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총장에게 절차 무시한 '직무정지' 권고안10여명 기관장 사퇴···오피니언 리더들 누구도 목소리 내지 않아

올해 초부터 시작된 과학계 기관장 물갈이가 연말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공계 대표 대학인 KAIST 총장에게도 직무정지 권고안이 내려졌다. 연구현장은 뿌리까지 뒤흔들리며 파장이 커지는 모양새다.

과학계 기관장 인사가 언제부터 정권의 전리품이 된 것일까. 그 결과는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가 반복됐고 연구 현장도 정권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구 지속성이 깨진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비극도 따라왔다. 누군가 단절시켜야 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

춧불 정부로 믿었던 문 정권 역시 인사 칼바람이 거셌다. 올해 2월 내외부에서 인정받으며 연임에 성공했던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소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데 이어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이 임기를 8개월여 남기고 사퇴했다.

3월말과 4월초에는 한국연구재단 이사장과 KISTEP(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원장, 한국창의재단 이사장, 한국지질자원연구원장이 임기를 2년여 남겨두고 물러났다. 또 KINS(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이 임기를 절반이나 남겨두고 사의를 표했다.

11월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석연찮은 이유로, 같은달 DGIST 총장이 임기를 절반 이상 남겨두고 물러났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에는 KAIST 총장이 직무정지 권고를 받았다. 지난달 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KAIST 이사장에게 총장 직무정지 권고안을 보냈다. 한해동안 10여명의 기관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과학계의 위기를 넘어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KAIST 총장의 직무정지는 초유의 사태로 국내 이공계 대표 특성화 대학의 존재감이 무색한 지경이다. 개인의 인물론을 떠나 현 정권에서는 과학계의 상징인 KAIST 총장 자리 마저 전리품 중의 하나로 보는 셈이다.

신성철 총장은 4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자신에게 씌워진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출신인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도 현 정부의 절차를 무시한 KAIST 총장 고발에 대해 정치적 물갈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혹자는 정권이 바뀌면 과학계 기관장도 바뀌는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내 사람으로 채워야 소통이 잘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란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또 다른 악순환을 불러 올 뿐이다.

기관장의 자질, 도덕성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면 공정한 과정과 절차를 통해 거취를 달리할 필요는 있겠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계 인사는 공정한 절차가 배제된 채 코드가 나와 맞는가, 맞지 않는가로 구분되는게 사실이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사퇴 압력, 과도한 감사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게 과학계의 목소리다. 지금의 상황이 반복되면 과학계는 물론 국가의 위상마저 후퇴하는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절대 빈곤국이었던 우리나라는 미국, 독일 등 과학선진국의 기술과 제도를 도입해 빠르게 따라하며 경제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 문화는 보지 못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과학 철학, 문화도 형성되지 못했다.

올해로 출범 60년을 맞은 DARPA의 모델을 보자. DARPA는 1957년 구 소련이 저궤도 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면서 국방기술 쇼크에 빠졌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8년에 설립했다

연구 창의성과 독자성을 보장하고 관료의 간섭을 최소화한 독립적인 운영체계를 기본으로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뒀다. 초대 국장인 로이 존슨(Roy Johnson)은 GE의 연봉 16만 달러를 포기하고 연봉 1만8000달러 DARPA 국장에 취임했다.

IITP(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의 최근 DARPA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60년이 흐르는 동안 이름과 역할이 조금씩 변화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방향은 변함이 없다.

철저한 전문가 중심의 PM제도로 그들이 직접 연구를 기획하고 결정한다. 인재 영입도 마찬가지로 진행되면서 DARPA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확고해졌다. 정권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거나 인사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냉전 종식 후 DARPA는 민간기업, 대학간 협력촉진, 정보통신, 무선시스템, 바이오 기술 등 혁신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된다.

독일의 대표 연구협의회 '막스플랑크협의회'도 마찬가지다. 1948년 설립이래 18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다. 84개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두고 있다.

막스플랑크협의회의 재정은 연방과 주정부에서 공동으로 부담한다. 연구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연구주제부터 연구비 운영 어디에도 정부의 간섭은 없다. 막스플랑크협의회 수장의 재임기간 역시 최소 6년부터 12년까지로 정권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연구 지속성, 과학문화가 형성되며 독일만의 철학이 담길 수 있는 비결이다.

반면 한국 과학계는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하면서 연구 환경, 문화, 풍토가 빠르게 황폐해져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속성이 단절된 과학정책은 연구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연구생태계가 파괴되는 것도 당연하다. 과학계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지적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연구현장에서도 정권에 따라 순응하고 휘둘리며 연구생태계를 황폐화로 이끌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과학계 생태계가 난도질 당하는 상황에서도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연우회, 기관장협의회, 대덕클럽 등 과학계 오피니언 리더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평소 지식인을 자처하며 과학계에 각별한 애정을 표했던 그들은 무엇을 위해 숨죽이고 있는 것일까. 개인의 감정, 욕심에 치우쳐 과학계라는 숲이 통째로 망가지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인공지능, 자율차 등 미래 기술이 생활 속으로 속속 들어오며 과학기술 강국들은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과학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 이후 5차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은 바이오 주도의 5차산업혁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은 과학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축제처럼 즐기는 분위기다. 중국은 각 분야 과학기술에 집중 투자하며 중국 건국 100년을 맞는 2049년을 향해 질주하고 힜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정책으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급격한 하향선이다. 대내외적 산업환경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경제 전망도 다수다.

과학기술에 기반한 미래 준비가 시급한 이유다. 반복되는 정권의 전리품으로 과학계를 바라보면 더이상 우리는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긴 안목의 과학정책과 철학으로 2048년 대한민국 건국 100년을 향해 다시금 역량을 결집해야 할 마지막 시점이다.

오는 14일 KAIST 정기 이사회가 열린다. 총장 직무정지 권고안도 안건으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회 구성원은 10명이지만 신 총장은 당사자로 제외된다. 결국 9명중 3명은 정부 관계자로 구성된다. 신 총장에게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이사진에게 당부하고 싶다. 정권과 개인의 시각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관점에서 과학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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