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날 맞아 다시 생각하는 과학자의 길
지식인으로서 자기 중심 잡고, 통찰력 길러 세상 기여

어지럽다. 촛불이란 민의로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며 세상은 정돈되고 한 방향으로 차분하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외교가, 경제가, 사회가, 환경이···.

과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원자력을 둘러싼 갑론을박과 장관 후보자에 대한 설왕설래, R&R, PBS 등 연구환경에 대한 시시비비 등등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과학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그냥 방관자로 구경만 할까, 한쪽의 참여자로 논쟁의 한 편이 될까, 과학이란 객관성을 기반으로 중심을 잡고 사회가 전진하도록 할까?

과학의 날이다. 서울 곳곳에서는 과학 주간을 맞아 처음으로 과학이 시민들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 올해는 특히 한국 과학 60년이 되는 해라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원이 올해로 60돌을 맞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나이 60은 이순(耳順)이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어느 정도 해탈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때이다. 한국 과학 60년이 되는 해의 과학의 날을 맞으며 미래 과학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식인으로서 통찰력을 갖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주역으로서의 과학자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현재 한국 과학의 모습은 많이 아쉽다. 현 정부들어 과학과 관련된 전략이나 비전은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과학이 어느 정권보다 찬밥이고 정치에 종속됐다는 푸념도 들린다. 원자력과 같은 중요한 정책이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됐다. 과학 운동한다는 사람들도 원자력 문제 거론은 꺼린다. 와중에 연구 기반은 무너지고 있는 암울한 시기이다.

주변 여건이 힘들수록 선인들은 기본을 강조한다. 지금이야말로 과학자들이 철학과 품격을 숙고해야 할때가 아닐까?

철학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중심을 잡고, 이웃과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내려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니체의 ‘초인’(超人)은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누구나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고, 그것이 반복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원인을 외부에서 찾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고, 좌절을 극복하는 사람인 초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고 이야기 한다. 이때 좌절하거나 무릎 끓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정면으로 보고 도전하면 오히려 강해진다고 말한다. 어려운 때가 거꾸로 성장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도 절망 상황에서 불안을 직시하라고 이야기한다. 피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실패했을 때, 조심스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승리이다."

아울러 이제는 과학자들에게 품격이 요구된다. 품격이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 중심을 지키며 사익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자세 등등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내가 하는 프로젝트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지역 및 국가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나만의 연구가 아니라 다른 분야 및 외국과도 함께 하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당장 성과가 나오는 것도 좋지만 오랜 난제에 도전한다. 일생을 파고 들어갈 테마를 찾고 꾸준히 나아간다. 연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과도 소통한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 다양한 책도 읽고, 예술도 즐긴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여건을 마련하려 애쓴다. 인류의 일원으로 인류와 우주 발전에 기여할 바를 찾는다. 같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와 교류한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통찰력을 길러 공동체의 미래를 대비한다...

올해는 세계 및 한국 과학으로서 의미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케플러 행성 운동 400주년. 멘델레예프 주기율표 150주년,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증명 100주년, 인류 달 착륙 50주년 등 세계적 기념이 많다. 한국으로서는 원자력연 60주년, 항공우주연 30주년, KSTAR 10주년 등등의 기념비적인 해이다. 그 가운데 원자력연 60주년은 한국에 근대과학이 시작된 지 60주년이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서양 과학의 500년 역사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지난 60년은 약동의 시기였다.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볼 의미가 있다.

과학기술은 100달러 국가가 3만달러 국가가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우리 사회가 처음으로 과학에 손 댄 것은 최초의 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59년이니 올해로 60주년이다. 그 사이 우리의 1인당 GNP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세계은행 자료로 보면 1959년이 150달러, KIST가 출범한 1966년이 133달러, 대덕단지를 시작한 1973년이 405달러였다. 연구가 본격화되며 이후 국민 소득이 초고속으로 늘며 1994년 1만달러, 2006년 2만달러, 그리고 올해 3만달러를 기록했다.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는 해방직후 10명 수준이었는데, 2010년에는 10만명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인구는 23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2배 늘었지만, 이공계 박사는 1만배가 증가한 것이다. 개인도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이공계에 집중 투자하며 전문 인력을 양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주역이 되어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원자력 등등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되도록 하는데 기여했고, 이는 국부로도 연결됐다.

