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자는 누구일까? 전통시대에 자연을 이해하고 조작하기 위해 벌였던 각종 지적 그리고 물질적 활동까지 과학의 범주에 포함한다면, 그러한 활동은 인류의 역사와 쭉 함께 했으므로 누가 최초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과학자가 누구였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서양에서 이미 발달한 근대과학을 한국 사람들이 익힘으로써 한국에서 근대 과학기술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꺼풀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람이 서양의 근대과학을 '익혔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서양 과학의 존재를 알고 그 지식을 단편적으로 품평하기 시작한 것인가? 서양 과학을 '자격을 갖춘' 스승에게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인가? 대학 학부 수준의 전공을 이수하고 졸업장을 받은 것인가? 더 좁혀 보면, 서구의 과학자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고도로 전문적인 성과를 내놓은 것인가?

첫째 범주는 조선 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유럽의 과학 서적을 중국을 통해 손에 넣고, 그 내용을 동아시아에서 자연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지식 체계와 비교하고 때로는 서양의 것이 더 낫다며 받아들이기도 했던 이익, 정약용, 홍대용, 최한기와 같은 이들이 한국에서는 최초로 서양의 과학 지식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근대적 의미의 '과학자'라고 부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다. 과학은 낱낱의 지식 조각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지식과 실천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근대과학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드문드문 접하는 것만으로 과학자가 될 수는 없다.

두 번째 범주로 성과를 낸 사람도 뚜렷하게 찾기 어렵다. 정식으로 서양 과학을 배운 이들은 1876년 개항 이후 비로소 나타난다. 다만 일본과 중국이 한 것처럼 국내에 서양식 학교를 세우고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여 서양 과학을 가르치겠다는 계획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탓에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정부에서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을 1886년 설립하고 서양인 교사를 초빙해 수학, 의학, 농학 등을 가르쳤으나,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1894년 폐교되고 말았다.

세 번째 범주, 즉 근대과학을 배우고 학업을 마치게까지 된 것은 결국 해외 유학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유학이라는 제도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해외에서 과학을 배우려던 이들은 개인의 우연한 행운이나 불운을 계기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 지식인 변수(1861-1891)는 1882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양잠학과 화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망명객 신세가 되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였다. 결국 변수는 1891년 9월 메릴랜드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해 최초로 이공계 대학 학위를 받은 한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망명객의 처지에 고국을 위해 그의 학문을 쓸 기회는 없었다. 변수는 재학 중 미국 농무성에 취직하였으나 1891년 12월 열차 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으로 망명객의 신세가 된 것은 한국인 최초의 근대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서재필(1864-1951)도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역시 역적의 신세가 되었고, 가족들을 모두 잃은 채 혈혈단신 일본을 거쳐 미국까지 망명하게 되었다. 그는 1893년 컬럼비아의과대학(오늘날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받았다.

그러나 서재필도 그의 의학 지식을 고국을 위해 활용할 기회는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생업을 위해 의사로 활동했을 뿐이며, 미국 시민으로서 1895년 이후 고국을 드나들게 된 뒤에는 정치가로서 활동했다. 이밖에 상호(1879-?)가 일본에 유학해 1906년 도쿄제국대학 조선과를 졸업했으나, 그 역시 졸업 후 통감 치하의 대한제국 정부에 취직해서 관료의 길을 걸었고 한국의 공학 발전에 기여한 바는 알려지지 않았다.

네 번째 범주, 즉 '서구의 과학자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고도로 전문적인 성과를 내놓은' 사람이라면 서구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들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는 천문학자 이원철(1896-1963)이다.

그는 미국 미시건주립대학에 유학해 1926년 독수리자리의 변광성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5년 뒤인 1931년에는 이태규(1902-1992)가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론 당시 한반도의 여건은 너무나 열악했기에 이들도 자신의 경륜을 고국에서 펼칠 수는 없었지만, 드디어 한국인 중에서도 학계의 공인을 받은 과학기술 전문가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과학기술의 도입과 정착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렇게 박사학위 취득으로까지 요건을 좁혀 버리는 것은 너무 까다로운 것 아닌가 반론도 나올 법하다. 사실 너무 까다롭다. 당시 한반도에는 어차피 박사급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초중등 수준의 과학교육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이렇게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 본 것은, 우리가 과거의 과학을 기억하는 잣대가 얼마나 당대의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우리는 흔히 최초의 과학자들을 거명하면서 "결국 제대로 된 과학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한 마디를 너무 쉽게 덧붙이곤 한다.

한국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문 것도 어쩌면 이들에게 '과학을 하다 만 사람'이라든가 '본격적인 과학 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꼬리표들이 붙어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전문 연구자'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과거 과학기술의 선구자들을 평가할 때에는 조금 유연한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학업을 마쳤건 마치지 못했건, 이후 과학기술을 생업으로 삼았건 아니건, 이들 선구자의 발자취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품었던 꿈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 봄으로써 장차 한국의 과학기술이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호 교수는

김태호 교수.
김태호 교수.
연표가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과학기술사는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지식을 쌓아올리는 과학기술자는 시대와 지역이라는 좌표계 안에서 실존하는 인간들입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김태호 교수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긴장 관계에 주목하고, 과거의 과학기술을 돌아봄으로써 현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그 성과와 한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균형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김태호 교수는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과학학(STS)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주로 연구합니다. 1970년대 농촌의 변화를 선도한 '통일벼'의 역사, 한글 타자기의 역사, 한국 기능인력의 양성과 '기능올림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써 왔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한양대학교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에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발간을 비롯한 다양한 학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