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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통사 지식공유]문명의 발생 그리고 로마제국

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이상훈)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자발적 학습 커뮤니티인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가 열립니다. ETRI 연구자들이 일반 국민과 선후배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들을 탐색하고 고민해 주제발표하는 자리입니다. 새통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전달드리고자 참가자들이 직접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며, 이를 대비하는 연구원들의 자세와 각오는 어떠한지 글로 만나보세요. [편집자주]

이번 109차 모임은 '문화예술과의 만남' 네 번째 시간으로 한기철 전 ETRI 이동통신소장과 함께 '미술'이라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서양의 역사, 철학, 사회 읽기 등에 관해 공부하는 멋진 시간으로 이뤄졌다. 

한 소장은 서양문명사를  '문명의 씨앗' '문명의 뿌리' '문명의 줄기' '문명의 꽃' '문명의 열매' '문명의 밥상' 크게 6막으로 분류해 조망해보는 큰 틀을 보여줬고, 이번에는 제1막과 제2막에 해당하는 '문명의 발생'에서 '로마제국'까지 2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단숨에 근 4000년의 시간여행을 인도해 주었다. 신을 꿈꾸는 인간('호모 데우스')의 야망이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문화와 문명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아, 멋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술 작품이나 문명을 접하며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아, 멋지다!', '이, 신기하다!', '아, 기묘하다!', '아! ······' 대부분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침묵한다. 안타까워 한다. 그 안타까움을 달려 기념사진 하나 남긴다. 아쉬움이 더 크면, 슬쩍 작품을 한번 만져본다. 그래도 이것이 모두다.

문명은 사람이 살면서 남겨놓은 흔적이다. 사람들의 삶의 몸부림의 표현이다. 문화의 구체화이다. 예술은 문화의 나눔이다. 혼자만의 만족이 아니라 다른 이와의 교감을 위한 언어다. 문학이 그러하고, 철학이 그러하고, 예술이 그러한 것이다. 역사도 그러하다. 인류가 남겨놓은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주인이 따로 있다. 한 소장은 물리학법칙으로 문명의 발상에 주인공이 있음을 강조한다. 인류가 신이 선물한 자연과 그 자연에 마냥 순응하며 살았다면, 문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엄연한 자연의 힘 앞에 꿋꿋하게 문명은 버텨내고 있다. 버텨내는 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밟지 않는 눈덮힌 들판을 걷는 첫 발자국 같은 힘이다. 성단근 교수가 ETRI의 혁신을 요청하며 설명해준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가 떠오른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는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라.

훗날 남겨지는 것은 첫 발자국이요 처음의 몸부림만이 남는다. 이후의 것들은 첫 번째의 것의 엔트로피 증가를 억제하고 그것의 에너지를 보존하는 힘을 보탠다. 그것이 문화요 문명이다. 하여, 그런 문화와 문명 속에는 시작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인류의 서사시들의 모음집이다.

현대에 이르러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기가 쉽지 않다. 그 시대의 언어가 있고 그 시대만의 표현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남겨진 흔적들의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읽어내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한다.

그런 역사적 관계 속에 인간들의 사유세계를 훔쳐보고자 철학적 사유의 틀들을 공부한다. 건축의 양식을 공부하고 음악의 틀을 공부하고 미술의 사조를 공부한다. 인간이 그려놓은 다양한 무늬들의 특징을 짚어내어 설명하는 예술을 흠미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이유이자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의 뜻을 알고 있음이다.

한 소장은 의미심장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생명이 무생명에서 나왔는가?'
'어떻게 예술이 무에서 창조되었는가?'
'어떻게 질서가 혼돈으로부터 나왔는가?'
'어떻게 조화가 부조화로부터 나왔는가?'
'어떻게 이성이 비이성으로부터 나왔는가?'
'어떻게 개성이 무념으로부터 나왔는가?'
'어떻게 도덕이 부덕으로부터 나왔는가?’
 
