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영조 재료연구소 엔지니어링세라믹연구실장

박영조 재료연구소 엔지니어링세라믹연구실장.<사진=재료연구소 제공>
박영조 재료연구소 엔지니어링세라믹연구실장.<사진=재료연구소 제공>
퓰리처상을 수상한 '총, 균, 쇠' 이후 수많은 역작들과 아류작들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결정한 주된 요소가 바로 '지리(地理)'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가 꺼려질지 모른다.

혹자는 훨씬 더 숭고하고 고차원적인 다른 무언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주어질 따름이고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지리'라는 고정상수에 의해 이 세계가 형성되어왔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무기력함,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찍이 맹자는 '천시불여지리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 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를 설파했었다. 하지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지구를 살펴보면 사실 사람들의 노력 이전에 '지리적 이로움'의 경중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요소임을 부인하기가 쉽지 않다.

눈으로 목도가 가능한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를 설명하는 결과론적 해석은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이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지정학적 관점에서의 지구살이의 해석은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하다.

유럽 대륙은 농경에 유리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데다가 굽이굽이 흐르는 서로 연결된 강들은 교환을 위한 좋은 운송로마저 제공한다. 남아메리카는 대륙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해 있는 울창한 정글에 말라리아 모기가 득실거려 그나마 띄엄띄엄 발달해 있는 해안가 도시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시너지를 발현하지 못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삼분의 일은 불모지 사막인데다가 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낙차 큰 폭포들이 산재해 수운을 불가능하게 한다. 

종교도 사회체제도 상이하고 세계에서 인구도 제일 많은 두 대국인 중국과 인도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싸울 일이 없다, 군대가 넘어갈 수 없는 히말라야가 그 둘 사이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큰 산도 큰 강도 없어서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유린할 수 있는 통로였다.

왜 서양이 앞서가고 미국은 초강대국이 되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힘들게 살고 우리나라는 곤욕을 치러야 했는지,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손바닥 손금처럼 뚜렷해 보인다(팀 마샬의 '지리의 힘' 참조).

이렇게 '지리'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학자들의 접근법을 과학기술계가 시급히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걸 주장하고 싶어서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후 정부조직의 개편에 관해 여러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과학기술과 관련한 부처는 그 중에서도 꽤 규모가 있는 부처다. 부처 내 어떠한 부서가 과학기술계의 콘트롤 타워 기능을 수행한다면 마치 지구살이를 손금 보듯 해석한 바 있는 지정학자들의 요령을 배웠으면 한다.

만족스럽지 못한 연구투자의 '가성비'를 놓고 너무나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일선의 연구자들을 탓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지금 이 순간 세계의 '연구지도'를 그리고 앞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에 대한 '연구나침반'을 만들어주기를 부탁드린다.

과학자와 공학자도 인류학자나 지리학자, 지정학자 못지않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다. 인문학자들이 통시적이고 통공간적으로 지구살이를 성공적으로 해석했다면 우리 과학자들도 연구와 관련해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일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과학기술 콘트롤 타워는 꼭 위의 '지도'를 그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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