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켄 100주년 영상 공개···지난 역사·향후 역할 담아

올해 100주년을 맞은 리켄이 영상을 제작해 공개했다.<사진=리켄 홈페이지>
올해 100주년을 맞은 리켄이 영상을 제작해 공개했다.<사진=리켄 홈페이지>
일본이화학연구소(리켄)가 올해 100주년을 맞아 영상을 게재했다. 지난 16일 게재된 7분짜리 영상에는 리켄의 백년 역사를 되돌아보고, 차기 백년에 이화학 연구소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전망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영상은 해당 링크를 통해 확인가능하며, 영상 속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약 50년. 일본인이 '유럽과 미국에 맞서는 풍족하고 강한 나라가 되지 않으면...'이라는 꿈을 꾸던 시대. 1917년 이화학연구소(리켄)가 탄생했다.

계기는 다카미네 조키치(高峯讓吉) 박사가 주창한 '국민과학연구소의 필요성'이었다. 여기에 일본경제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鐸榮一)가 참여해 각 방면에 필요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동경 분쿄구에 재단법인이 설립되면서 이화학연구소의 역사가 시작됐다. 

리켄은 과학자의 자유로운 낙원이 되어 많은 과학자들과 공적을 남기게 했다. 그 초석이 된 것이 1922년부터 시작된 오오코치 마사토시의 개혁이다. 42세에 제3대 리켄소장이 된 그는 물리학부, 화학부를 폐지하고 넓은 분야를 연구할 수 있도록 14개의 연구실을 발족, 각 주임연구원에게 재량권을 주는 주임연구원 제도를 시작했다. 이 제도를 통해 자유로운 연구 환경을 얻게 된 연구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얻기 시작했다.
 
또 오오코치는 연구성과가 산업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 이화학연구소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연구실 성과를 상용화할 기업들을 창립, 리켄기업연대를 결성했다. 연구기관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기업이 탄생해 연대를 결성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예다.
 
일본의 과학기술과 산업에 크게 공헌하고 세계를 리더하는 연구소로서 리켄의 진출은 계속됐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리켄은 정보차단과 물자부족 등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전쟁 중 연구소의 3분의 2를 잃게 됐으며, 1945년 GHQ(1952년까지 일본에 있었던 연합군 사령부)의 통치하에 이온가속기를 바다에 투기해야했다. 1947년 리켄사업단의 해체 등으로 리켄은 1948년 주식회사 리켄연구소로 설립돼 재출발하게됐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페니실린, 스트립트 마이신을 생산하고 판매할 수 밖에 없었던 리켄. 그러나 연구자들은 연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의 산업부활 등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리켄은 1958년 특수법인이화학연구소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혁신을 위해 1967년 사이타마현의 와코시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첫 국제프론티어연구시스템을 개설해 새로운 분야의 개혁을 목표로 했다. 또 세계최첨단 연구시설과 전략적 연구타겟을 목표로 연구센터를 전국에 설치했다.
 
넓은 연구분야의 교류는 성과로 이어졌고 그 성과는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 리켄은 각각의 연구자들이 미지의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의 낙원이자 세계연구자들에게 활짝 열린 곳으로 젊은 연구자, 외국인 연구자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차세대 연구를 실현하고 있다.
 
세계최첨단 분야에서 다양한 이노베이션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우주의 수수께끼, 생명의 신비, 지금도 이 세상은 궁금증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 의료, 산업 등 우리들의 생활에 관련된 것까지 과학기술이 해야할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2017년 100주년을 맞은 리켄. 인류에게 공헌하기위해 미래를 향해 미지를 향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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