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계기로 발족, 2차 대전 패전으로 해체 위기 등 역경
오코치 소장,니시나 사장 등 리더십...'과학자 낙원' 평가

동양이 근대 과학을 받아들이며 아시아 최초로 만든 종합연구소인 일본 이화학연구소(理硏-리켄 www.riken.jp)가 올해로 설립 100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도쿄 우에노에 있는 日 국립과학박물관은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기간은 올해 2월28일부터 4월9일까지.

리켄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연구소는 KIST이다. KIST는 올해로 51주년. 리켄이 우리보다 50년 앞섰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가려는 길을 일본이 먼저 갔다는 것이고, 그 궤적은 우리의 방향 설정에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시회 내용을 화보로 꾸며 보았다. 리켄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되었으면 하고, 일본을 통해 우리가 갈 길을 내다 보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편집자 주]

전시관 입구 모습.리켄 백년의 발자취와 미래 백년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가 100년을 맞은 리켄은 1917년 설립된다. 1917년이 된 계기는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기 때문. 리켄은 일본 근대화와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발자취를 '도시락 상자에서부터 니호니움까지'란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꾸몄다. '도시락 상자'란 나무 등으로만 된 도시락을 알루마이트란 소재를 써서 금속으로 한 것.리켄의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국민 생활 향상에 큰 기여를 하며 일반인들의 뇌리에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깊이 각인시켰다. '니호니움'이란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개발한 새로운 원소,113번의 이름이다.첨단 과학의 상징이다.<사진=이석봉 기자>
전시관 입구 모습.리켄 백년의 발자취와 미래 백년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가 100년을 맞은 리켄은 1917년 설립된다. 1917년이 된 계기는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기 때문. 리켄은 일본 근대화와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발자취를 '도시락 상자에서부터 니호니움까지'란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꾸몄다. '도시락 상자'란 나무 등으로만 된 도시락을 알루마이트란 소재를 써서 금속으로 한 것.리켄의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국민 생활 향상에 큰 기여를 하며 일반인들의 뇌리에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깊이 각인시켰다. '니호니움'이란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개발한 새로운 원소,113번의 이름이다.첨단 과학의 상징이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이 개발하고 이름 붙인 알룸마이트로 만든 도시락 상자.<사진=이석봉 기자>
리켄이 개발하고 이름 붙인 알룸마이트로 만든 도시락 상자.<사진=이석봉 기자>

