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글: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올해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상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했다. 시진핑의 역사 발언이 동아시아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기고문을 작성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시진핑의 역사' 기고문을 3편으로 연재한다.<편집자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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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 3편 바로가기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진=대덕넷 DB>
2017년 4월 6~7일 플로리다 마라라고(Mar-a-Lago)에서 있었던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상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1)

시진핑의 역사 발언에 한국의 언론은 전문적 의견에 관한 한 침묵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 발언 자체가 뉴스라인을 장식하기는 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는 외교부의 즉평에 모두가 동의한 듯 전문가 논단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서울신문과 국민일보가 사설에서 시진핑의 해명을 촉구하는 정도였고 한국 외교부도 "한국이 중국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국제사회가 인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지극히 평범한 논평을 냈을 뿐이었다.

일본 각료·수상의 망언에 보이는 반응이나 미국이 한국 정부에 적절하지 않은 대우를 할 때 한국민이 표출하는 비판적 태도나 그것을 미디어가 다루는 방식에 비추어보면 매우 절제되거나 무관심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지는 않다. 중국의 대북정책이 박근혜정부의 기대에 어긋나자 중국에 통보도 않고 사드배치를 결정함으로써 외교적 관행을 벗어났고 그 때문에 중국의 거친 행동에 대해 한국민의 관용 수준이 어느 정도 높아져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사드배치에 대한 거친 반응을 넘어 시진핑의 역사발언에까지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역대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 비해 신뢰도가 낮은 트럼프의 언행에 비추어 시진핑이 정말 그런 발언을 했는지에 관해 확인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하기 어렵다는 신중한 생각도 한 구석에서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 그만큼은 아직 한국민이 중국을 그리 가까운 나라가 아니며 신중히 관찰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이 피침과 식민지 피탈 역사를 겪은 지 아직 두 세대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민은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언행에 관해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할 뿐 아니라 감정적 반응지수가 높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아픈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한 역사도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고 중국이 한국을 능가한 분야도 많아지고 있지만 최근까지 한국에게 중국은 횡포에 대비해야 할 나라이기보다는 근대의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세계경제에 참여한 시기도 늦은 나라였다. 한국이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이러한 점을 배려했던 관성도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진정으로 한국인의 중국관에 아무런 영향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는 않다. 지난 70여 년간 미국에 대한 평가에 한국인이 보여 온 인식과 태도 변화는 중국에 대해서도 시사적일 수 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인은 미국에 대해서 매우 관대했다. 종전 후 정부수립까지 남한에 진주해서 군정을 폈던 미국의 치명적 실수들에도 공산화의 위협을 막고 전후에 한국이 부흥할 수 있는 단초를 미국이 제공해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이 미국을 날카로운 비판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은 1980년대를 겪으면서다.

광주민주화항쟁을 무참히 탄압한 독재정권이 유지된 것은 미국이 지지하고 비호하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는 어떤 미군 범죄도 한국 내에서 뉴스 소재가 되지 않았지만 1980년대부터는 달라졌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지금과 같은 한중관계가 지속될 경우 중국은 한국인에게 조만간 미국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 영해를 침범한 중국 어부들의 난폭한 행동과 같은 사건도 중국의 사회발전 수준 문제여서 그에 걸맞게 대응하면 된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이는 한국민들에게 숙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의 바다를 침범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중국어부에 대해서조차도 해경을 비롯한 일부 치안부서에서 다루어야 할 일이라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시진핑의 역사 발언은 아마 그와는 다른 계기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시진핑이 표출한 역사 인식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면 중국은 한국민으로부터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비판적 여론과 행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아마 천안문 앞의 시위를 광화문 앞의 시위처럼 감내할 만큼 정치가 성숙하지는 못한 중국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중관계는 적어도 가끔씩은 중국인들이 당혹감을 느낄 수 있는 긴장 상태를 선보일 것이다.

