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①]故최형섭 초대 KIST 소장·과기처 장관"지속가능 국력은 과학기술 기반의 미래 동력 창출""과학의 속성은 협력과 국제성, 대덕은 내용상 함께하기 좋은 곳"

 

故최형섭 장관은 지속가능한 한국의 미래를 위해 국민의 과학적 관심과 이해를 당부했다. 그러면서 관료도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자는 환경을 탓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사진=대덕넷DB>
故최형섭 장관은 지속가능한 한국의 미래를 위해 국민의 과학적 관심과 이해를 당부했다. 그러면서 관료도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자는 환경을 탓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사진=대덕넷DB>
지난 10일 현 정부의 출범 2주년을 맞았다. 한국의 현실은 산업, 경제, 일자리, 성장 동력 등 여러 지표에서 빨간불이 켜지며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무엇보다 과학선진국들이 인공지능, 자율차, 우주탐사 등 미래 과학기술 선점을 위해 질주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과학기술 기반의 미래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방향성을 잃고 있는 상태다. 본지는 과학계 원로와의 인터뷰(또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 연구자와 정부의 역할을 들어 보았다.<편집자 편지>

"과학기술은 시간, 공간적 제약을 넘어 속성의 본질을 상호 협력성과 국제성에 둬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축적된 과학기술 유산이 적죠. 이를 위해 일관된 철학과 믿음으로 외부와 적극 협력해야 해요.  그에 앞서 대통령과 전 국민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과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고요."

최형섭 前 장관은 방향을 잃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 분야의 국민적 관심과 문화 조성, 외부와의 적극 협력"을 제안했다.

오는 29일,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타계한지 15주기를 맞는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초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해외에 거주중인 우수 한인 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고, 과학기술 정책 체계를 수립하며 한국의 중화학산업 발전의 토대를 다졌다.

그 결과 1960년대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던 한국은 지난해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르며 외견상 선진국 반열에 진입했다. 세계 각국은 '기적'이라는 단어를 아끼지 않으며 한국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칭찬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 한때는 잘 살았으나 추락한 나라들이 한국의 성장을 부러워하며 전략 전수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선진국 대열에 오르기 위한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며 한국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다. 반도체, 휴대폰,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이 줄줄이 선두 자리를 내주며 밀려나고 있다. 한국의 안보와 외교문제에서도 한국이 배제되는 양상이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상황은 산업은 물론 국방까지 아슬아슬하다. 내부에서도 원로들이 한국의 지속 가능성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로에게 듣는다' 故최형섭 장관 편은 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평소 그가 강조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인재의 중요성, 대통령과 연구자의 역할, 한국이 나가야할 방향 등을 제시했다.

◆ 과학기술이 왜 중요하냐고? "국력 약하면 거들떠도 안봐"

"1960년대에는 해외 어디에서도 우리나라를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경쟁력 없는 국가에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국가의 경쟁력은 국력이죠. 국력은 과학기술 기반의 부국강병이고. 지금은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지요. "

최형섭 장관은 1990년대 이후 동남아와 개발도상국을 돌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과학정책과 기술개발전략 작성에 도움을 준 것으로 잘 알려진다.

과학선진국의 과학기술은 16~17세기 과학혁명을 시작으로 산업혁명과 전쟁 등을 거치며 300년 이상의 오랜 지식과 기술 축적으로 이뤄졌다. 그에 비해 우리는 과기처 설립(1967년)을 기점으로 이제 50년이 조금 넘는다.

한국은 유례없이 빠른 시간안에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비슷하게 따라 잡았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축적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 장관은 과학정책 기본 방향을 사람, 경제개발, 실천 풍토 조성에 뒀다. 해외 한인 인재 영입에 그가 각별하게 공을 들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체계로 발전되어야 했다. 그래서 전략 공업에 필요한 기술을 선정해 중점 개발할 것을 강조했고 인재를 영입했다"면서 "당시에는 정부도 선택적인 공업화를 추진했기에 이 정책이 시의 적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덕연구단지는 우리나라의 산업기술 고도화 뿐만 아니라 미래 과학기술 도약을 예견한 '사전의 포석'이었다고 밝혔다. 지속가능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시기에 맞는 대덕연구단지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대덕연구단지는 산업 발전 기여와 우리나라의 장래를 바라보는 '꿈' 이었다"면서 "연구단지의 특성을 살려 형식상의 교류가 아닌 내용상의 협력이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관념적인 사상이 팽배해 사실 계량적이고 실천적인 것을 중시하는 과학기술이 자라 나기에 빈약한 토양이다. 때문에 과학기술 성장 풍토 조성을 위해 한 두사람의 연구자가 아니라 다같이 협력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과학기술이 축적되고 뿌리내리기 위해 조령모개((朝令暮改)가 아닌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대통령과 정부에 당부했다.

