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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고철과 씨름 연구실패? "세상 바꾸는 기술로"

[일본 대표연구실 ③]리켄 '표면계면과학연구실'
STM 직접 개조 업그레이드, 분자 1개 단위 해석 독보적
'원자 반응 제어' 세계적 기술 보유
와코시에 위치한 이화학연구소. 이곳에 계면과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팀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이 있다.<사진=김지영 기자>와코시에 위치한 이화학연구소. 이곳에 계면과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팀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이 있다.<사진=김지영 기자>

일본 도쿄에서 약 25Km 떨어져 있는 와코시에는 일본 유일의 자연과학종합연구소 이화학연구소(이하 리켄)가 있다. 올해로 102주년을 맞은 리켄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 1965년 도모나가 신이치 등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최근에는 모리타 코스케 박사가 주기율표 113번 원소 '니호늄'을 발견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과학자의 낙원'이란 별명답게 리켄의 자유로운 연구문화는 연구자들의 공적을 남기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랜 역사만큼 명실상부한 연구팀이 즐비한 가운데 계면과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팀이 있다. 분자의 특성을 단일 수준에서 분석하는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이다.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원자 1개, 분자 1개의 반응을 관찰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2000년초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분자 1개 단위 해석이 가능한 연구실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연구의 핵심은 주사터널현미경(STM)이다. STM은 원자나 분자 수준의 물질의 표면, 성질이 다른 두 물질이 맞닿아있는 지점(계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과 에너지 이동 및 변환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장비다.

연구원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분자의 성질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STM을 직접 업그레이드하며 연구한다. 부품을 새로 사기도 하지만 연구자들이 오래되어 쓰지 못해 버린 연구장비를 주로 활용한다. 덕분에 연구실 한쪽엔 못 쓰는 장비들이 수두룩 쌓여있다. 남들 눈에는 고물처럼 보여도 이들에겐 소중한 연구자원이다.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연구자들.<사진=연구실 제공>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연구자들.<사진=연구실 제공>

연구실을 이끄는 팀의 리더는 김유수 박사다. 그는 리켄에서 연구자로는 가장 높은 직책인 '종신 주임연구원(Chief Scientist)'이다. 종신 주임연구원 30명 가운데 외국인은 단 3명. 그중 아시아 과학자로는 김 박사가 유일하다.
 
김 박사는 "모든 것은 분자로 이뤄져 있다. 분자가 모여 만들어진 기능을 우리가 쓰고 있기 때문에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분자 레벨의 이해가 필요하다"면서 STM을 이용한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분자가 어떤 환경에서, 또 어떤 자극을 통해 더 좋은 성질을 갖게 되는지 보는 연구를 한다. 이를 리튬전지나 태양전지 등 장치개발에 활용한다면 더 좋은 성능과 효율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에너지 효율화를 위해 원자 수준의 에너지변환 연구하는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을 찾았다. 리켄 연구원들이 연구를 대하는 마음가짐, 철학, 연구실의 연구계획 등을 들었다.
 
인터뷰에는 김유수 박사와 이마다 연구원, 카즈마 연구원이 참석했다.
 
◆ "연구에 실패 없다" 리켄에게 평가는 도약위한 '중간 점검'
 
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김유수 박사.<사진=김지영 기자>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김유수 박사.<사진=김지영 기자>
"2010년 독립해 연구실을 세우면서 제시한 5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래성과 연구 방향을 인정해줘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지나고 첫 논문을 냈다. 연구 실패라는 정의가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연구에 실패가 없다'는 것이 리켄의 사고방식이다."(김유수 박사)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김유수 박사가 이화학연구소 표면과학연구실에서 연구생활을 하다 2010년 독립해 설치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리켄은 당시 40대 준주임연구원들에게 5년간 연구책임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연구비 등을 지원하며 연구실 독립을 장려했다. 성과가 좋으면 외부 교수로 가거나 주임연구원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연구실을 설치한 김 박사는 5년 후 목표로 분자 한 개의 발광특성이나 에너지 흡수 등을 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연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이마다 연구원이 박사후과정으로 연구에 함께 참여했다.
 
대학에서 STM을 다룬 적이 있던 이마다 연구원은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STM의 성능 차이에서 매우 놀랐다"고 회상했다. 특히 분자 한 개 단위를 살피면서도 그 안을 조사할 수 있어 신이 난 이마다 연구원은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어 연구하면서 행복했다. 김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목표 달성은 못했지만 그는 그동안 해온 연구내용을 평가위원들에게 발표하며 주임연구원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지난 5년간의 연구 방향성과 장래성을 보고 '단지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라며 연구 가치를 인정받았다.
 
리켄은 논문의 수나 특허 등이 아닌 이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세계적인 경쟁력과 장래성은 얼마나 되는지를 피어리뷰(peer review)한다. 후배들에게 무작위로 인터뷰해 평가자에 대한 평을 듣기도 한다. 리켄에게 평가란 다음 연구단계를 더 잘하기 위한 '중간점검'과도 같다.
 
연구실 초창기 멤버로 김 박사와 함께 연구팀을 꾸려나간 이마다 연구원.<사진=김지영 기자>연구실 초창기 멤버로 김 박사와 함께 연구팀을 꾸려나간 이마다 연구원.<사진=김지영 기자>
연구실 운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김 박사는 1년 후인 2016년 장치개발을 완료하고 논문을 내는데 성공했다. 만약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다그치며 연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 박사는 "5년 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연구할 기회를 잃었다면 논문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며 "특허나 로열티 등이 평가지표가 되는 곳도 물론 있겠지만 애초에 목표를 정량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구의 실패라는 정의가 없는 것이 일본의 연구문화"라고 설명했다.
 