미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역사 이야기를 한 지 10분 후 트럼프는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트럼프에게 설득하는데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원을 차지한 왕조국가에 항쟁을 거듭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말을 했어야 더 맥락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나라 이후 한민족과 전쟁 없이 지낸 중국왕조는 송나라와 명나라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시진핑이 거칠게 설명해도 '북한을 다루기 어렵다'는 메시지가 트럼프에게 전달될 것으로 보고 취한 제스처의 일환으로 시진핑의 발언을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에 급변상황이 벌어지면 중국은 시진핑이 표명한 '역사적 연고권'에 바탕해서 북한에 진주하겠다는 속내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민 다수의 공통된 의견이다.

시진핑의 말은 트럼프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기 어려운 발언이거니와 다수의 한국인은 그것이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정부 지도자들의 지정학적 야망을 담은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시진핑의 역사발언은 '지리적 범위를 가리키는 중국'(이 때 중국은 현재의 중국이  점유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을 가리킨다)과 '민족국가 중국'(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 중국은 중국이 제국주의의 침탈을 겪으면서 형성된 개념이자 한족의 나라라는 개념이다)을 교묘히 등치시키면서 동아시아사를 왜곡하고 팽창주의 비전에 이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공식적,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진정으로 한국민들 사이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진핑의 발언이 트럼프의 입을 통해서 공개되자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 국민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간단하게 논평한 바 있다 (동아일보 2017.4.21.일). 길게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다. 하지만 다수의 한국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필자는 이제 그 일단을 전하고자 한다.

후한의 마지막 임금 헌제(獻帝)가 조비(曹丕)에게 왕권을 넘겨준 후 중원은 빈번한 왕조 교체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때 명멸한 여러 왕조의 왕들 중에서 대당 제국의 호탕한 문화의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은 선비족 문화개혁가인 북위의 효문제 탁발굉(拓跋宏)이었다(余秋雨 2010: 289-93).

탁발선비족은 439년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의 위업을 이루었다. 모용(慕容)씨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이 유목민 고유의 군사적 장점과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을 모두 취합하여 만들어 낸 이원적 통치체제를 이어받아서 이룩한 위업이었다. 그로부터 95년 후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나뉘고 다시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바뀌었다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는 북제(北齊) 조정의 한족(漢族) 사대부가 선비족(鮮卑族) 고관대신들에게 잘 보여 출세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열일곱 살 된 아들에게 선비어와 비파 타는 법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나온다.2) 수나라는 물론 당나라 황가인 이씨 가문은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집안이었다.

위치우위(余秋雨)는 남북조시대에 은일과 소극으로 일관하던 한족이 수·당나라시대에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목민족의 세례를 받아서였다고 본다. 중원의 왕조사에는 이처럼 유목민족의 흔적과 영향이 씨와 날로 엮여 있다.

송대에는 당나라 시대에 비해 호방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약화되고 보수적·방어적 색채가 짙어졌다.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에 97년간 지배를 받은 후 주원장(朱元璋)이 명을 건국했지만 명나라에 들어서 국수적이고 폐쇄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 이후 중원을 점령한 몽골계와 퉁구스계 정복왕조(북위, 요, 금, 원, 청) 역사를 민족국가 중국의 역사라고 설명하고 때로는 그것을 한족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재료로 삼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중국인들을 민족주의 격정에 침잠시키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인들의 보편적 시각이다.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상당수 중국 정치인과 젊은이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 근대사의 트라우마에 갇혀, '난세의 후흑학(厚黑學)'을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라 여기는 것 같다. 돈벌이에는 국경의 개념이 없지만, 사상적으로는 '난세 철학'에 주입당하여 가는 곳마다 경계를 짓고 권모술수를 지혜라 여기고, 스스로 모든 것을 막는 자폐(自閉) 상태를 문화인 양 오인하며 자신들이 사는 곳을 천하라고 믿고 있다 (余秋雨 2010: 352).