113번 원소인 니호니움의 분자 모형.<사진=이석봉 기자>
113번 원소인 니호니움의 분자 모형.<사진=이석봉 기자>

1917년 리켄 설립...리켄 설립은 일본 출신으로 미국에서 과학자로, 사업가로 성공한 다카미네 죠키치(高峰讓吉) 박사에 의해 주창된다.다카미네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사업화한 과학자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과 유럽에서 대규모 연구소가 잇따라 실럽되는 것을 본 다카미네 박사는 일본도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기초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창한다. 1913년 정부,재계 인사 등 120여명 앞에서 '국민 과학 연구소'의 설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씨와, 조미료를 개발한 이케다 키쿠나에, 황실의 후시미 사다나루 친왕, 화학자 사쿠라이 조지 등이 리켄 출범에 뜻을 같이하며 큰 역할을 했다.<사진=이석봉 기자>
1917년 리켄 설립...리켄 설립은 일본 출신으로 미국에서 과학자로, 사업가로 성공한 다카미네 죠키치(高峰讓吉) 박사에 의해 주창된다.다카미네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사업화한 과학자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과 유럽에서 대규모 연구소가 잇따라 실럽되는 것을 본 다카미네 박사는 일본도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기초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창한다. 1913년 정부,재계 인사 등 120여명 앞에서 '국민 과학 연구소'의 설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씨와, 조미료를 개발한 이케다 키쿠나에, 황실의 후시미 사다나루 친왕, 화학자 사쿠라이 조지 등이 리켄 출범에 뜻을 같이하며 큰 역할을 했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의 3대 소장으로 연구소를 크게 발전시킨 오코치 마사토시 박사...오코치 박사의 가장 큰 특색은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한 것이다. 서양 기술을 무조건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체의 산업을 스스로 과학적으로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놓았다.그의 생애는 일본 독자성 실현을 위해 바쳐졌다.그의 나이 43세때인 1921년에 소장에 취임해 1946년까지 약 25년을 재임한다. 오코치는 소장 취임후 바로 연구체제 개혁에 착수했다.설립 당초 물리학부(나가오카 한타로 부장)와 화학부(이케다 키쿠나에 부장)의 2부제로 발족했지만 주도권을 놓고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에 오코치는 부제를 폐지하고,주임연구원제도를 신설했다.연구실을 주재하는 주임연구원에게 연구 테마,예산 집행,인사권 등 연구실 운영의 모든 것을 맡기는 재량권을 주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연구 자세는 엄격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말이다. "연구자는 연구를 생명으로 하는 존재이다.연구에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혹은 연구 능력이 결여되는 사람은 파면하고, 신진기예의 연구자를 채용할 것이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의 3대 소장으로 연구소를 크게 발전시킨 오코치 마사토시 박사...오코치 박사의 가장 큰 특색은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한 것이다. 서양 기술을 무조건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체의 산업을 스스로 과학적으로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놓았다.그의 생애는 일본 독자성 실현을 위해 바쳐졌다.그의 나이 43세때인 1921년에 소장에 취임해 1946년까지 약 25년을 재임한다. 오코치는 소장 취임후 바로 연구체제 개혁에 착수했다.설립 당초 물리학부(나가오카 한타로 부장)와 화학부(이케다 키쿠나에 부장)의 2부제로 발족했지만 주도권을 놓고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에 오코치는 부제를 폐지하고,주임연구원제도를 신설했다.연구실을 주재하는 주임연구원에게 연구 테마,예산 집행,인사권 등 연구실 운영의 모든 것을 맡기는 재량권을 주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연구 자세는 엄격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말이다. "연구자는 연구를 생명으로 하는 존재이다.연구에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혹은 연구 능력이 결여되는 사람은 파면하고, 신진기예의 연구자를 채용할 것이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1호관. 이화학연구소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경위...1854년 개항, 1868년 메이지 유신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구미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다.메이지 후기, 구미의 공업이 기초연구에 기반을 둔 '이화학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구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다카미네 박사는 "앞으로는 모방이 아닌 독창성이 중요해진다"고 확신하고, 국민과학연구소 설립을 제창한다. 때마침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공업 원료와 의약품 등의 수입이 제한되며 연구소 설립의 기운은 일거에 높아진다.이에따라 각계의 지원과 기부금을 바탕으로 1917년 3월20일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1호관. 이화학연구소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경위...1854년 개항, 1868년 메이지 유신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구미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다.메이지 후기, 구미의 공업이 기초연구에 기반을 둔 '이화학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구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다카미네 박사는 "앞으로는 모방이 아닌 독창성이 중요해진다"고 확신하고, 국민과학연구소 설립을 제창한다. 때마침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공업 원료와 의약품 등의 수입이 제한되며 연구소 설립의 기운은 일거에 높아진다.이에따라 각계의 지원과 기부금을 바탕으로 1917년 3월20일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관련 회사들의 연구 결과를 묶은 월간지. 재단 리켄의 성과...재단리켄의 역사는 1948년에 막을 내린다.오코치는 그가운데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약 25년을 소장으로 일한다.소장 취임후는 각 연구실을 돌며 연구의 진척을 자주 물었고, 분야에 관계 없이 놀랄 정도의 박식으로 조언했다. 주임연구원제도의 기반위에서 활발한 연구가 행해졌고, 발표된 논문은 일본어 2000여편, 영문 등 외국어 1200여편에 이른다.오코치는 재정상황이 어려움에도 이론 물리학 등의 순수 이화학 연구에 아낌없이 연구비를 주었고, 동시에 리켄의 재정을 맞추기 위해 제품화 등으로 연결되기 쉬운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리켄에서 자란 연구자들은 전국 대학 등의 연구 기관으로 옮겨 전후 일본 과학 연구와 산업을 지탱해 왔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관련 회사들의 연구 결과를 묶은 월간지. 재단 리켄의 성과...재단리켄의 역사는 1948년에 막을 내린다.오코치는 그가운데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약 25년을 소장으로 일한다.소장 취임후는 각 연구실을 돌며 연구의 진척을 자주 물었고, 분야에 관계 없이 놀랄 정도의 박식으로 조언했다. 주임연구원제도의 기반위에서 활발한 연구가 행해졌고, 발표된 논문은 일본어 2000여편, 영문 등 외국어 1200여편에 이른다.오코치는 재정상황이 어려움에도 이론 물리학 등의 순수 이화학 연구에 아낌없이 연구비를 주었고, 동시에 리켄의 재정을 맞추기 위해 제품화 등으로 연결되기 쉬운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리켄에서 자란 연구자들은 전국 대학 등의 연구 기관으로 옮겨 전후 일본 과학 연구와 산업을 지탱해 왔다.<사진=이석봉 기자>

