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게으른 베짱이와 떠나는 '군산' 시간여행
글 ·그림 ·사진 : 강선희 anger15@nate.com

꿈꾸는 여행가 강선희 작가는 도서 '청춘, 카미노에서 꽃피다'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여행에서 느끼는 자신만의 삶과 길을 기록하는 강선희 작가의 [써니의 느린여행]이 매월 둘째 주 목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정겨운 풍경과 함께, 바쁜 일상 속 힐링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괜찮아, 좀 게으르면 어때.'
 

기다렸다는 듯이 베짱이의 목소리가 개미의 것보다 커졌다. 일주일 중에 딱 하루, 이불 속에서 마음껏 꿈틀댈 수 있는 일요일 아침이다. 왜 꼭 쉬는 날이 되면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걸까? 평소보다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간단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왔다.
 
10분의 운행대기를 보니 방금 막 시내버스를 놓친 듯 했다. 늑장을 부렸으니 예상한 시나리오다. 터미널에서 아침을 먹고 다음 버스를 타야지 했는데 웬 걸, 도로가 뻥뻥 뚫려서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맴이 또 홀랑 바뀌어, 처음 타려고 했던 11시 30분 버스에 가까스로 올랐다. 5분만 더 있었으면 버스에서 먹을 주전부리라도 샀을텐데. 배가 좀 고팠지만 이내 곯아 떨어졌다.
 

눈을 뜨니 군산이었다. 급허기가 져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도넛가게에 들어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도넛 몇 개를 집어 들고 커피와 함께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가 없어졌다! 

날이 좋길래 기동성이 좋은 항공점퍼를 입고 나왔는데, 왼팔에 있는 주머니에 넣어둔 신용카드와 현금을 인출할 체크카드 2장 모두가 집을 나간거다.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림=강선희>
<그림=강선희>
부랴부랴 방금 타고 온 버스를 찾으러 갔다. 승차권 반 쪽을 받아두지 않아 한참을 물어 물어 겨우 찾았는데, 내가 앉았던 자리엔 네모난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에서 뛰다가 흘린 게 분명했다. 망했다…! 카드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꿀잠이나 자다니!
 

그러다 문득 간밤에 ‘빠듯한 여행은 하지 말자’며 혹시나 해서 챙겼던 저축통장용 체크카드가 생각났다. 비밀번호도 잊어버렸고 안 쓴 지 몇 년이 됐는데, 얼마 전에 돈을 넣어 두었으니 사용이 되지 않을 까 싶어 다시 도넛가게로 갔다.
 

"영수증 드릴까요?"

와! 내 손에 도넛 세 개와 커피가 들려졌다. 무너진 하늘 속에 솟아날 구멍이 정말 있긴 있구나. 잠깐 잊었던 허기가 다시 폭발했다. 오후 2시였다.

    

이제부터 택시로만 이동을 해야겠다. 먼저 경암동으로 향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기차가 운행되었다는 이 철길마을은 군산의 핫한 관광지다. 세 살 꼬맹이부터 학생들, 아저씨까지 옛날 교복을 입고 납작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철길 위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추운 건 나 뿐인가…

세 살 꼬맹이부터 아저씨까지 옛날 교복을 입고 납작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철길 위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사진=강선희>
세 살 꼬맹이부터 아저씨까지 옛날 교복을 입고 납작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철길 위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사진=강선희>
철길을 따라 걷다가, 불량식품을 파는 가게 한 켠에 있는 짱겜보 게임기를 발견했다. 백원짜리가 생기면 쪼르르 달려가 했던, 잃으면 쓰리고 따면 브라보였던 추억이었다. 오백원짜리 동전이 하나 있던 게 기억나서 두 배로 불려 볼까 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천원이 생기면 길거리 따끈한 붕어빵을 사먹을 수 있다!

어릴 때는 다른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그저 구경만 해도 재미었던 것 같다. 그 땐 그 백원으로 게임을 '한 번' 해보는 게 낙이었던 건데, 오백원을 팔백원까지 불렸다가 결국 다 잃고 가게를 나오려니 꼴랑 오백원 본전 생각에 씁쓸했다. 그러다 달랑 오백원으로는 딱히 뭘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드니 돌연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오백원에 세상을 다 얻던 때가 있었거늘.
 

<그림=강선희>
<그림=강선희>

다시 택시를 타고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택시기사가 어디서 왔냐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군산에 뭐 볼 거 있다고 왔느냐 그러더니, 미터기를 누르는 것도 깜박하고 어디에 뭐가 맛있고, 어딜 어떻게 둘러 보는 게 제일 효율적인 관광코스인지 족집게처럼 알려준다.

어떤 사람들은 군산까지 와서 단팥빵 사먹는다고 온 종일을 빵집에서 보내다 가기도 한다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툴툴대기도 했다. 그래도 교과서에 없는 것들이 여기 있으니 온 김에 잘 둘러보다 가라는 그의 말투에, 군산에 대한 자부심이 꽤 묻어 있어 '토박이신가 봐요?' 하고 물었더니 허, 떠돌이란다! 왠지 어디선가 또 마주칠 것 같다.

택시기사의 안내대로, 역사박물관-군산옛세관-초원박물관-히로쓰가옥-고우당-동국사의 순서로 도보관광이 가능했다. '시간여행'이라는 슬로건이 잘 어울릴 만큼 일제시대의 잔재를 잘 보존해 놓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왜 여지껏 군산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을꼬!

히로쓰가옥.<사진=강선희>
히로쓰가옥.<사진=강선희>

동국사.<사진=강선희>
동국사.<사진=강선희>
참 오랜만에 도장깨기식 여행을 하고 나니 순식간에 방전이 된 것 같았다. 혹한기 걷기훈련도 아니고 도넛 세 개와 커피 한 잔에 세 시간을 꼬박 걸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여행에 체력은 필수!
 

체크인도 할 겸, 카페를 겸하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따뜻한 난로 옆에 앉아 진한 녹차라떼를 음미하고 있는데 누군가 탕수육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난로 옆에서 공예품을 만들고 계시던 사장님이 냄새 피울까 걱정 하시길래, 유일한 손님이었던 나는 괜찮으니 게의치 말고 맛있게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오히려 자리에 초대를 해 주시는 게 아닌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장님. 그러다 보니 작년 여름, 소설여행이 탄생했다고 한다. 우연히 군산에 왔다가 이 오래된 일본식 가옥을 발견하고 '아,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게스트하우스의 작명과 탄생비화도 듣고 동네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워 듣는 게 꽤 재미있었다. 시각으로만 하던 여행이 오감만족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소설여행 게스트하우스.<사진=강선희>
소설여행 게스트하우스.<사진=강선희>
고소하게 튀겨진 탕수육에 맥주 한 잔. 마치 알고 있던 사람들 같은 편안함. 잠깐 여행객이라는 걸 잊을 뻔 했다.
 

오후 7시, 아까의 택시기사와 사장님의 추천을 받은 소고기 무우국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내일은 바로 출근길이라 아침 일찍 나갈 것 같아 미리 작별인사를 했다.
 

"또 와요, 꼭!"
 

인연이 하나 늘었다. 어쩐지 마침표를 잘 찍은 것 같다.
 

<그림=강선희>
<그림=강선희>
소설여행 : 전북 군산시 월명로 516-1

                   도미토리 1인 25,000원 / 2인실 60,000원
                   게스트에게는 카페메뉴 천원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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