그렇게 해야만 한족 문화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북방 민족과 퉁구스계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조그마한 계기만 주어지면 금세 배타적 소영웅주의로 돌아선다. 그리고는 이런 심리를 주위에 전염시켜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나약하고 불안한 열등 심리가 숨어 있음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공산당은 일당독재의 존립과 지속을 위해 이러한 소영웅주의적 애국심에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민들의 일반적 이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북위, 요, 금, 청나라는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퉁구스계(동이계)'였다. 만주는 몽골족의 원(元)나라를 제외한 중국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남과 북을 뒤집어서 만주를 밑에 두고 한반도를 위쪽에 두고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한반도는 만주의 중심부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형상이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 만주 권역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며 밀접한 역사를 함께해 온 퉁구스계 종족들의 민족사학적 터전이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체계 안에서 3대 핵심 권역의 하나를 구성했다(Hong 2012).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들을 사용하는 퉁구스계 역사공동체는 신석기 홍산문화, 고인돌, 비파형-세형 동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의 전통을 공유한다. 이처럼 한반도는 민족사학적 분류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현실로도 만주대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이래 한민족의 문화원류가 발해연안에서 기원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발해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이 내몽골 적봉시(赤峯市)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유적과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조선시대의 한민족(예맥 퉁구스족)은 지금의 만주(滿洲)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고 부여국과 고구려 사람들도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다. 부여국과 고구려는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되었지만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영위되었다.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국도 7세기 말에 설립되어 10세기 초에 망할 때까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걸쳐 나라가 존재하였다.

대성산의 초기 청동기 유적은 기원전 2000년경의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은 기원전 1900년경의 것이다. 즉 한민족은 적어도 3000년 이상을 지금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형구 2012).

거란이 후당(後唐)으로부터 북경을 취한 937년 이후 유목민족이 중원을 지배한 역사는 근 700년에 이른다.3) 지난 1000년간 한족이 요동을 지배한 역사는 청 태조 누르하치와 명나라군이 싸운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4) 명나라가 요하 동쪽을 잃은 1619년 이전의 251년 동안이 전부이다. 청나라의 영토유산을 물려받은 중화인민공화국 기간 68년을 합하더라도 한족이 요동을 지배한 역사는 지난 1000년 동안 319년에 불과하다.

시간 지평을 확대해 보아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족(漢族)이 요하(遼河) 유역에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한 무제(武帝)가 기원 전 108년에 고조선을 정복하고 난 후부터이다. 그러므로 지난 3,000년의 기간 중 한족이 요동을 직접 통치했던 기간은 한나라 지속기간을 모두 합쳐서 길게 잡아도 831년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정복한 이후의 한대 328년의 기간(기원전108-기원후220), 조조(曹操) 후예들의 왕조인 삼국시대 위(魏)나라(220-265)의 45년간, 서진(西晉, 265-316) 51년간, 당(唐, 618-907)이 고구려를 정복한 668년부터 안록산의 난(755-57)이 일어날 때까지의 89년간, 명(1368-1644)나라 치세 중 1619년까지의 251년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지금까지의 68년(1949-2017) 간이 한족이 요동을 직접통치를 했던 기간들의 상한이다.5)

더군다나 전국시대의 연나라, 통일왕조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과 달랐을 것이라는 증거도 존재한다. 전국시대 말기의 자객 형가(荊軻)는 진왕 정(政)을 암살하기 위해 독이 묻은 비수를 감추고 독항(督亢, 전국시대 연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의 지도를 갖다 바치며 진왕의 경계심을 풀었다.

그로부터 약1400여년 뒤 남송의 황상(黃裳)은 유목민족에 빼앗긴 고토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가왕(嘉王) 조확(趙擴, 후에 남송 4대 임금 寧宗)에게 지리도(地理圖)를 바친다. 그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의 난하(灤河)를 당시에는 요수(遼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요하(遼河)는 당시 소요수(小遼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Hong 2012: 118-119).

<지리도(地理圖)의 요수(遼水)와 소요수(小遼水)> 자료: 曹宛如 外(1990: 72). Hong(2012: 118)에서 재인용.<지리도(地理圖)의 요수(遼水)와 소요수(小遼水)> 자료: 曹宛如 外(1990: 72). Hong(2012: 118)에서 재인용.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진시황이 기원전 215년 갈석(碣石)에 가서 비문을 새긴 바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진나라 2세 호해 황제 원년(기원전 209년)에 갈석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회계까지 순행했고, 요동에 진시황의 공덕을 더 새기게 하고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6)

갈석산은 오늘날 난하(灤河) 하류 동쪽 지역에 있다. 갈석을 요동(遼東)으로 언급하고 있는 진시황 본기의 구절을 보면 당시 오늘날의 난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요수(遼水)가 난하(灤河)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무제본기에서 사마천은 기원전 110년 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행한 후 바닷가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갈석(碣石)에 이르렀고 요서(遼西)로부터 순행을 해서 북쪽변경을 거쳐 구원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어 갈석을 다시 요서라고 부르고 있다.7)

