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아이피노믹스

도쿄대(東京大学)은 예전부터 관료나 학자, 대기업 직원을 육성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역대 수상 중 수십 명이 도쿄대 출신이고, 정부 고위 공무원들도 대부분이 도쿄대 출신이다.

그러나 최근 도쿄대는 이러한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대학 벤처의 아이콘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도쿄대의 변화에 대하여 지난 해 봄 일본의 주요 경제신문인 닛케이는 '도쿄대와 혼고 밸리'라는 주제로 3회 특집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혼고 밸리는 도쿄대가 소재한 지역의 명칭이다.

닛케이는 기사를 통해 도쿄대 주변에 벤처 캐피털, 기업가 등이 모이고 학생들도 창업을 선택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또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가 나타나는 등 도쿄대 캠퍼스를 중심으로 미국의 실리콘 밸리와 유사한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 독보적인 도쿄대 벤처

2018년도 기준으로 생존한 일본의 대학 벤처는 2278개이며 이 중에서 상장한 기업은 64개다. 이들 상장 기업의 시가 총책은 2조 4000억 엔(한화 약 26조원 상당, 2019년 6월 기준)에 달한다.

이 중에서 도쿄대의 벤처는 271개로 일본 대학의 생존 벤처 전체의 약 19%를 차지한다. 2015년 8월 기준으로 도쿄대의 신설 벤처 기업 설립 누계는 245개이다. 이 중에서 16개 기업이 상장되었고 상장 기업의 시가 총액은 1조 700억 엔(한화 약 12 조원 상당)에 이른다. 또 23개 기업은 대기업 등에 인수합병(M&A) 되었다.

도쿄대의 변신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말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경제 전체가 어려운 시기였다. 일본 정부는 경제 위기를 산학협력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1998년 일본의 문부과학성과 경제산업성은 공동으로 '대학 등 기술이전촉진법(이하 기술이전촉진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대학이 가진 특허 등 연구 성과를 민간에 이전하도록 지원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정부가 대학의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여기서 발생한 특허는 국가가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대학이 기술을 이전하려 해도 기술이전 대상이 빈약해 기술이전촉진법은 유명무실해지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소유의 특허를 대학 당국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해 주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99년 산업기술력강화법이 제정되었다. 2001년에는 대학 벤처 1000개사 계획이 수립돼 대학 교수의 인센티브 부여, 스톡옵션제도 도입, 기업가 정신 교육 등 종합적인 대책이 수립되었다. 2002년부터는 총리 산하에 지식재산전략본부가 설립돼 대학의 산학협력을 포함한 지식재산 중심의 혁신 생태계 구축을 위한 전 방위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2004년에는 국립대학 법인화가 시작됐다. 국립대학 법인화와 더불어 일본 정부는 대학 교부금을 매년 1%씩 삭감하기 시작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104년부터 일본 대학은 정부 교부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국립대학 법인화는 대학이 자율성을 가지는 대신에 스스로 재정운영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도쿄대 변신의 궤적
 
이러한 일련의 제도개혁과 정책이 도쿄대의 산학협력을 촉진한 것은 분명하나 '도쿄대의 변화'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98년 도쿄대는 학교 내부의 첨단 연구센터(여러 개의 연구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대규모 연구조직) 내에 지식재산 연구부문을 설치하고 지식재산 전문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인재들은 실리콘밸리와 스탠포드 대학의 벤처 생태계를 연구하면서 도쿄대의 벤처 에코 시스템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98년에는 첨단 연구센터에서 나온 발명을 기술이전하기 위해서 도쿄대 외부에 독립된 '도쿄대 기술이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부터 도쿄대는 내부의 지식재산 정책, 지식재산 처리 절차, 발명신고 등 학내 규정을 수년에 걸쳐 정비했다. 2004년에는 도쿄대 벤처 캐피털이 설립되었고 2015년 기준으로 총 300억 엔(한화 약 3100억원)의 펀드를 조성해 창업 이전의 시드(Seed)단계를 포함, 초기 단계의 벤처에 투자했다. 투자 기업 70개 중에서 9개사는 상장되었고 8개사는 M&A 되었다.
 
도쿄대 벤처 캐피털은 일본 벤처 업계에서 시드(Seed) 단계에 투자하는 최초의 벤처 캐피털로 평가되고 있다. 2005년부터는 도쿄대 기업가 센터가 설립되어 미래의 기업가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2005년은 일본의 벤처 기업 중 하나가 주가 조작 등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일본 벤처 업계 전체가 냉각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도 도쿄대는 기업가 교육을 꾸준히 진행했다. 2015년 기준, 기업가 교육을 받은 학생은 누계 2000여명에 이르렀다. 2013년을 전후해 하나둘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에는 로봇 벤처인 '샤프트'가 Google에 인수되었다. 도쿄대 교수의 발명에 기반하여 창업된 '펩티 드림'은 2019년 2월 기준, 시가 총액 6249억 엔(한화 약 7조원 상당) 기업으로 성장했다. 인공지능 전문 기업 PKSHA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는 도요타가 투자하고 있다.
 
도쿄대 벤처에 대한 성과가 외신 기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였다. 뉴욕 타임즈를 시작으로 포브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이 도쿄대의 변화와 벤처 붐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6년도에는 도쿄대와 일본의 경단련(우리나라의 전경련에 해당)이 '도쿄대·경단련 벤처 협창회의'를 최초로 개최하였다. 협창의 의미는 협동으로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경단련 회원사들은 그간 일본 대학의 벤처에 대해 'IT 중심의 가벼운 창업'이고 '대학의 특허 인식도 매우 낮다'며 대학과 협력을 하기는 어렵다는 태도를 취해 왔다.
 