결코, 생명과 혁신은 가만히 있는데 탄생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무에서 유가 탄생할 때의 그 어떤 힘이 존재했듯이 혁신도 그 어떤 힘에 의해서 시작된다. 눈덮힌 들판에 첫 발을 내딛고자 하는 힘이 바로 그것이리라.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뭔가를 나름대로 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그 힘이리라. 네트워킹 시간에도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인간과 기계에 대한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린 지금까지 지능을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을 짐승과 구분짓는 중요한 잣대로 여겨왔지만, AlphaGo의 활약으로 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 아님을 깨닫고 지능으로부터 의지를 분리해냈다. 의지와 지능이 분리되는 순간 짐승과 기계의 차이는 유기체의 여부로 판가름된다.

이제 인간은 유기체적 기계와 분리될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AlphaGo가 우리에게 주는 압박이다. 인간이란 그 첫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4000년의 시간 여행 속에서 우린 무엇을 배우고 느낄 것인가? 어떤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허락되는 것은 오로지 그 옛날 4000년 동안 인간들이 그려놓은 무늬의 패턴을 읽어내는데서 시작한다. 쉽지 않다. 특히나 서양 사람들의 무늬를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역사공부가 필요하고 신화공부가 필요하다.

◆ 고대 서양미술 감상하기

한 소장은 전통적인 서양문명사 관점에서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에게 문명, 폴리스 시대, 헬레니즘 문명, 헤브라이 문명, 로마문명로 이어지며 역사의 부침과 그 속에서의 미술에 대해서 소개해준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몇가지 특징적인 것이 보인다. 머리는 옆모습으로 그렸으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가 정면을 향한 반면 상반신은 절반 정도 옆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또다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모습, 즉 인간 형상의 부분들을 가장 잘 표현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가 싶다.

가장 중요한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고 있으며 인물의 크기를 달리해 상대적인 신분의 차이를 표시하는 등, 그림을 그리는데 공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집트 회화에서 아주 특이한 시대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메노테프 4세가 왕으로 있는 시대다. 그는 태양신 ‘아톤’만을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신으로 숭배했다. 고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특이는 공식들이 배제되고 곡선적인 인체형태를 가진다.

투탕가멘에게 왕비 안케세나멘이 향유를 발라주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 이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왕과 왕비의 크기가 비슷하게 그려져 있고 자연스러운 모습, 의상도 유연한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고 태양신의 축복을 내리듯이 많은 손을 뻗치고 있는 모습들이 공식화된 그림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메소포타미아는 '사이의 땅'이란 뜻을 가지고 있듯이 서남 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크라테스의 두 강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페르시아만에 걸친 지역으로 수메르인에서부터 아카드인, 우르인, 바빌론,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많은 역사 문화적 변화를 겪은 것이 특징이지 싶다. 흙벽돌과 부조를 작품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에게문명은 에게해 부근에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한 해양 문명이다. 바다가 주는 특유의 낙천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으로 사람들을 심플하게 특징만을 살려 자유롭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된 황소를 타는 사람의 동작을 보면 너무나 생동감이 넘친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자랑하는 그림에서 자연스러움이 가득 묻어난다. 

크레타 섬의 필라이카스트로에서 발견된 '문어 문양 항아리(크레타 헤라클리온 미술관)'는 모양과 장식이 모두 변화 무쌍한 완숙한 기술과 소용돌이치는 역동적 장식 무늬 등으로 사실미를 주로 하지만, 미케네 시대의 말기가 되면 이러한 사실미는 후퇴하고 배치와 구도에 중점을 둔 추상화 또는 도안화의 경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화는 단순한 종교를 떠나 삶의 일부와 같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위해 신전을 짓고 신상을 만들고, 신화의 장면을 새기고 또 건물의 외부를 장식 하는 등의 정말 특별하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미술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들은 대리석보다는 청동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동상들은 무기의 재료로 사용되어 남아있질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자연스런 포즈가 특징이다. 그리스의 건축물을 감상할 때에는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에 대한 상식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도리아식 기둥은 BC 7~5세기로 가장 오래되었고 형태가 단순한 특징이 있습니다. 대좌가 없고 기둥에 세로홈이 패어있으며 단순하게 넓힌 꼭대기에 대접받침으로 알려진 장방형의 슬래브를 얹어놓은 특징을 갖고 있다. 도리아식 건축물으로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이오니아식 기둥은 BC 6세기에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된 건축양식으로 기둥 밑에는 단순한 형태의 대좌가 있고, 꼭대기에는 소용돌이 장식모양을 갖는 특징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 신전이 이오니아식 건축물의 전형이다. 코린트식 기둥은 BC 4세기 이후에 등장한 건축양식으로 정작 고대보다 현대에 더 많이 활용되고 있는 건축양식이다. 가장 화려한 이 양식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잎사귀에 주목을 하면 된다고 한다. 코린트식 기둥은 여러 겹의 대좌와 양 측면이 오목한 형태를 띠는 대접받침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코린트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미국의 국회의사당이라고 한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말로서, 알렉산더 대제의 사망시부터 클레오파트라의 사망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가장 현저한 발전을 이룬 분야로 기하학과 수학을 들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클리드(기원전 300년경, 유클리드(Euclid))는 평면과 입체 분석에 있어 기념비적인 업적들을 남겼고, 시라쿠스의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년), 지동설을 이야기한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쿠스가 주인공들이다.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건출물로 고대 오리엔트의 페르가몬(현재 터기 영토)에 세워진 페르가몬 신전(기원전 180~160)을 들 수 있는데, 이 신전을 독일로 통째로 옮겨서 페르가몬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한다. 훔쳐온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 상, 밀로의 비너스 상도 빼 놓을 수 없는 멋진 작품들이다.

