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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통사]ETRI 이동통신 역사

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이번 142차 새통사 모임에는 새통사의 3대 정신적 지주인 한기철 박사님을 모셨다. 한 박사님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IT문화강국으로 올라 설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진 ETRI의 통신기술 개발 역사를 다뤘다. 이외에도 출연연의 역할과 책임, 연구자의 정신자세, 미래를 위해 준비할 일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70년의 압축성장으로 여러 혜택을 누리고 있는 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는 불협화음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학기술자가 해야 하고, 해내야 하는 역할과 책임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또 대한민의 IT신화창조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ETRI 과학기술자들의 희생과 도전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재조망해보면서 작금의 어려움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답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됐다.

한기철 박사님은 자신을 스스로 성공한 과학자라고 말한다. 어릴 때 꿈이었던 연구원이 돼 통신기술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외국의 이동통신 기술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과감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신기술을 실현했다. 기술을 배워온 곳에 다시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 박사님은 뚜렷한 통찰력으로 통신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한 박사님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가 있을 정도로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25살의 나이에 ETRI에 들어와 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국가전략사업을 직접 기획하고 실현까지 했다. 수많은 스토리는 훈장과 수많은 상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은퇴한 지금도 세상의 필요를 찾기 보다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그의 자세를 보며 '우리는 선배가 가진 열정의 반은 가지고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 단순히 서양의 그릇(器)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한기철 박사님은 이동통신연구소장을 지냈다. 간사로서 본 한기철 박사님은, 최 원장님의 말씀에 유일하게 반박할 수 있는 분이 아닐지 생각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삶의 불편함을 들춰내고, 쉬지 않고 대안을 고민하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간사는 통신 중에서도 유선통신과 통신의 중추신경에 해당하는 백본 영역을 담당했었기에, 한 소장님의 현역시절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후배들에게 중요한 일을 다 물려준 모습에서 충분히 현역시절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물론 혼자해낸 것은 아니지만 한 박사님은 우리나라를 무선인터넷통신의 종주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 중의 한분이다.

대한민국의 성장을 만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대한민국 통신역사는 서양의 그릇을 그냥 가져와 사용한 것이 아니다. 서양의 그릇 만드는 기술을 배워 우리 그릇을 만들었고, 또 그것이 밑천이 되어 스스로 그릇을 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래서 한 박사님이 사용한 서기(西器)의 의미는 원래의 뜻과 다르다. 어쩌면 서양의 모습을 참고해 한국의 것을 만들어 냈다는 측면에서 동도동기(同道東技)의 뜻이 아닐까 싶다. 같은 뜻을 취하여 우리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한기철 소장님은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따라가는 기러기가 앞장 선 기러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소장님이 말하고자 하는 동도동기(同道東技)의 말씀 속에 앞장 선 기러기와 뒤에 따르는 기러기가 하나의 뜻을 가지고 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박사님은 그것을 충효로 풀어낸다. 리더가 뜻을 내고 구성원들이 뜻을 함께 실천하는 것이 곧 충효라는 것이다. 기러기가 한 무리가 되어 서로간의 울림과 떨림으로 만들어내는 뒤틀림의 힘이 곧 역동성이 돼 대한민국에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낸 것이다.

◆ ETRI를 통해서 출연연의 R&R을 발견하다 

-1977~1983, 최선의 기술도입

ETRI의 모태는 통신연구소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무렵, 우리나라에는 비싸고 융통성없는 외국산 기계식교환기 기반의 전화망이 있었다. 당시 기계식 전화망은 급격히 성장하는 경제활동을 뒷받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전화설치 신청을 하면 3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전자교환기 도입을 결정하고 외국산 교환기를 국내 제조업체에서 생산을 할 수 있도록 규정을 정의해줬다.

이어 전국의 통신망을 어떤 규모로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 것인지 결정했다. 집을 짓는데 방은 몇 개로 할 것인지, 각 방의 크기는 어떻게 할지 등과 같이 전화망을 구축하는데 교환기를 어느 곳에 얼만큼의 용량을 설치할 것인지 정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동시에 수행한 일이 교환기 구조기술과 운용기술을 배워와 생산인력과 운용인력을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82~1992, 교환기국산화

ETRI가 맡은 두 번째 R&R이 교환시스템의 국산화를 통한 1가구 1전화시대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산업으로 전자산업을 선택하고 이를 실현할 전략으로 전화교환기 국산화를 채택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보통신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전략이었다.

