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차 향에 빠지고, 막걸리 향에 취하고··· "고즈넉한 전주의 매력"
글 ·그림 ·사진 : 강선희 anger15@nate.com

"전주에 와 본 적 있어?"
"음… 몇 년 전에?"
"많이 바뀌어서 놀랄거야. 후후후"
 
11월 둘째 주 토요일, 나는 저녁 늦게 전주에 도착했다. 야시장 구경을 하고 있으라길래 무슨 축제가 열렸나 생각했는데 금요일, 토요일에만 열리는 남부시장 내 먹거리 장터였다.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다양한 먹거리와 저렴한 가격이 인상적이었고, 남녀노소 어른아이 구분 없이 손에 무얼 들고 먹고 있는 모습에 나도 금새 허기가 졌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먹거리 구경에 한참 빠진 나를 건져낸 건 친구였다. 스페인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  
 
전주에 이런 곳이 생겨 놀랐다고 했더니 연이어 데려간 곳이 청년몰이었다. 시장 안에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싶을 정도로 한 공간에 밥집, 찻집, 공방, 문방구와 잡화점 등 각각의 개성을 가진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친구는 지난 여름 '알쓸신잡'에 청년몰이 소개된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져 활성화가 된 게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런 게 이 곳을 디자인하고 기획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니, 이게 바로 엄마의 마음일까.
 

요즘 젊은 사람들의 마인드가 잘 반영된 슬로건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
요즘 젊은 사람들의 마인드가 잘 반영된 슬로건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

꿀렁꿀렁 넘어가는 막걸리에, 여행앓음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스페인 코르도바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였다. 숙소 주인이 국적을 보고는  한 방에 배정을 해줬는데 묵어가는 일정까지 똑같았다. 그래서 같은 날 들어온 그 친구와 나, 일본인 한 명까지 셋이서 시간의 호사를 누리며 종일 함께 떠들고 놀았었다.
 
막걸리집에서 주전자가 비워지는 동안, 우리의 공기는 스페인에서 보낸 여름날의 추억, 연애사, 한국에서 ‘현재’를 사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이 친구나 나나 마음 속에는 목적지가 없는 기차표 한 장이 있다. 매일같이 떠날 순 없어도 정말 떠나야 된다고 생각될 때 꺼내들 비장의 카드같은 것이다.
 
주전자 한 통에 막걸리가 세 병이나 들어간다던데, 막걸리 한 모금에 새콤한 도토리묵무침 한 입, 또 한 모금에 꼬들꼬들한 돼지껍데기 한 입... 못 비울 것 같던 머리통만한 주전자가 점점 가벼워진다 싶더니, 여자 둘이서 결국 다 비워냈다.
참 오랜만에 마시는 막걸리가 하도 꿀맛이라 한 주전자 더 비워내고 싶었지만 밤이 늦어 일어나야 했다.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한상차림이 2만 5천원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한상차림이 2만 5천원

 고즈넉한 곳을 찾아서, 교동다원 찻집
 
"전주시민은 사실 한옥마을에 잘 안가지. 정신없고 북적대고...예전의 고즈넉함은 사라졌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데려간 한옥마을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찻집. 그 곳은 우리가 찾던 그 고즈넉함이 있었다.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는지 마당까지 들어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곳을 찾아올 수 있었을까?
 
서당 훈장님 느낌이 물씬 나는 주인아저씨께서 직접 손님을 맞으신다. 친구의 추천대로 이 집에서 제일 맛있다는 황차로 주문하니 다도세트를 내오신다. 뜨거운 물을 부어 바로 내려야 황차의 맛을 깔끔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첫 잔은 대체로 떫은 편이니 버리라는 친구의 말에 호기심이 동해 한 모금 마셔보고 두번째 잔을 내려 마셔보았다. 과연 맛이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가져온 책을 읽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요일 오후다. 전주에 오거든, 혼자여도 좋으니 꼭 이곳에 들러 황차 한 잔 하며 쉬어가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런 '쉼'이 필요하지 않은가?
 

외부와 적절히 차단되어 전주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찻집, 교동다원
외부와 적절히 차단되어 전주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찻집, 교동다원
 

교동다원의 내부와 황차 다도세트
교동다원의 내부와 황차 다도세트

전주 향교에서 빨간 단풍잎을 들고
전주 향교에서 빨간 단풍잎을 들고
 

11월, 전주 경기전 앞. 늦가을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물들었다
11월, 전주 경기전 앞. 늦가을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물들었다

 달님방 추억, 모련다원
 
사실 전주에는 한옥 숙박집이 무수히 많다. 별 걱정 없이 무작정 내려가도 하룻밤 정도는 잘 자고 올라올 수 있는데 내가 전주에 가면 자고 오는 집은 여기, 모련다원이다. 한옥마을 맨 구석, 청원루 가는 길에 있는 이 민박집은 찻집을 겸하고도 있는데 한옥 숙박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든다.
 
몇 년 전, 스페인에서 한 친구가 한국에 놀러왔을 때, 전국 방방곡곡을 다 보여줄 순 없었지만 한옥마을에 가고 싶어 일부러 들렀던 전주였고, 그 때 머물렀던 숙소도 이 곳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내어주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정갈한 한옥집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그의 반짝거리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낮아서 머리를 자꾸 콩콩 부딪히면서도 '뷰티플', '어메이징'을 외쳐댔던 친구였다.
 
전주에 내려가 조용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가을에는 달콤한 감냄새가 풍기는 모련다원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할머니의 두 손에 들려 나오는 뚝배기
 
아침공기가 상쾌하지만 꽤 춥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친구에게 국밥집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남부시장 안에 있는 현대옥이나 운암에 가보란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썰렁한 식당에 홀로 앉아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조그만 부엌에서 할머니가 국밥 그릇에 솥에 있는 국물을 따라 부었다 비었다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내 몽글몽글 김이 나는 따뜻한 국밥이 내 앞에 놓여졌다.
 
 토렴은 국밥을 가장 먹기 좋은 온도로 만드는 기술이라고 한다. 한옥마을 내에 있는 다른 유명한 콩나물국밥 집에서는 팔팔 끓인 국밥을 내오는데, 여기 남부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은 아직 이 방식을 고수하는 것 같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첫술을 뜰 수 있었다. 혼자 조용히 먹고 있었더니 할머니가 오셔서는 김을 부숴 수란과 내 국밥에 넣어주었다.
 
"국물에 적셔부러. 안그럼 부서지니께. 계란에 비벼도 먹고."
 
고소함이 퍼진다. 몰라서 안 먹은 건 아닌데, 아무 말 않고 먹으라는 대로 먹는다. 뜨뜻한 국밥 한 그릇에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다시 떠날 채비가 되었다.
 
 
모련다원(http://www.모련다원.com)
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82
 
운암식당(콩나물국밥)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 2길 63 남부시장
콩나물국밥 6,000원
 
교동다원
전북 전주시 완산구 은행로 65-5
황차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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