진나라, 한나라 당시는 오늘날의 요동이 한족 왕조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탓에 요수(오늘날의 난하) 동쪽이나 소요수(오늘날의 요하) 동쪽 모두를 요동으로 인식하고 요수와 소요수 사이에 대해서는 요동 혹은 요서를 섞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한시대는 물론 800여년 전 남송의 영종 연간까지도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경계인 요수가 난하와 요하 어느 하나로 일정하지 않았음도 불구하고 그 중 하나만이 시대를 관통하여 요동과 요서의 경계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요수 혹은 요동의 위치에 관한 논쟁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지속되고 있다.

요수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는 일과는 독립적으로 한 가지는 명확해 보인다. 오늘날의 요하 동쪽은 물론 갈석 동쪽 영역은 당시의 한족들에게는 통제권 밖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심 밖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사기, 한서 등에서 갈석을 언급하는 기록들은 갈석이 동쪽 경계임을 시사하는 맥락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요동을 넘어 만주 전체로 시야를 확장해서 보면 간헐적으로라도 한족 왕조가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만주의 지리적 영역은 단지 그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족들이 정착했던 지역은 대부분 요하 유역의 충적지대와 요동반도의 고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만주 서남부의 삼각형 모양의 지역에 국한되었다.

한족이 나머지 만주를 점령했던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근세 이전 만주와 한반도는 동일한 삶의 공간이었다. 광대한 세월 동안 그 곳은 한민족(예맥-퉁구스족)과 만주족 등 퉁구스계 종족(동이족)의 땅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요동, 산동과 만주가 모두 삼한의 일부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니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한국의 일부였던 기간이 만주와 주변부가 중국의 일부였던 역사적 시기보다 길다. 대부분의 역사적 시기에서, 요동 땅은 선비, 거란, 예맥, 여진 등 퉁구스계 종족들의 각축장이었다.

삼국사기 최치원(崔致遠)열전에는 당나라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쓴 최치원의 편지가 인용되어 있다. 거기에는 "고구려,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병이 100만 명이나 되어 남쪽으로 오(吳), 越(월)과 북쪽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였다"는 대목이 있다.8)

남쪽으로 오·월을, 북쪽으로 유·연·제·노를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요서와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는 위치이다. 백제가 요서를 경영했다는 사실은 최치원의 시대에 널리 공유되던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백제의 수도 중 하나가 요서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땅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요서의 일부를 포함하는 백제의 강역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欽定滿洲源流考 卷二 38, 卷九 54). 송서(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49), 남제서(南齊書 卷五十八 列傳 第三十九 蠻 東南夷 16,19), 양서(梁書 卷第五十四列傳第四十八 諸夷海南諸國 東夷 西北諸戎 45), 구당서(舊唐書 卷二百一十一 46), 자치통감(資治通鑑 卷第九十七 78, 卷第一百三十六 109)에도 백제가 요서를 경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장수왕(長壽王)이 98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평성(平城)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삼국사기와 위서(魏書)는 전하고 있다.9) 백제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이 몸소 수도 장안의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소복하고 곡을 하며 애도의식을 행했다고 구당서와 신당서는 쓰고 있다.10)

존중하지 않는 나라의 국왕에게 위 효문제나 당 태종이 애도식을 거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중국을 장악한 북위의 효문제도 그렇거니와 국력이 북위보다 더욱 커진 당나라의 태종이 곡을 하며 백제 무왕을 애도하는 일은 무슨 의미였을까.

이러한 제반 역사적 사실들은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일부가 고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 백제와 같은 한민족(예맥-퉁구스족)이 세운 국가의 영토였거나 혹은 북위,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와 같은 오늘날의 한국과 문화권을 공유했던 왕조(퉁구계 종족의 왕조)들의 일부였음을 말해 준다.

오늘날의 중국은 만주족이 경영했던 청나라로부터 영토 유산을 물려받았다.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의 역사관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관은 역사 지식이 일천하거나, 퉁구스계에 속하는 한국인과 만주를 무대로 활동했던 유목민족의 민족사학에 무지하거나, 그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한 결과라고 본다.

