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하지만 아직도 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폭염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렇게 더운 여름이 올 한해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모두를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풀과 나무도 무섭고 따가운 햇볕 속에서 생기를 잃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말 기후 변화가 심각하게 느껴지는 이 여름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이 여름을 살아내는 아이들도 있다.
아파트 화단에 소담하게 피어난 수국은 꽃이 별로 안 보이는 이 무더운 여름날에 곱게도 피어나 더위에 무기력해진 나에게 "더워도 여름날 시간은 흐르고, 피워야 할 꽃들은 피워내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이지만 이 한 때만을 위해 피어난 꽃들은 지천명의 도를 깨달은 모습이어서 아름답기만 하다. 아마 그래서 이해인 시인은 수국을 가리켜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꽃이며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이라고 했나 보다.
여름은 연못에 연꽃과 수련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작은 연못에 피어난 어리연은 작지만 우아하고 아름답다. 부는 바람이 만들어 준 파문 위에 그림자를 띄워 목욕을 하는 작은 선녀같은 모습이다.
꽃에 비해 넓은 잎 위에 소금쟁이나 실잠자리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리'는 '어리다'의 의미로 작은 꽃이 마치 어린 연꽃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 하얀꽃이 마치 눈송이 같다고 해서 영어로는 '물 눈송이(water snowflake)' 라고 부른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말 눈꽃송이 같아 여름의 더위를 식혀줄 것만 같다.
지독히도 무더운 여름이지만 물속에 뿌리를 박고 서서 꽃을 피우는 어리연은 그래도 지낼 만 한가 보다. 여름날의 한적한 시간 속에서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나르시서스 흉내도 내보고, 잎 위에 놀러 온 작은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참 평화로운 모습이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느껴지다가도, 힘든 일이 있을 때엔 너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지독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리라는 확실한 희망이 있기에 이 여름을 견뎌낸다.
그래도 밤마다 삶의 고뇌를 녹여내어 달빛을 닮은 꽃을 피워내는 달맞이꽃을 보며 꽃말처럼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그런 날들을 기다린다. 달맞이 꽃의 꽃말은 '기다림'. 달맞이꽃은 멀리 남미의 칠레가 원산지다.
해가 지면 꽃잎이 활짝 피었다가 아침햇살이 뜨면 오므라들기 시작한다. 달만을 사랑했던 림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을 찾아 헤매던 달의 신 아르테미스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어간 후, 무덤가에 피어난 달맞이꽃은 그녀의 기다림처럼 안타깝게도 2년만에 시드는 두해살이 풀꽃이다. 오경옥 시인의 시에서 달맞이꽃은 '삶에 묻혀 말갛게 가라앉여졌던 것들이 밤이면 가슴 가득 환하게 피어나는 꽃'이 되기도 한다.
여름의 풀숲 속에는 때로 귀여운 박주가리꽃이 피어난다. 자세히 보면 털이 숭숭 난 털북숭이지만, 기분 좋은 향기와 달콤한 꿀로 가까이 다가오는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그 향기에 유혹되는 것은 벌과 나비 뿐만이 아니다.
8월 무더위에 피어나는 꽃 중에는 여름 담장을 곱게 단장하는 능소화도 있다. 중국이 원산인 능소화에는 한 서린 사연이 얽혀있다. 오래 전 우연히 임금에게 성은을 입은 궁녀 '소화'는 다시 오지 않는 임금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담장 곁을 서성이다 결국 죽어가고 말았다.
능소화는 독이 있고 꽃가루가 눈에 해롭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능소화는 중국 왕실에서 키우던 꽃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도 양반들이 주로 이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능소화는 조선시대에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사람의 화관에 꽂아 주었던 어사화였다. 꽃의 자태가 고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평민들이 능소화를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양반들이 '능소화는 눈이 멀게 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능소화는 꽃가루가 날리지 않는 꽃이며 수술의 갈고리 모양도 아주 작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 여름을 살아가는 야생초 중에는 가늘고 약한 몸을 곧추 세우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강아지풀도 있다. 너무도 흔하고 어디에나 자라나는 잡초이지만, 나에게는 늘 사진찍기의 영감을 주는 아이들이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이며 사랑스럽게 인사를 하는 강아지풀들도 이 여름의 지독한 더위에는 지친 모습이다. 벌써 가을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으로 초록 빛을 잃어 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길 가에 자라고 있는 강아지풀들과 잠시 하나가 되어 무더위 속에 머물러 보았다. 하지만 잠시의 머무름만으로도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강아지풀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면서 얼른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늘 만들기/ 홍수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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