그러나 상승 기조는 근래 들어 벽에 부딪혔다. 경제성장률이 3%대에서 2%대로 내려 앉고, 지금까지 견인차가 됐던 중화학공업에서 한계에 다달았다는 파열음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가 더 이상 선진기술 베끼기란 패러다임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빨간불이다. 우리만의 독창적인 발상과 새로운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게임의 판이 바뀌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이 바뀌며 경쟁력의 원천도 달라졌다. 베끼기 패러다임에서는 전문 지식이 가장 중요했다. 세상의 움직임은 관심을 가져도 좋지만 그에 아랑곳 없이 정해진 해답만 맞추면 됐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몰라도 됐다. 이웃이 힘들어 해도 나만 편해도 됐다. 국제 과학계 움직임이나 정세도 큰 상관 없었다. 윤리나 도덕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과학자로서 프로젝트하고 그 프로젝트가 성공이란 판정만 나오면 결과가 어떻든, 과정상 규정만 지키면 그것으로 문제 없었다.

사회적으로도 과학자들에게는 편의를 봐주었다. 세상 물정 몰라도,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납세자인 국민들에게 설명을 안해도 별 지적 안하고 넘어갔다. 연구비만 대주면 결과를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하며 지원했다.

하지만 촛불 이후 혁명적 변화가 시작됐다. 국민과의 소통은 담 쌓았던 원자력계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탈원전이란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쓰나미가 닥쳤다. 원자력계는 기반부터 흔들렸고 진도 7에 해당하는 강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멀쩡한 원전이 가동 중단되고, 계획됐던 원전 건설은 백지화되고, 전문가들로 구성돼야할 각종 안전 기구는 비전문가들도 채워졌다.

과학 정책의 전략과 비전은 먼나라 이야기가 되었고 정치권으로부터도 찬밥이 됐다. 과기부 장관 인선을 둘러싸고 검증을 제대로 안한 본인들의 책임은 묻지 않고, 애꿎은 과학자만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금까지는 과학기술과 종사자들이 발전의 수단이었고, 정치의 종속변수였다. 그렇지만 근대과학 60년을 맞으며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과학기술이 수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고, 과학자들도 지식인으로서 사회 변혁과 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이공계라는 이유로,연구실에만 있어서 세상 일은 모른다는 것은 옹호되지 않는다. 추격의 시대에는 속도가 경쟁력이어서 해답이 나와 있는 만큼 그 해답을 풀기 위해 올인하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창조의 시대에는 속도 보다 방향이고, 여기에는 많은 지혜가 녹아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름의 철학을 가져야 하고, 시대상을 알아야 하며, 대중과 소통해야 하고, 자신의 품격과 품위를 지켜야 한다. 학회 간다며 자식이 유학간 곳을 반복적으로 가는 등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미래를 만들어 가야하는 패러다임에서의 과학자상(像)은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흐름도 알아야 하고, 대중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고, 윤리나 도덕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철학과 품격이 요구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들 사례가 많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 지식인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건의했다. 그의 건의로 독일에 앞서 미국이 원폭을 개발하며 인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우리도 그 혜택을 보았다. 아폴로 계획도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적국의 스푸트니크 쇼크란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가 미래 지향적이 되도록 했다. 우주 기술은 산업에도 적용되며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우리도 이제는 과학계가 사회 발전의 수단을 뛰어넘어 풍향계가 될 필요가 있다.

과학 현장에서는 과학 발전의 걸림돌로 관료 탓을 많이 한다. 일리도 있다. 그러나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규제 사고를 갖고 있고, 지배하려 한다.이 속성을 잘 알고 대응해야 한다. 관료들이 이 사람은 정말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하도록 열정과 성과를 내는 것이 과학자들에게 요구된다. 국민과도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국민들의 과학적 소양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책무이다. 과학계의 주인은 과학자라는 철저한 인식이 필요하다.

과학의 역할은 미래로 갈수록 더 중요하다. 과학자들에게는 기회가 계속 있다. 이기적인 과학자가 아니라 이타적 과학자가 앞으로 더욱 존경받고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세계적 연구소인 일 이화학연구소(리켄)의 김유수 박사는 말한다.일본의 과학자들은 자신이 왜 과학을 하는지 지속적으로 반문하고, 세계적 수준과 비교하며 자신을 되돌아 본다고.

과학의 날을 맞아 과학자의 철학과 품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고 국민들에 다가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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