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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일본의 '과학문화'와 '과학정책'에서 배운다

글 : 이한진 한국연구재단 수석연구위원 정책학 박사
일본은 에도시대(1603-1868)부터 '장인존중'의 정신과 한 분야에 대해 좁고 깊게 지식을 탐구하는 '한 우물파기' 정신, 그리고 성공이든 실패에 관한 것이든 모든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축적의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 일부 관점에서는 에도시대 260여년이 조선에서 붙잡아 간 도공과 선비 등에 의해 전수받은 문화로 지탱한 문명의 변방 시대라고 생각하는 문화적 우월감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 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에 버금가는 선진 문화의 초석을 이뤄가는 문화의 시대였다(신상목, 2017). 당시 에도(동경)는 작은 어촌에서 시작해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였고, 왕성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졌던 세계 최대도시 중 하나였다.

에도시대의 과학문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일본 특유의'모노츠꾸리(실험설비제작)' 역량과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연구소의 영향을 받은 '코펜하겐 정신(평등하고 자유로운 연구 기풍)'이 더해지면서 일본은 20세기 세계 과학을 선도하는 기초연구 강국으로 발전했다.

1917년 설립된 이화학연구소(RIKEN)가 연구자의 낙원이라 불리고, 교토 대학과 나고야 대학 등 지방에도 연구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이러한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일본의 과기정책 패러다임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과 1996년부터 5년마다 수립·시행하는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추진한 때부터이다. 당시는 기본법 제정 이전의 기반적 경비(대학을 통한 일종의 블록 펀딩) 지원 중심에서 연구자 간 경쟁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하며 경쟁적 연구 환경 조성, 경쟁적 연구비 중심의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한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변화는 결과적으로 일본 SCI 논문의 양적·질적 국제 영향력 감소, 기반적 경비와 같은 안정적·장기적 연구비 부족에 의한 창의적·도전적 연구의 감소, 단기적이고 출구지향적인 연구경향 확산이라는 부정적인 연구풍토를 조성하면서 일본의 '학술연구 위기'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일본이 기초강국, 노벨강국이면서도 학술연구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과학관련 단체의 기관장, 연구자, 심지어 일본 과학기술정책총사령탑인 과학기술종합혁신회의(CSTI)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과학기술 관계자들은 이렇게 된 핵심원인 중 하나로 지나친 경쟁적 연구 환경 조성 및 경쟁적 연구비 확대를 들고 있다.

2015년 대전에서 개최한 과학장관 회담(Science Summit)에 참석한 하마구치 일본학술연구진흥기구(JST) 이사장은 일본의 노벨수상자들이 결코 많은 연구비에 의해서만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연구비의 양보다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이며 자유로운 연구 풍토가 훨씬 더 중요함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것이다.

경쟁을 통한 연구비 배분이라는 것이 결코 부정적이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지원기관을 통한 경쟁적 연구비 지원은 선정, 연차, 중간, 종료, 후속평가라는 평가단계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연구자로 하여금 기존의 연구 패러다임을 벗어나거나 단기성과 지향적, 심지어 평가 대비를 위한 논문 쪼개기 등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평가절차를 완화하는 추세라 할지라도 평가에 의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학에서 자율적인 연구를 위해 지원하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기반적 경비가 매년 1%씩 감소하는 상황에서는 위와 같은 연구자의 부정적인 연구행태가 나타날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본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NISTEP) 조사(2016)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연구과제의 연구내용과 연구자의 행동변화에서, 일시적인 유행을 좇는 연구가 증가하고, 단기적인 연구 성과를 강하게 지향하는 연구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새로운 연구영역을 창출하기 위한 도전적인 연구와 장기적인 차원에서 연구전략을 중시하는 연구자는 크게 감소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2016-2020)에서 기반적·경쟁적 경비라는 이중지원 연구비 시스템의 균형적인 지원을 지향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일본 과학기술정책 방향의 핵심은 2020년 동경올림픽을 겨냥해서 '세계에서 가장 혁신에 적합한 국가' 및 슈퍼스마트 사회 건설을 위한 'Society 5.0' 추진이다. 

일본은 현재, 학술연구의 위기라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매년 SCI 인용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고, 세계수준의연구거점사업(WIP), 전략적 혁신창조사업(SIP), 혁신적 연구개발 사업(ImPACT) 등 세계수준의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과 연구소 상위 100개 기관에 39개로 세계 1위(2017)를 기록하는 등 기초·원천연구 강국으로서의 역량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기초연구역량을 바탕으로 자국의 과학기술이 직면한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라 기대한다.

한편, 일본의 과학기술정책과 연구비 지원 제도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 기반적 경비와 같은 자유롭고 안정적이며 장기적인 연구비 제도의 구축이다. 경쟁적 경비체계로만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연구비는 많이 투자하고 있지만 SCI 논문의 양적 향상이라는 성과 외에는 세계수준의 연구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는 '코리안 패러독스'에 봉착해 있다. 

아카사키 교수(201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약 20년 동안 대학의 기반적 경비를 통해 청색발광다이오드(LED) 연구 성공의 초석을 닦았고, 이화학연구소의 모리타 그룹은 30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113번 원소(니호니움)를 발견하여, 아시아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원소주기율표에 원소기호를 새기는 역사적인 성과를 도출하였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자유롭고, 안정적이며, 장기적인 연구 풍토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 기초연구를 문화로 인식하고 단기적이고 출구지향적인 연구를 지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동경공업대학의 오수미 교수(2016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의 “쓸모 있는 것이 사회를 망친다”라는 언급은 과학정책 수립과정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초·원천연구는 다양성과 소외학문에 대한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학문 및 연구자의 다양성은 새로운 연구 분야와 신산업을 창출하고 학문 및 미래 경쟁력을 제고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SCI 분석에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라는 용어가 있다. 

발표 당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어느 시기에 폭발적인 인용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는 초석을 마련하는 등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논문을 의미한다. 과학이 경제발전을 위한 단기적 도구로만 활용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 과학경쟁력 강화는 아주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셋째, 한국·일본 각각의 연구지원기관의 연구비 운영 체계 및 연구비 사용체계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일본학술진흥회(JSPS)에서는 연구의 진척 상황에 따라 금년도 연구비를 내년도로 이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년도 예산을 금년도에 미리 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연구비 지원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시스템을 그동안 정부에서 추진한 개선방안 중 가장 혁신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본학술진흥회 등을 통해 정부에서 지원한 연구비 및 간접경비 중에서 연구책임자를 위한 어떠한 경비지원이나 수당도 지급할 수 없다. 외부 인사를 위한 식사비 등도 지급할 수 없다. 오직 연구 활동을 위해서만 연구비를 사용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과학문화와 연구 풍토가 다르겠지만, 이와 같은 일본의 연구비 및 연구자들에 대한 연구비 운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GDP 대비 및 절대 연구비(구매력지수) 규모 등 양적인 측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수준을 넘어선 우리로서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의 질적 연구 성과를 창출하여, 기초연구강국 및 선진 과학국가로 발전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일본의 사례를 통하여 우리나라가 과학강국, 선진강국으로 성장·발전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한진 박사는

1985년 충남대 졸업 후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과학정책학 석사를, 충남대 사회과학대학원 정책학 박사를 마쳤다. 1991년 한국연구재단에 입사해 정책연구실장, 국제협력기획실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국책사업기획실 수석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14년부터 3년 간 일본 동경사무소장을 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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