로마의 문명은 로마가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민족들과 지역들로 이루어진 제국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단일한 양식이 지배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는 도라이식, 이오니아식, 코린트 식이 모두 함께 공존한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폼페이의 유적이 발굴이지 싶다. 폼페이의 유적은 이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식으로, 또한 로마의 건축이나 초상조각과도 극히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란다. 

특히 치밀하게 사실적인 표현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딱딱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조각상과 달리 회화 양식은 몽환적이며 화사하게 꾸며져 있다. 학자들은 이를 로마인들의 남들이 보는 세계와 개인의 내밀한 세계가 분리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이중적 삶의 모순 속을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파고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부터의 단상

두 문화를 설명하는 것은 신 중심의 문명과 인간 중심의 문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다시 한번, AlphaGo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은 인간의 특별한 위치는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 신의 뜻이 '의지' 였다. 그 의지 속에 생명체의 탄생과 그 생명체의 진화를 허락하는 뜻이 있었고, 인간은 발전을 게을리 하지 않은 수양 속에서 '자유 의지'를 만들어 냈다.

4차 산업혁명이 운운되는 지금의 시점은 그 '자유 의지'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꿈꾸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그 '자유 의지'로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꿈꾸는 호모 데우스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새정부의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누리는,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구현'을 목표로 설정했다. '사람 중심'의 '사람'은 '자유 의지'가 없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고 희망하는 것이 있고 의지가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참여하여 함께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자유 의지' 속에는 인류가 걸어오면서 축적한 지혜가 존재한다. 바로 '인의예지신'의 덕이요, 프랑스의 '봉구-똘레랑스-쏠리다르떼'의 시민혁명 정신이다. 그런 지혜의 축적이 없는 자유 의지는 방종이다.

이제 우리는 고민의 판을 바꾸어야 할 때다. 모든 국가사회시스템의 틀을 바꾸어야 할 때다. 호모데우스가 사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노동을 할 필요도 없고, 죽지도 않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호모데우스들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 것인가? 과거의 패러다임의 연장선 상의 사유로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문학은 어떻게 변할까, 역사는 어떻게 변할까, 예술은 어떻게 변할까, 철학은 어떻게 변할까, ...그 중심의 인간이 변한다면 당연히 인문을 다루는 학문의 대상과 방법론이 변해야 한다. 무한의 영역인 인간의 의지의 자유도를 생각해보라. 지금의 언어로 그 자유의 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의 춤사위로 신인간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음악으로 새로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자유 의지의 자유로움 못지 않게 우리의 사유세계 또한 자유롭고 무한의 움직임을 허해야 한다. 그 끝점에 멍한 상태, 더 이상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까지 가봐야만 한다.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침묵의 상태까지 가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침묵의 상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쉬움이 알렉산더 대왕의 세상여행이 아니겠는가 싶다.

새로운 화두들이 넘실거린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복은 시대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을까? 서양미술 속에 담긴 그들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조상들은 어떠했을까? 또 우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자유 의지자'들은 어떤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될까? 그런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새통사를 마치고 머리 속을 떠도는 화두들이 엔돌핀을 쏟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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