과학자의 자유로운 낙원...리켄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고, 이들의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며 과학자의 낙원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식적인 예의란 것은 연구소내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교토 대학의 키무라 교수가 보고한 것이지만 리켄의 젊은 인재들은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선생님, 그렇게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은 넌센스입니다...당시 젊은이가 교수에게 그런 말을 할수 있는 것은 리켄 밖에 없다.이는 역시 리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도모나가 신이치로(노벨상 수상자)<사진=이석봉 기자>
과학자의 자유로운 낙원...리켄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고, 이들의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며 과학자의 낙원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식적인 예의란 것은 연구소내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교토 대학의 키무라 교수가 보고한 것이지만 리켄의 젊은 인재들은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선생님, 그렇게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은 넌센스입니다...당시 젊은이가 교수에게 그런 말을 할수 있는 것은 리켄 밖에 없다.이는 역시 리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도모나가 신이치로(노벨상 수상자)<사진=이석봉 기자>

니시나 요시오와 일본의 물리학(일본 과학과 전후 부흥)...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패전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깔린 일본 물리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연구실에서 일했단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가와 히데키의 회상이다. "특히 니시나 연구실의 분위기는 다른 연구실에 비해 확연히 달랐다.출신 대학이나 어느 기관 소속이라든가 혹은 전공이 무엇이라든가 하는 영역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같은 문제에 흥미를 가진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열기를 띄며 토론하는 것이 가능했다."<사진=이석봉 기자>
니시나 요시오와 일본의 물리학(일본 과학과 전후 부흥)...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패전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깔린 일본 물리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연구실에서 일했단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가와 히데키의 회상이다. "특히 니시나 연구실의 분위기는 다른 연구실에 비해 확연히 달랐다.출신 대학이나 어느 기관 소속이라든가 혹은 전공이 무엇이라든가 하는 영역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같은 문제에 흥미를 가진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열기를 띄며 토론하는 것이 가능했다."<사진=이석봉 기자>

니시나 요시오 박사와 사이클로트론...원자물리학을 견인한 니시나 박사는 일본에 세계 수준의 가속기를 건설했다. 작은 가속기는 공습으로 파괴됐고,큰 가속기는 전후 곧바로, 원자폭탄 연구에 이용된다는 미군 사령부의 판단에 따라 태평양에 버려졌다. '라이프'에 게재된 가속기 폐기 사진.<사진=이석봉 기자>
니시나 요시오 박사와 사이클로트론...원자물리학을 견인한 니시나 박사는 일본에 세계 수준의 가속기를 건설했다. 작은 가속기는 공습으로 파괴됐고,큰 가속기는 전후 곧바로, 원자폭탄 연구에 이용된다는 미군 사령부의 판단에 따라 태평양에 버려졌다. '라이프'에 게재된 가속기 폐기 사진.<사진=이석봉 기자>