폐쇄와 은일(隱逸)로 흐른 동진과 남조의 한족 왕조 문화와는 달리, 북조의 왕조인 북위로부터 통일 왕조인 당나라까지는 호방한 문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송나라 이후 한족 문화는 다시 개방적 시각과 감각을 잃었다.

유목민족 문화에 심리적 울타리를 쳤기 때문인데 그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몽골족과 만주족이었다. 조공책봉의 중화질서에 만족하며 쇄국의 길을 걸었던 명대에는 더욱 폐쇄적으로 되었다가 결국 만주족에 의해 267년간 지배당하는 역사로 이어졌다.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명 왕조가 수립된 지 불과 276년이 지나서였다. 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씨는 스스로의 기원을 신라라고 여기는 부족이었다 ('흠정만주원류고'). 아이신(愛新)은 만주어로 금(金)이란 뜻이다.

청나라 지배자들은 청 이전에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도 신라 왕실의 성씨인 김(金)씨로부터 유래했음을 표명한 왕조명이었고 아이신기오로 황족이 바로 여진족 금나라 황실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었다.

유럽의 열강들이 바다로 진출하면서 대륙과 해양의 지배권을 다투는 국가로 발전할 때 쇄국으로 울타리치고 지냈던 한족 왕조 명나라는 만주족에 점령당했다. 조선은 왕조를 이어갔다.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 중 상당수가 청나라보다는 명나라에 더 우호적이었고 일부는 동질감마저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한국인은 없다.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중원 지배권을 여러 차례 송두리째 유목민족에게 빼앗겼던 한족이 역사를 왜곡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영토사학의 측면에서나 민족사학의 측면에서나 조공책봉관계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나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눈속임하는 우월주의 사관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이 주저함 없이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같은 균형 잡힌 공산당 1세대의 역사관에 비추어보더라도, 중국 역사의 풍부함과 찬란함을 덜어내는 우려스럽기 짝이 없는 역사관이자 위험한 역사관이다.

동아시아 근대를 연구하는 사학자 중 일부는 흔히 근세와 근대를 구분하면서 민족국가 개념에 입각한 제국주의시대의 국가관계에 비해 동아시아의 기존 국가 간 관계는 중화질서 속에서 조공책봉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예치(禮治)의 개념에 입각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공책봉관계를 예치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시의 엄정한 국제질서를 오해하게 만드는 용어이자 국가간 관계를 지나치게 미화한 표현이다. 그러한 표현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와 일본의 먹잇감이 된 식민지 학자가 피탈 이전의 동아시아 역사를 향수어린 관대함으로 바라본, 지극히 낭만적 견해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예치가 체면정치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라면 그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 공자가 말한 예치는 현실적 국제관계였던 조공책봉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 '동아시아의 역사, 시진핑의 역사'는 2편·3편에 계속됩니다.
 
◆각주

1) 2017년 4월 12일 Wall Street Journal과 인터뷰하면서 트럼프가 전한 시진핑과의 정상회담 대화 일부로서 트럼프의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He then went into the history of China and Korea. Not North Korea, Korea. And you know, you’re talking about thousands of years... and many wars. And 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 And after listening for 10 minutes, I realized that it’s not so easy." (Washington Post 2017.4.19.일).

2)[顔氏家訓 卷第上 5] 齊朝有一士大夫 嘗謂吾曰 我有一兒 年已十七 頗曉書䟽 教其鮮卑語及彈琵琶 稍欲通解 以此伏事公卿 無不寵愛 亦要事也... 북제의 한 사대부가 언젠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에게 아들 녀석이 하나 있는데, 나이는 벌써 열일곱입니다. 편지나 글을 꽤 씁니다. 그 아이에게 선비어와 비파 타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점차 익숙해지게 해서 그것으로 고관 대신들을 섬기면 총애를 받을 것이 틀림없으니 이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3)"북방 오랑캐의 압제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운 주원장이 북경을 점령한 1368년부터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기까지 276년간과 중화민국이 성립한 1912년 이후 시기를 제외하면 북경은 유목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다. 북경은 그렇지만 당시 거란이 점령한 연운16주는 중원의 일부여서 이를 두고 중원을 점령했다고 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북송이 망한 1126년 이후 오늘날까지 900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중원이 유목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던 기간은 547년간에 이른다.

