<사진=길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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