또 연구관리의 기본 철학으로 자율성 보장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최 장관은 1967년 KIST 설립 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회계감사 항목이 들어가자 개정안을 냈다. 당시 국회에서 시행도 하지 않고 개정안을 내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최 장관은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에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우문(최 장관 표현)을 던지고 개정안 통과를 요청했다. 결과는 통과.

최 장관은 "연구 업무는 일반 행정에 쓰이는 잣대로 들이대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게 내 소신"이라면서 "그에 앞서 연구자도 연구비를 흥청망청 쓰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국가발전의 요소로 그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KIST 초대 소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사령장을 받고 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최형섭 박사가 기관 설립에 앞서 각국의 한인 인재 과학자들을 찾아가 고국에서 기여해줄 것을 당부하자 더 좋은 환경을 뒤로하고 귀국했던 연구자들.<사진=대덕넷DB>
KIST 초대 소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사령장을 받고 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최형섭 박사가 기관 설립에 앞서 각국의 한인 인재 과학자들을 찾아가 고국에서 기여해줄 것을 당부하자 더 좋은 환경을 뒤로하고 귀국했던 연구자들.<사진=대덕넷DB>
◆ 연구자의 연구관 "직위 연연하지 말고 탓하지 말라"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훌륭한 연구소로 잘알려져 있는데 연구성과도 있지만 참다운 연구 분위기가 있습니다. 연구환경, 기자재 때문에 연구를 못하겠다는 것은 연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성의와 의욕이 없는 사람이 기구, 기기 탓을 많이 하죠."

최형섭 장관이 강조하는 연구자의 자세는 검소, 근면, 겸손, 성실, 의욕, 열의 등 6가지다. 연구하는 사람은 올바른 사고와 자세를 기본으로 성실하게 행동하는 연구문화를 조성하고 정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는 "세대가 다르긴 하지만 연구자가 어중간하게 연구하면서 돈도 벌어 보자는 것은 상식적으로 착각"이라면서 "연구하는 사람은 직위가 아닌 직책에 충실하고 아는 것을 자랑하기보다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물리학자 뉴턴도 연구과정을 마치 캄캄한 넓은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최 장관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10년동안 33편(공동연구 포함)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바쁘게 일하고 가장 많은 학술논문을 발표한 때"라면서 "훌륭한 연구는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겠다는 성실한 마음과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조언했다.

연구한 결과를 잘 표현하는 연습도 중요하다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조했다. 최 장관은 제련공학 공부를 위해 깐깐하고 예의를 무척 강조해 제자가 거의 없었던 캐나다 쿡 교수의 연구실에 지원했다.

"3개월마다 보고서를 써야하는데 영어로 쓰는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올리면 빨간줄 첨삭이 가득했죠. 논문도 써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쿡 교수에게 대들었어요. '연구하기 위해 왔지 영어공부를 하러 온게 아니라고.' 그랬더니 쿡 교수께서 '나는 자네가 언젠가는 이 분야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네. 지도자는 연구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한 것을 잘 표현해야 하는 것이네'라고 간곡히 충고하시더군요."

훗날 쿡 교수는 최 박사의 회갑을 맞아 발간한 기념집에서 "최 박사는 여느 학생과 달랐다. 지성, 창의성, 실천력, 적극성을 지닌 학자로 첫 새벽이 될때까지 연구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와 함께 늦게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이런 최 장관의 연구 철학은 그의 묘비명에 적힌 '연구자의 덕목'에도 잘 담겨있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 연구인이 돼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 "교육은 지식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

"피셔 교수는 화학계 거목이있는데 노벨상을 받은 후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더니 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일반화학을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신입생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 습득보다 학문하는 자세가 중요한데 일반화학으로 학문의 정신부터 심어주고자 한다고 설명하는데 더 놀라웠어요. 우리의 방향이 보이는 듯 하더군요."

최 장관은 1902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독일의 헤르만 에밀 피셔 교수와의 만남을 예로 들며 과학기술 발전 요소로 '전 국민의 과학 이해와 존중' '교육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지금같은 시험위주의 교육은 오답, 정답 가리기는 잘해도 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은 기르지 못한다"면서 "자격증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부 관료의 학습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공무원들이 기술을 아는 사람도 없고 기술을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도 모르면 기술을 만들어 낼 줄 모른다. 미래는 더욱 그럴 것이다. 산업과 기술을 엮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면서 "필요한 기술을 선정하고 소화해 적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개발 수요자는 민간과 정부로 구분된다. 당장 문제 해결이 필요한 연구개발은 민간이 고객이고, 10년, 20년 장래를 보는 연구개발은 정부가 고객이다.

최 장관은 "하지만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 내려면 민관연이 유대해 기초와 응용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면서 "연구소 발전을 위해 연공서열식을 배제하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운영의 주축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최형섭 박사는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마치고 1966년부터 1971년까지 KIST 초대 소장을 지냈다. 1971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우리나라 과학정책 체계 완성에 기여했다. 논문과 저서, 국내외 다수 강연활동으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2004년 5월 29일 영면,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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