일본은 가속기 연구를 중시했다. 1966년 리켄이 와코로 이전하며 대표 사업으로 시작한 가속기 제작이다. 패전으로 태평양에 버려진 것보다 크게 만든다. 리켄은 새로운 가속기 제작을 계기로 연구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사진=이석봉 기자>
일본은 가속기 연구를 중시했다. 1966년 리켄이 와코로 이전하며 대표 사업으로 시작한 가속기 제작이다. 패전으로 태평양에 버려진 것보다 크게 만든다. 리켄은 새로운 가속기 제작을 계기로 연구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사진=이석봉 기자>

일본의 물리학을 변화시킨 한 통의 편지...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일본 과학계를 선진 유럽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 출발점이 당시 물리학계의 대가인 닐스 보어에 쓴 편지 한 통이다. 1923년 리켄 연구생으로 독일에 유학중이던 니시나는 덴마크의 보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가장 큰 소원은 보아 선생 밑에서 배우고 싶다"는 것. 다른 경로로도 니시나에 대해 알고 있던 보아는 니시나를 받아들인다.편지를 계기로 니시나는 당시 확립되고 있던 양자역학을 보아 밑에서 5년간 배우며 많은 성과를 내고 세계 1급 연구자로 일본에 돌아온다.이어 제자들을 키워 일본 물리학을 세계 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니시나의 소개로 하이젠베르크나 디랙 등의 당시 양자 물리학을 이끌던 인물들이 일본에 와 강의를 하고 그 강의를 들은 유가와 히테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이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사진=이석봉 기자>
일본의 물리학을 변화시킨 한 통의 편지...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일본 과학계를 선진 유럽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 출발점이 당시 물리학계의 대가인 닐스 보어에 쓴 편지 한 통이다. 1923년 리켄 연구생으로 독일에 유학중이던 니시나는 덴마크의 보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가장 큰 소원은 보아 선생 밑에서 배우고 싶다"는 것. 다른 경로로도 니시나에 대해 알고 있던 보아는 니시나를 받아들인다.편지를 계기로 니시나는 당시 확립되고 있던 양자역학을 보아 밑에서 5년간 배우며 많은 성과를 내고 세계 1급 연구자로 일본에 돌아온다.이어 제자들을 키워 일본 물리학을 세계 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니시나의 소개로 하이젠베르크나 디랙 등의 당시 양자 물리학을 이끌던 인물들이 일본에 와 강의를 하고 그 강의를 들은 유가와 히테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이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사진=이석봉 기자>

코펜하겐 정신...니시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보아의 지도를 받으며 세계 최첨단의 양자역학을 스스로도 개척하며 물리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분야와 입장에 관계 없이 철저하게 토론을 거듭하며 연구를 진척시켜 나가는 스타일과 관용의 정신인 '코펜하겐 정신'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리켄은 과학자의 천국이란 평가를 얻게 된다. 사진은 1937년 보아가 일본에 와서 일본의 과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사진=이석봉 기자>
코펜하겐 정신...니시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보아의 지도를 받으며 세계 최첨단의 양자역학을 스스로도 개척하며 물리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분야와 입장에 관계 없이 철저하게 토론을 거듭하며 연구를 진척시켜 나가는 스타일과 관용의 정신인 '코펜하겐 정신'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리켄은 과학자의 천국이란 평가를 얻게 된다. 사진은 1937년 보아가 일본에 와서 일본의 과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사진=이석봉 기자>

