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랄라 '남원 여행'의 달콤살벌한 여행 메이트는 누구?
글 ·그림 ·사진 : 강선희 anger15@nate.com

오후 1시가 넘어 남원역에 내리니 아빠와 엄마가 나를 반겼다. 낯설다.

평소 연락도 잘 안 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딸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시차가 있는 아일랜드에 살던 몇 년 동안 연락을 잘 안 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나.

그런데 며칠 전 전화통화를 하다가, 주말엔 남원을 다녀와야 해서 바쁘다고 했더니 웬일로 엄마가 같이 갈까? 하시는 거다. 혼자 룰루랄라 놀다 오려고 한 달도 전에 계획한 남원행인데, 긴장을 바짝 해야 하는 달콤살벌한 동행이 생겼다. 싸우지 말고 부디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큰 숨을 들이마시며 나도 부모님을 향해 큰 미소로 화답했다.

"오래 기다렸어~?"

남원 요천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
남원 요천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
참 오랜만에 부모님과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게 되니, 이번 여행엔 포기해야 할 게 많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는 각설이 공연을 한참 동안 구경해야 했으며 -춘향제로 스테이지 이곳저곳에서 색다른 공연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팥빙수가 먹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날씨 좋은 오후, 카페에서 기나긴 휴식을 가졌다. 크지도 않은 남원 시내의 중년여성 옷가게를 돌아다니다 저물어가는 해를 보았을 땐, 빨리 저녁 먹으러 갈 곳을 물색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엄마가 참 즐거워 보였다. 전업주부에 딱히 취미도 없는 엄마가 집에서 조금 심심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찮은 다리로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축제거리를 요목조목 둘러보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쇼핑을 하는 엄마의 표정엔 분명히 '행복'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고른 저녁메뉴, 한정식에 술도 한 잔 했더니 배가 올챙이처럼 빵빵하게 차 올랐다. 게다가 아빠의 속도에 맞춰 술잔을 비워냈더니 취기까지 돈다. 아빠도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얼굴이 하회탈이 되었다. 뻘겋게 달아오른 싱글이벙글이다.

광한루에 무슨 공연이 열렸나 싶어 우리는 산책도 할 겸 그 쪽으로 향했다. 저녁엔 바람이 제법 불어 쌀쌀했다. 아까 낮에 아빠와 함께 소원을 적어 광한루 연못에 띄웠던 연꽃은 어디로 흘러가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가족 모두의 건강을, 나는 나의 꿈을 적었다. 내가 좀 이기적인가 싶어 주저했지만, 그래도 내가 잘 살면 내가 행복하면 나의 부모도 행복하리.

딸은 소원을 적은 꽃을 연못에 띄우고, 아빠는 그런 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딸은 소원을 적은 꽃을 연못에 띄우고, 아빠는 그런 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때마침 악단 광칠의 흥겨운 공연이 막 시작해서, 셋이서 손을 잡고 관람을 시작했다. 국악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참 새롭게 다가왔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악단 광칠의 파워풀하고 흥 넘치는 무대에 아빠와 나는 푹 빠져들어 '잘한다, 참 잘한다'며 박자에 맞춰 어깨를 들썩들썩했다.

그러다 일찌감치 쉬러 들어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모두 일어났는데, 아빠는 아직도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잔디밭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빠의 행복에 추임새를 넣어주려고 나도 같이 추었더니 엄마가 할 말을 잃은 듯 소리없이 웃었다. 버드나무 위에 걸린 초승달 같은 미소였다. 춘향제를 겨냥하고 왔지만 뭔가 더 좋은 걸 본 것 같은, 완벽한 밤이다.

무아 게스트하우스 전경.
무아 게스트하우스 전경.
부모님을 숙소로 보내고 나도 춘향교를 건너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내가 묵은 무아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장과는 독특한 인연이 있다. 삼년 전인가, 아일랜드에 있을 때 아는 동생이 '언니와 공통점이 많은 사람을 우연히 찾았어요! 한 번 연락해봐요' 라며 블로그를 하나 소개해줬었다.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던 어느 날, 그 사람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비슷한 게 많아서 신기하네요'라며...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같은 도시에 살던 그녀는 이미 더블린으로 이사를 간 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서, 블로그를 통해 그녀의 행보를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아일랜드에서 정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녀를 만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작년 여름 나도 귀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써니의 느린여행을 기고하기 시작했을 때 제일 처음에 갔던 구례옥잠에서, 구례댁이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언니, 남원 가 봤어요?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은 어쩌면 옛말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이번엔 내 차례인 것 같았다. 진짜 '맥주 한 잔 해요'라고 툭 던졌던 그 말을 지키러 갈 시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춘향제가 열린다는 5월, 나는 마침내 남원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양옥집을 뜯어고쳐 만든 무아 게스트하우스는 외관부터 독특했다. 흰 담벼락 위로 풍성하게 자란 40년된 마조락은 꼭 춘향제가 열릴 즈음에 꽃을 피워 진한 향기를 낸다고 했다. 마당을 비롯해 숙소 곳곳에 주인장의 손그림과 재미있는 작품들이 숨어 있어, 찾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지낸 싱글룸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아늑했다. 혼여족(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위한 소규모 게스트하우스, 무아.

우리는 새벽 3시까지 맥주를 마시며 묵혔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 머물다 왔던 아일랜드에 대한 전혀 다른 감정과 추억들, 그림에 대한 고민, 앞으로의 계획 등 참 폭넓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순수미술 예술가로서 재능이나 자질이 없지만 그녀에게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게하 근처에 있는 갤러리 겸 스튜디오에서 본 그녀의 작품들엔 그녀만의 강렬한 색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본인의 기억을 감각적인 색으로 풀어내는 자화상과 사람들의 모습. 괴기스러우면서도 재미있고 신선한 그녀의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무아갤러리에 있는 그녀의 작품들.
무아갤러리에 있는 그녀의 작품들.
대화를 하던 도중 소이씨가 나를 향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히 다르겠지만 어쨌든 다들 본인만의 시련을 겪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구나, 생각했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동질감을 느껴주는 타인이 있다니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날 밤, 소이씨와 광한루에서 밤늦게 열린 노영심의 피아노연주를 듣고 왔는데 곡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기억'이었다.

언젠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의 교신을 위한 곡. 노영심씨는 옆 스테이지의 뽕짝 때문에 교신이 잘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며 씁쓸히 웃었지만, 나는 그 잔잔한 피아노 소리를 귀에 담고 칠흑 같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며 눈물이 날 뻔 했다. 참, 행복한 밤이었다.

먼 훗날에 오늘밤의 기억을 교신한다면, 나는 아마도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짓겠지.

무아 게스트하우스 : 전북 남원시 요천로 1501-10
                                    체크인 오후 3시, 체크아웃 오전 11시
                                    조식 선택사항 3,000원(한국식 : 잔치국수와 주먹밥/ 서양식 : 뮤즐리)
                                    도미토리 1인 20,000원 / 싱글룸 30,000원 (성수기 가격변동 없음)

심원첫집 : 전북 남원시 모정길 21-3
                  영업시간 11:00 ~ 20:00 / 명절 휴무
                  산채 더덕구이 정식 18,000원/ 산채비빔밥 9,000원
 

산들다헌 : 전북 남원시 향단로 21
                  영업시간 11:00 ~ 22:00 / 월요일 휴무
                  대추빙수와 티라미수가 정말 맛있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은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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