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매년 현충원 찾아 故 최형섭 장관 기려
"국가가 R&D 주도하는 시대 지나, 대덕 변해야···구글 이후 시대 준비"

"국가가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쓰쿠바 연구학원도시도 성공하지 못했다. 대덕특구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면 안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가지 변화가 있지만 최 장관의 국가관, 연구관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이제 구글 이후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일본과학기술정책연구 대부가 전하는 한국의 국가연구개발 집적지 대덕을 향한 일성이다. 

지난 2일 토요일 늦은 오후 대전국립현충원(이하 대전현충원). 때이른 더위에 식물들도 잎을 늘어뜨렸던 날, 백발의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회공헌자묘역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화환이 놓여진 묘지 앞에 멈춰섰다.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 본 그는 가지런히 신발을 벗더니, 두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어느덧 14번째다.

한국과학기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故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타계한지 14주기(5월 29일)가 됐다. 고인과 지난 1980년대 포항에서 처음 만난 이후 한일 과학자 교류 등을 이끌며 오랜 친분을 쌓았던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

그는 최 장관의 국가관과 연구자로서 자세를 존경하며 기일을 즈음해서 매년 빠짐없이 대전현충원을 찾아 추모하고 있다. 히라사와 교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연구환경과 문화가 달라졌지만 최 장관의 국가관, 연구관을 여전히 본받고 싶다고 밝혔다.

히라사와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에도 애정을 갖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덕특구가 과거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시스템을 도입하며,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변화를 이끄는 주역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는 매년 故 최형섭 장관의 기일에 맞춰 주말에 대전국립현충원을 찾는다.<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는 매년 故 최형섭 장관의 기일에 맞춰 주말에 대전국립현충원을 찾는다.<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교수는 故 최형섭 장관을 참배하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전했다.<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교수는 故 최형섭 장관을 참배하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전했다.<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교수는 일본 과학 관련 학회와 과학정책 연구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며,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총괄정책연구주임, 일본 정부 관련 심의회와 평가위원 등을 수행했다.

매년 방한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진다. 주말을 이용해 방한하는 그는 항공비, 체류비용 등을 외부 지원 없이 스스로 부담한다. 다만, 그와 인연이 있는 STEPI 관계자, 이재훈 김앤장 변리사 등이 개인적 차원에서 일부 도움을 주고 있다.

참배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참배 모습.<사진=강민구 기자>
아래는 본지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 

▲지난 2004년 최형섭 장관 별세 이후 매년 한국을 찾고 있다. 올해 현충원을 찾은 소회는 어떠한가.

10주기 당시 KIST에서 버스 4대에 연구진들이 오는 것을 보면서 과학계 원로를 기리고, 그의 철학을 이어가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는 현충원의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최형섭 장관 묘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상쾌해졌다. 일반 묘지 참배와 다르다. 최 장관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국가에 대한 과학자의 역할과 자세, 책임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고인의 국가관에 대해 인상깊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과거 최 장관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면 답이 있다. 여러 변수가 많았는데도 신념을 지켰다. 확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과학과 연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나 자신도 이 부분을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모범적이다.

KIST 설립도 국회예산안 통과 등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최 장관의 확고한 철학이 있기에 가능했다. RIKEN(일본이화학연구소)이나 막스플랑크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연구소를 만들었다. 최 장관은 한국의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연구소를 만들고자 했다. 이 연구소를 통해 국가 산업화를 위한 기틀이 마련됐다. 최근 착공된 V-KIST는 이러한 노하우가 개발도상국에 전수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본다.

2001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과 통과를 위해 최 장관이 물밑에서 많은 노력을 했다. 이듬해 일본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NISTEP)에서 과학기술기본법 관련 강연을 했다. 당시 최장관이 목표로 제시한 'GDP 대비 연구개발비 투자 비중 5%'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당시 일본이 3.5%, 미국 2.5% 정도였다. 이후 매년 비율이 증가해 한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R&D 투자 비중이 높은 국가가 됐다. 

▲최 장관의 묘비에는 '연구자의 덕목'이 적혀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등 연구자의 덕목은 큰 틀에서는 맞다고 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진 부분도 있다. 가령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등의 내용은 옛날 사고 방식이다. 연구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쉬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덕목이 유효하다고 본다. 나 자신도 연구 외 다른 부분은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최 장관 중심으로 한-일 기술교류회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일 연구자 협력 필요성과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2개국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각국이 협력해야 하는 시대다. 전 세계에서 우수한 인재를 활용해 다국적 팀을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한국 과학계를 위한 조언을 부탁한다. 

IT 기술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전 세계적인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IT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시장이 작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이 큰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성장이 시장의 크기에 비례한다.

최근 구글, 페이스북 등이 글로벌 거대 기업을 발전하면서 작은 시장을 보유한 한국, 일본은 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구글 이후 시대(After Google)'를 준비해야 한다.

구글과 같은 많은 데이터를 가진 곳이 인공지능 관련 연구에 유리할 수 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은 이러한 기업이 선도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시대를 생각한다면 기회가 올 수 있다. 바로 인간 개개인을 가치의 단위로 다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글 이후 시대'에서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블록체인 기술이다. 블록체인이 사회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블록체인은 전체를 모아도 의미가 없다. 블록체인은 1대1로 만들어지는 개별 기술이다. 다른 곳에 복제하지 못하도록 보안이 강화되며 개별적 의미를 만들 수 있다. 구글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대량으로 관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 기술을 찾아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곡지구, 판교테크노밸리 등 민간 R&D 투자가 활발해지며 R&D 판도가 바뀌고 있다. 앞으로 대덕특구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국가가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전 세계적으로도 동일하다. 국가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다. 앞으로 국가 R&D는 민간이 손을 대지 않는 분야, 기초 과학 분야, 장기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 집중돼야 한다.  

출연연이 밀집한 대덕특구는 기존 시스템과 생각을 바꿔야 한다. 쓰쿠바 연구학원도시도 침체되어 있다. 이제는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

민간기업의 비즈니스 추진 속도는 국가에 비해 훨씬 빠르다. 따라서 똑같은 일을 기업이 아닌 국가가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제 국가는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일본에서도 국가 주도 R&D 보다 민간 지원 R&D가 성과가 좋다.

과거와 달리 민간이 R&D에서 힘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민간 R&D를 보조하는 한편 기초 연구 등 공적 영역을 강화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가 R&D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왼쪽)과 그의 제자 이재훈 김앤장 변리사(오른쪽).<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왼쪽)과 그의 제자 이재훈 김앤장 변리사(오른쪽).<사진=강민구 기자>
◆히라사와 료(平澤 泠, ひらさわ りょう) 도쿄대 명예교수는?
1938년 3월 15일 출생이다. 도쿄대 교양학부 기초과학과 교수,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총괄정책연구주임, 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 Knowledge Front사 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공익재단법인 미래공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정책 연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기술경영론, 시스템론 분야 석학이자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 탄생에도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2004년 故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의 별세 이후 기일에 맞춰 매년 대전국립현충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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