주식회사 리켄으로 출발...미 사령부는 전후 재벌해체 명령에 의해 리켄 재단도 해산의 위기에 처한다. 중대 위기를 맞아 당시 소장이던 니시나는 미 사령부와의 협상 끝에 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해 연구소 본체를 존속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리켄은 1948년 주식회사로 전환되고 니시나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기초연구에도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결국 니시나는 이로 인해 쓰러져 1951년 운명한다. 니시나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후학들은 잊지 않았고, 일본이 발견한 새원소인 113번의 원소 이름을 니시니움으로 한 것도 니사나에 대한 은혜 갚음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이석봉 기자>
주식회사 리켄으로 출발...미 사령부는 전후 재벌해체 명령에 의해 리켄 재단도 해산의 위기에 처한다. 중대 위기를 맞아 당시 소장이던 니시나는 미 사령부와의 협상 끝에 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해 연구소 본체를 존속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리켄은 1948년 주식회사로 전환되고 니시나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기초연구에도 힘을 기울임과 동시에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결국 니시나는 이로 인해 쓰러져 1951년 운명한다. 니시나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후학들은 잊지 않았고, 일본이 발견한 새원소인 113번의 원소 이름을 니시니움으로 한 것도 니사나에 대한 은혜 갚음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비타민...리켄이 연구 결과로 내놓아 크게 히트를 친 리켄 비타민을 담은 용기.비타민 A를 제품화시킨 것이다.응용연구의 결과이고 세계 11개국의 특허를 얻었다.<사진=이석봉 기자>
리켄 비타민...리켄이 연구 결과로 내놓아 크게 히트를 친 리켄 비타민을 담은 용기.비타민 A를 제품화시킨 것이다.응용연구의 결과이고 세계 11개국의 특허를 얻었다.<사진=이석봉 기자>

와코 이전...주식회사 리켄은 1958년 해산을 하고 과학기술청 산하 특수법인 리켄으로 다시 태어난다.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나가오카 하루오 등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연구환경을 만들기 위해 연구소 이전을 결단한다.미군이 사용하고 있던 사이타마현 와코읍(현재 와코시)를 이전 후보지로 놓고 검토하다가 1959년 확정 짓는다. 1967년 연구소가 문을 열고 "재단 리켄을 뛰어넘는 신시대의 종합 연구소"란 나가오카가 주창한 이상이 실현됐다. 참고로 나가오카는 니시나 요시오에 앞서 일본 과학 국제화의 선구자인 나가오카 한타로의 장남이기도 하다.<사진=이석봉 기자>
와코 이전...주식회사 리켄은 1958년 해산을 하고 과학기술청 산하 특수법인 리켄으로 다시 태어난다.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나가오카 하루오 등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연구환경을 만들기 위해 연구소 이전을 결단한다.미군이 사용하고 있던 사이타마현 와코읍(현재 와코시)를 이전 후보지로 놓고 검토하다가 1959년 확정 짓는다. 1967년 연구소가 문을 열고 "재단 리켄을 뛰어넘는 신시대의 종합 연구소"란 나가오카가 주창한 이상이 실현됐다. 참고로 나가오카는 니시나 요시오에 앞서 일본 과학 국제화의 선구자인 나가오카 한타로의 장남이기도 하다.<사진=이석봉 기자>

현대의 연구...현재의 리켄은 일본 유일의 자연과학 종합연구소로 물리학 화학 공학 생물학 농학 의과학 뇌과학 계산과학 환경 신약 인공지능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연구 테마와 연구 분야가 늘어나고, 개별 연구자의 자유로운 발상에 기반을 둔 연구와, 사회 요청에 부응한 과제 해결을 위한 연구 등으로 나뉜다. 분야와 조직, 국가를 초월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새로운 연구의 싹과 영역이 나오고 있다.기존의 연구에 구애받지 않는 분야 횡단형 연구가 행해지기 쉬운 것도 큰 특징이다.<사진=이석봉 기자>
현대의 연구...현재의 리켄은 일본 유일의 자연과학 종합연구소로 물리학 화학 공학 생물학 농학 의과학 뇌과학 계산과학 환경 신약 인공지능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연구 테마와 연구 분야가 늘어나고, 개별 연구자의 자유로운 발상에 기반을 둔 연구와, 사회 요청에 부응한 과제 해결을 위한 연구 등으로 나뉜다. 분야와 조직, 국가를 초월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새로운 연구의 싹과 영역이 나오고 있다.기존의 연구에 구애받지 않는 분야 횡단형 연구가 행해지기 쉬운 것도 큰 특징이다.<사진=이석봉 기자>