제일 먼저 도전한 교환기의 모델명이 TDX-1을 통신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시범적으로 개발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연구시제품 개발을 목표로 임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뒤늦게나마 국부창출을 위한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어, KT에 <사업관리단>이 만들어졌다. 연구내용과 목표관리를 하는 체계가 만들어졌고, ETRI는 상용시스템 개발을 위해 4개의 제조회사와 함께 단일 상용제품 개발에 성공한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단일 프로젝트이기도 했거니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 냈다는 자신감으로 TDX-10, TDX-10 ISDN이라는 국산 고유모델을 생산하여 수출까지 이루어낸다. 이것이 'TDX신화'다. 이 TDX신화 속에 많은 사람들은 ETRI가 받았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만 생각하지만, 공학자들이 받은 인간적 수모와 열악한 근무환경은 역사속으로 묻혔다. 우직한 선배들은 그저 연구원이 해냈어야 할 일이었다라고 담담하게 말을 할 뿐, 지금으로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어두운 그림자는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한 소장님은 지금 후배들이 그러한 환경에서 일하라고 하면 단 한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 어느 곳에서도 그 어두운 시절을 보상해주는 손길은 어디에도 없다. TDX는 외산을 100% 가져올 수 없었다. 외국 회사들이 100%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엄청난 양의 소형 프로세서들을 이용한 대규모 분산호처리시스템 기술이다. 대규모 소형프로세서들간의 상호연결망을 위한 하드웨어도 하드웨어이지만 수많은 소형 프로세서들에 호처리 부하를 분산하여 처리하는 세계 최고의 분산컴퓨팅 소프트웨어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OS(Operating System)와 DBMS 시스템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

많은 사람들이 CDMA라는 이동통신기술을 그저 이동통신기술의 국산화 정도로 치부한다. 유한한 자원을 여러사람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Division Multiplexing Access (DMA) 기술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물리적인 자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자원을 논리적인 코드로 나누어 DMA하는 기술을 CDMA라고 한다. 이에 대한 원천기술개념을 퀄컴이라는 회사가 가지고 실현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는 단계에서 ETRI는 대규모 가입자 수용에 최선의 기술이라는 판단 아래 CDMA 상용화를 이뤄냈다.

초기의 CDMA 상용화 계획은 ETRI-퀄컴-정부간에 계약이었다. 퀄컴이 필요한 모든 설계도를 그리면 ETRI를 통해 우리나라 제조회사가 상용화할 수 있게 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ETRI가 퀄컴의 설계도가 만들어지기 전 실용화 실험에 성공했다. TDX의 국산화를 통한 기술의 자주화가 있었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소프트에어를 확보하고 있었던 ETRI는 단말의 이동성을 제어하는 Mobility control 기능을 추가하여 실용화를 증명했다.
 
그 속의 비밀을 풀어보면, 고정된 유선망의 번호번역 기능을 이동성 제어에 적합한 모델로 변환하여 이동하는 단말기들간의 통화연결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선통신의 유산이 있었기에 새로운 무선 자원제어 기술과 결합하여 세계최초의 CDMA라는 상용 기술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그 증서도 ETRI에 비치해두고 있다.

기술을 손아귀에 넣은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독자적인 휴대폰을 만들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결국 지금의 '스마트폰 강국'을 있게 한 힘이었다. CDMA 비사 중에서 반드시 기록에 남겨 놓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정부가 CDMA 상용화도 완성되기 전에 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해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ETRI 연구원들이 겪은 고초를 미루어 짐작해 본다. 고생은 ETRI 연구원들이 하고 과실은 기업이 가져가는 형국이었다. 후배들이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새로운 원천 확보

당시 한, 중, 일만 해도 10억이 넘는 이용자가 존재하기에 CDMA를 가지고 거대한 시장세력을 형성시키고자 했다. 아마 지금의 중국이 그 당시에 존재했다면, 세계 이동통신의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라 쉽게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역사를 되돌라보는 의미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교훈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다음에 우리나라가 새로운 원천기술을 확보했을 때의 전략수립에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동통신이라는 기술자주권을 확보하고도 시장확대라는 길을 걷는 대신에 새로운 표준을 그것도 온전히 우리 것도 아닌 것을 만드는 것으로 여정을 잡아버렸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IMT-2000의 기술은 기존기술의 장점을 결합시킨 모습이다. 우리l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선자원을 제어하는 기술이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일이다.