◆ 수평적 조직운영 "각 분야 고수들 모였기에 가능"
 
"신뢰관계를 중요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연구실의 특징이다. 믿고 맡겨달라 하면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고 맡겨준다."(아마다 연구원)
 
리켄은 위계질서 없이 수평적 조직운영을 추구한다. 연구자의 의도가 분명하면 연구를 믿어주고 밀어주는 편이다. 김 박사는 "서로가 각 분야의 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자유로운 연구문화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표면계면과학연구실도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특징이다. 카즈마 연구원은 "대학은 교수, 준교수, 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가 강했지만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평등한 조직구조가 인상적인 곳"이라고 말했다. "리더의 프로젝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모두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누구를 흉내내는 연구가 아니라면 도전할 수 있도록 팀 내에서 지원해준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 모두가 애정을 가지고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다 연구원은 "마니아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연구팀은 그런 점을 존중해주고 서포트 해준다. 꼭 이래야 한다는 규칙보다도 신뢰관계를 중요시하며 믿고 맡겨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모여있는 것도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특징이다. 20여명의 연구원 중 절반이 한국, 캐나다, 중국, 필리핀, 태국 출신 연구자들이다. 장비 업그레이드로 체력을 요하는 연구도 진행하지만 남성과 여성 연구자 비율도 5:5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구분야도 물리 화학 공학 등 다양하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김유수 박사가 '다양성'이란 단어를 좋아하다보니 무의식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스승이자 일본의 '광촉매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지시마 아키라(藤嶋昭) 도쿄대학 교수의 영향도 있다. 김 박사는 후지시마 교수팀에서 남녀, 외국인 차별이 없으면서 연구자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다양성을 경험했다.
 
카즈마 연구원은  "현재 우리 연구실은 절정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연구도전이 가능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진=김지영 기자>카즈마 연구원은 "현재 우리 연구실은 절정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연구도전이 가능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진=김지영 기자>
김 박사는 "다양한 연구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양보하며 의기투합하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이란 말을 좋아하는 이유"며 "이는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이 사람들이 서로 융화되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다 보니 극복할 점도 많았다. 카즈마 연구원은 "화학계에서는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분야가 통하지 않아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전공 분야와 국적은 모두 다르지만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니 오히려 연구에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어 지금은 좋은 점이 더 많다"고 말했다.
 
◆ "남들이 하기 싫지만 필요한 일 찾아 움직여라"
 
김유수 박사는 연구실을 떠나는 친구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다. 몸담을 조직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지만 꼭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라는 이야기다. 이는 그의 스승인 후지시마 교수가 그에게 해준 말이다. 후지시마 교수는 김 교수에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만드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도쿄대 졸업 후 리켄의 6개월 계약직으로 근무하며 스승의 말을 곱씹었다. 오프라인으로 부품을 구매했던 당시 중요 자료였던 카탈로그가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고 정리를 시작했다. 카탈로그에 호수를 달고 갱신하거나 모자란 자료들은 업체에 전화에 취합했다. 김 박사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계약직 연구원에게 한두 사람이 말을 걸었고 일도 도우며 친해졌다"면서 .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꾸준히 한다면 그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될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지금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의 후배인 카즈마 연구원은 후배들에게 학생 때 배우기 어려운 부분들을 지도해주는 선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제가 연구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김 박사께서 준주임연구원이었다. 연구 스텝이 많지 않아 김 박사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연구논문을 지도해줬다"며 "지금은 인원이 많아 어렵지만 김 박사님의 연구문화를 잘 알기에 우리가 배운 대로 후배들에게 논문 쓰는 법이나 논문을 어필하는 방법 등 학생 때 배우기 어려운 부분들을 지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연구 분야를 발전시켜 STM이 현재의 초고진공 저온에서 동작할 뿐 아니라 빛과 자성은 물론 용액 내에서도 같은 수준의 분석이 가능하도록 연구장비를 개발할 계획이다.
 
카즈마 연구원은 "좋은 성과가 연이어 나오고 기술적으로도 안정돼있어 연구실의 절정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연구도전이 가능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은 유기발광다이오드의 새로운 발광 메커니즘을 발견, 지난 6월 네이처에 연구성과를 게재했다. 연구실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STM을 사용해 얻은 결과다. 유기발광다이오드 디바이스의 에너지 효율 향상과 발광 재료의 선택 확대 등이 기대된다.
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주요장비인 STM 모습. 연구자들은 STM을 스스로 조립하고 개조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해나가고 있다.<사진=김지영 기자>표면계면과학연구실의 주요장비인 STM 모습. 연구자들은 STM을 스스로 조립하고 개조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해나가고 있다.<사진=김지영 기자>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진화는 연구실에서 시작되죠. 남다른 연구 문화를 보유한 연구실은 연구성과와 인재 배출의 산실입니다. 대덕넷은 올해 '대한민국 대표연구실' 기획 취재를 통해 우리나라의 연구실 문화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또 과학선진국인 미국, 유럽, 일본 등 연구 현장을 심층 취재해 '과학선진국 100년 연구실을 가다' 기획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해외 취재가 순조롭게 완료되기까지 도움을 주신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최우묵 NIH 박사, 카지타 다카아키 도쿄대 교수, 김유수 RIKEN 박사, 스칸디나비아 한인과학기술자협회, 재독과학기술자협회 등 많은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글 싣는 순서 미국 3편-일본 4편-유럽 3편.<편집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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