니호니움(Nh)의 발견...지구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는 92번인 우라늄이고, 그 이상의 원소는 인공적으로 합성해 발견한 것이다.1940년 이래 구미의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져 왔다. 리켄에서는 1980년대부터 연구를 본격화하고 2003년부터 113번 원소의 합성 실험을 시작했다. 2004년 7월, 2005년 4월, 2012년 8월에 1개씩의 113번 원소를 합성해 이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돼 2016년 11월 113번 원소로 공인된다.원소명은 nihonium이고, 원소 기호는 Nh로 정식 결정된다.원소주기표에 일본발, 아시아 최초의 새로운 원소로 추가됐다.<사진=이석봉 기자>
니호니움(Nh)의 발견...지구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는 92번인 우라늄이고, 그 이상의 원소는 인공적으로 합성해 발견한 것이다.1940년 이래 구미의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져 왔다. 리켄에서는 1980년대부터 연구를 본격화하고 2003년부터 113번 원소의 합성 실험을 시작했다. 2004년 7월, 2005년 4월, 2012년 8월에 1개씩의 113번 원소를 합성해 이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돼 2016년 11월 113번 원소로 공인된다.원소명은 nihonium이고, 원소 기호는 Nh로 정식 결정된다.원소주기표에 일본발, 아시아 최초의 새로운 원소로 추가됐다.<사진=이석봉 기자>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컴 '쿄(京)". 1초간 1경회(1조의 1만배)의 계산 능력을 목표로 개발된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이다. 계산이 빨라질수록 보다 고정밀도의 시뮬레이션을 보다 고속으로 할 수 있다.'京'은 여러 분야 시뮬레이션용으로 개발돼 재료 개발과 일기 예보, 제조,신약 분야 등 많은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2014년부터 보다 정교한 슈퍼컴을 만들기 위해 '플래그쉽 2020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사진=이석봉 기자>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컴 '쿄(京)". 1초간 1경회(1조의 1만배)의 계산 능력을 목표로 개발된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이다. 계산이 빨라질수록 보다 고정밀도의 시뮬레이션을 보다 고속으로 할 수 있다.'京'은 여러 분야 시뮬레이션용으로 개발돼 재료 개발과 일기 예보, 제조,신약 분야 등 많은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2014년부터 보다 정교한 슈퍼컴을 만들기 위해 '플래그쉽 2020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사진=이석봉 기자>

새로운 백년에...리켄은 설립이래 산업 발전을 위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지속해 왔다. 이는 앞으로 백년후도 변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백년후를 다짐한다. 우주 생성의 수수께끼와 생명의 신비 등 아직 해명하지 못한 많은 미지의 영역을 해결하기 위해 자립과 자율이란 연구문화를 바탕으로 백년후를 내다보며 연구를 지속시켜 나가겠다고 리켄 사람들은 다짐한다.<사진=이석봉 기자>
새로운 백년에...리켄은 설립이래 산업 발전을 위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지속해 왔다. 이는 앞으로 백년후도 변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백년후를 다짐한다. 우주 생성의 수수께끼와 생명의 신비 등 아직 해명하지 못한 많은 미지의 영역을 해결하기 위해 자립과 자율이란 연구문화를 바탕으로 백년후를 내다보며 연구를 지속시켜 나가겠다고 리켄 사람들은 다짐한다.<사진=이석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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