2016년 첫 회의는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한다. 2019년 3회차 회의에서는 도쿄대 뿐만 아니라 도쿄공업대학, 교토대학, 나고야 대학 등 8개 대학과 산업총합기술연구소도 가세해 진정한 의미에서 산학협력 네트워크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경단련 회원 기업들은 그간 일본 대학을 산학협력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산학협력은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해 왔고 공동연구도 조직 대 조직이 아닌 기업의 연구팀장과 대학 교수 개인의 협력차원이었다.
 
그러나 도쿄대가 보유한 특허가 창업으로 연결되고, 창업한 기업이 빠르게 상장되거나 M&A 되는 것을 보면서 일본 경단련 회원사들의 도쿄대에 대한 시각도 변하게 되었다. 
 
◆ 도쿄대 벤처의 사회적 함의
 
도쿄대의 벤처 등 산학협력 성과는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이나 MIT와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특허의 사각지대인 대학에서', '벤처 불모지 일본에서' 도쿄대의 변화는 대학 사회를 넘어 일본 사회 전체에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교토 대학, 츠쿠바 대학, 오사카 대학, 동북 대학 등이 도쿄대의 벤처 모델을 따르고 있다. 도쿄대의 벤처 생태계 구축에 있어서 성공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도쿄대 내부 요인에 주목한다.
 
첫째 도쿄대는 총장이 바뀌어도 일관된 정책을 추진했다. 도쿄대 내부의 산학협력 관계자뿐만 아니라 외부의 관계자들도 총장의 리더십을 꼽는다.
 
둘째는 사람이다. 도쿄대 기술이전주식회사 사장, 산학협력본부장, 도쿄대 벤처 캐피털 사장 등은 모두 15년에서 20년 이상 한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다. 도쿄대가 산학협력을 이끌어 갈 리더를 키워 냈다.
 
셋째 이들 리더들은 상호협력하면서 혁신의 씨앗인 발명을 발굴하고, 이 발명을 발아시킬 기업가를 찾고, 또 이 씨앗에 자금을 지원하며, 벤처가 성공하면 그 보상을 누구에게 얼마나 하면 되는지 등 벤처 생태계의 선순환 시스템을 설계했다. 이것은 생태계라는 전체를 보는 안목있는 인재 없이는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는가. 우리 대학 벤처는 어떤가. 우리 대학의 벤처 창업, 기술이전 등 산학협력을 지원하는 법률이 시행 된 지 20년이 되어간다. 그 간 우리 산학협력의 개념은 기술이전에서 사업화로, 사업화에서 창업으로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의 창업 인프라도 빠르게 정비되고 있다. 대학 등에 설치된 창업보육센터는 전국의 260개에 이른다. 100여개 대학이 참여하는 기술지주회사는 70개에 도달했다. 또 웬만한 대학은 모두 산학협력단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학생의 창업 휴학제, 교직원의 창업 휴직제도 등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학 창업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 대학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대학이 지금까지 설립된 벤처 기업 수가 몇 개이고 현재까지 생존한 기업이 몇 개이며 또 몇 개가 상장했다고 발표한 사례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발표가 없는 것은 아직까지 대학 벤처 생태계가 정착되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어려운 우리 경제에서 대학은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그 역할이 매우 큼은 분명하다. 우리 대학이 벤처 창업의 생태계로 거듭나고 속도감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대학 당국의 정책 일관성이다. 총장이 바뀌어도 산학협력 방침이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학 벤처는 단 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 스탠포드 대학이 미국 최초로 기술마케팅 개념을 도입하고 기술이전전담조직(TLO)을 설립한 것은 1969년이었다. 그러나 성공적인 평가는 1990년대 전후에 이루어졌다. 거의 20년이 걸린 셈이다. 시간이 걸림을 인정해야 하며 대학 구성원 전체가 목표를 공유하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산학협력은 우수한 연구자, 혁신적인 특허, 유능한 기업가, 혁신에 대한 자금 등 무수히 많은 요소가 필요하지만 그것들 자체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각 요소를 연결해 주는 인재가 필요하며 이러한 인재가 성장하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도쿄대와 다른 일본 대학이 동일한 제도와 문화에서 서로 다른 성과를 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인재를 확보하고 키워냈느냐의 차이이다.
 
이러한 인재의 중요성은 비단 도쿄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스탠포드의 캐더린 쿠는 1981년 TLO에 입사해 1991년부터 디렉터로 근무한 이후 27년이 지난 작년 여름 퇴임했다. Google 등 스탠포드 출신 대학 벤처의 혁신 씨앗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IT의 리타 넬슨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TLO에서 30년을 근무하였으며 그 중 23년을 TLO 디렉터로 임무를 수행했다.
 
셋째는 측정의 문제다. 대학 벤처가 몇 개 설립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3년, 5년, 10년 뒤 몇 개가 생존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을 측정할 수 있는 정교한 조사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대학 벤처 에코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한 발 더 나가면 이러한 조사 시스템을 통해서 산업별 특징, 창업자의 연령, 창업 멤버의 구성 등에 따른 생존 기간, 주식공개 등의 관계가 파악된다면 대학 벤처 에코시스템은 더욱 정교하게 진화하게 될 것이다.

◆ 필자 아이피노믹스는
1998년 기술고시에 합격, 특허청 심사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3년간 주일대사관 특허관(참사관)으로 재직했다. 또 일본 북해도 대학교 법학연구과(2012~2014년)에서 수학한 바 있다. 지식재산제도와 기술혁신, 산학협력과 지식재산경영에 관심이 많아 지식재산경영 전략연구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으며 저서로는 지식재산 전쟁(2006)을 출간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