4)후금이 무순(撫順)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은 만주족 토벌을 위해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다. 1619년 무순 동쪽 50㎞ 지점에 있는 사르후(薩爾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군대는 명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의 강홍립 장군은 조선이 불가피하게 출병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통고하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그 후 후금은 심양(瀋陽), 요양(遼陽) 등을 그들의 영역에 포함시켰고 1625년에는 수도를 심양으로 옮겼다.

5)Hong(2012: 413-414)은 기원전 1000-기원후 2000년의 3000년 동안 840년을 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필자가 다시 계산해 본 바에 의하면 지난 2017년까지의 17년을 더하더라도 831년을 넘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명나라 말기의 일부 기간 때문이다. Hong(2012)이 1368년부터 명이 멸망한 1644년까지 줄곧 명나라가 요동을 직접 통치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1619년의 사르후(薩爾滸) 전투 이후 명나라는 요동에 대한 통치권을 후금에게 잃었다. 한족이 요동을 직접 통치한 기간을 831년이라고 확정하지 않고 그것이 상한이라고 말한 이유는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이후 한나라로부터 서진시대까지 요동이 줄곧 한족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는지를 확언하기 위해서는 한사군의 위치와 활동영역, 고구려 건국 이전에 존재했던 부여의 위치와 활동 영역 등에 관해 좀 더 상고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6)[史記 秦始皇本紀 34]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32년[기원전215], 시황이 갈석에 갔다가 연나라 사람 노생에게 선문과 고서[신선들의 이름]를 찾게 했다. 갈석문에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헐고 제방을 터서 통하게 했다. [史記 秦始皇本紀 49-51] ...春,二世東行郡縣,李斯從。到碣石,并海,南至會稽,而盡刻始皇所立刻石,石旁著大臣從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 皇帝曰:「金石刻盡始皇帝所為也。今襲號而金石刻辭不稱始皇帝,其於久遠也如後嗣為之者,不稱成功盛德。」 丞相臣斯、臣去疾、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請具刻詔書刻石,因明白矣。臣昧死請。」 制曰:「可。」遂至遼東而還。...봄에 2세[2세 황제 호해]가 동쪽 군현을 순행함에 이사가 수행했다. 갈석에 도달한 뒤 바다를 따라 남으로 회계에 이르러 시황제가 세워 글자를 새긴 비석 옆면에 수행 대신들의 이름을 적고 선제가 이룬 공과 성대한 덕을 밝혔다. 황제가 말했다. "금석에 새긴 것은 시황제께서 하신 일이다. 지금 호칭을 이어받고 금석에 새긴 글에 시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마치 후세가 한 것처럼 되어 시황제가 이룬 공적과 성대한 덕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승상 이사(李斯), 풍거질(馮去疾), 어사대부 덕(德)이 목숨을 걸고 진언했다. "신들은 조서를 비석에다 모두 새겨 분명하게 하길 청하옵니다. 신들이 목숨을 걸고 청합니다." 황제는 "좋다"라고 말하고서 요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7)[史記 孝武本紀 33] 天子旣已封禪泰山...並海上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8)[三國史記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崔致遠]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9)[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長壽王] 七十九年…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 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 장수왕 79년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나라 효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흰 색 위모관을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알자복야 이안상을 보내와 왕을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魏書 列傳 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於庫莫奚契丹烏洛侯 8] 太和十五年 高句麗 璉死 年百餘歲 高祖擧哀於東郊. 태화15년[491년] 고구려의 연璉[장수왕의 이름]이 별세하였다. 나이가 100여세였다. 고조[북위 효문제 탁발굉의 묘호]가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10)[舊唐書 卷二百一十一 34] 貞觀…十五年 璋卒…太宗素服哭之. 정관15년[서기641년] 장璋[백제 무왕의 이름]이 별세하였다.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애도하였다. [新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五 東夷 25] 貞觀…十五年 璋死…帝爲擧哀玄武門. 장璋이 별세하였다. 임금[당 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 의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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