CDMA에 대한 과감한 시장확대 전략을 펼쳤더라면, 장비제조회사의 성장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일자리 창출과 시장점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CDMA시장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또 새로운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한다고 통신사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ETRI는 IMT-2000의 핵심원천특허 3개를 확보했다. 전 세계가 사용할 새로운 글로벌 표준 기술인 IMT-2000의 종주국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올려놓았다. 정부는 ETRI에 300억원을 투자하여, W-CDMA라는 새로운 통신방식을 위한 주파수 판매수익 3,000억원의 수익을 얻었다. 정부입장에서는 엄청난 ROI다. 그러나 여전히 아쉽다.

-새로운 서비스 방식의 도전

다음이 4세대 이동통신에 대한 도전이다. 기본적으로 대규모 이동데이터통신, 광대역무선이동통신서비스 또는 광대역무선인터넷서비스를 준비하자는 도전이었다. 축적된 기술이 여력이 있었기에, 동일주파수 대역에서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방식인 FDD와 TDD를 동시에 점령하는 방식을 택했다.

더 큰 변화는 무선자원을 분할 사용하는 방식의 채택에 있어서, CDMA를 버리고 전격적으로 OFDMA를 채택한다. OFDMA는 서로 상호간섭을 일으키지 않는 직교하는 주파수로 자원으로 분할하여 무선자원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미 기술표준이 공개되어 버린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시장장악력뿐이다.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없는 기업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마침, 3세대 이동통신(IMT-2000)의 상용화가 지연되고 있는 시점이고 제조업체들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4tpeo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하다는 ETRI가 안전지대로 놓여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한 가운데 과감하게 출발했던 FDD방식의 광대역무선데이터통신기술은 유럽의 LTE advanced (3세대 개량 기술) 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전향을 하고, TDD 방식은 그 유명한 WiBro라는 이름으로 삼성만의 독자기술 개발사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삼성은 글로벌화를 위한 시장생태계를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 ETRI의 4세대 광대역무선이동통신기술에의 도전은 끝난다. 결국 시장지배력을 가진 유럽의 LTE 계열이 4세대를 장악하게 된다. ETRI가 기여한 것이라고는 OFDMA의 쓰임새를 알려준 것이 전부인 셈이다.

유선통신기술에서 경험했던 시장지배력을 무시한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 가지는 허망함을 이동통신기술에서도 똑같이 느끼는 시간이다. 왜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나누지 못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큰 틀에서의 지속가능성을 논하지 못하는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생존의 질과 양을 논하기에는 역부족인 지식의 수준이다.

ETRI에게 또 대한민국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는 분명한 기회가 있다. 새로운 원천씨앗을 만들어 섣부른 글로벌화 이전에 시장생태계 확보를 통한 시장지배력을 장악하는 전략이 잊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에겐 도전할 수 있는 많은 것이 있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기술에서는 바뀌는 패러다임의 보편적 기술내지는 중추신경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출발할 때 승산이 있는 것이다. 세계 12위국의 대한민국, 이제는 삶에 끊임없이 무엇이 불편한지를 물으며 살아야 할 시기다.

◆ 과학기술인도 시를 읽자

한 박사님은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에는 공허한 구호만이 난무한다고. 유비쿼터스로 세상이 시끄럽더니 유비쿼터스가 뭔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5세대라는 단어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5G라는 단어가 정의되기도 전에 초연결이 나타났으나 초연결이 난무하고 이제 또 4차산업혁명의 선도국이 되겠다는 설레발들이 난무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과학기술인들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혀내고 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자원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만 한다. 새로운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이 하고 있던 일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함께 걸어가야 할 높은 뜻이 보이면 과감하게 자신의 집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함께 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시(詩)를 읽으면 좋은 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풍성해진다. 둘째는 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커진다. 셋째는 바로 세상을 낯설게 보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인간, 초인간, 반인간, 신인간이 함께 어우려져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다가온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통해야 할 통찰이 필요한 시기다.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통신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은 굳이 통신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통찰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항상 '선구자는 외치는 자가 아니라 작은 일을 실천하는 자'라는 마음으로 삶을 임하는 한기철 박사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다시 한번 후배들에게 값진 이야기를 준비해주신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른 시간 내에 한 박사님이 소망하는 'ETRI와 출연연의 깨어남'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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