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갖은 부정 부패로 환멸, 탈북 감행
"KAIST 졸업해 탈북민 롤모델 되고파"
15년 입학···동문장학재단도 지원 예정

박철진(30·가명) 씨는 보이지 않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북한 상위 1% 학생만 다닐 수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네 번의 탈북 시도 끝에 밟은 한국 땅. 박철진 씨는 2015년 탈북민으론 처음 KAIST에 입학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의 책임감은 막중하다. 탈북민도 한국 사회에서 목표를 세우고, 어려움을 견뎌내면 성공할 수 있는 모습을 몸소 증명해내겠다는 의지다.

그에게 책임감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박철진 씨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저쪽(북한)에선 흔히 백두산 혈통, 항일 빨치산 혈통처럼 출신 성분을 따지는데 제가 출신 성분이 안 좋았기 때문에 공부 안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며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내 가문은 내가 짊어져야겠다'라는 책임감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박철진 씨는 탈북자 롤모델을 넘어 우리 사회에 '저 사람도 저렇게 사는데,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희망을 던지는 게 목표다. 그가 경제적 곤궁에서도 의지를 불태우는 이유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북한에서 말하는 '자력갱생'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한국 땅을 밟고 걸음걸음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분들께 성장하는 모습을 못 보여 드려 죄송하고 부담스럽다"며 "빨리 내 힘으로 뭔가를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와의 대화에는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다. 아직 남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해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아꼈지만, 행동은 귀감이 될 만 했다. 탈북 6개월 만에 KAIST에 입학해 내년 탈북민 최초 학사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사명감이란 단어가 낯선 시대에 개인의 사명감으로 가득 찬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보다 굴곡졌다. 
 

2006년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던 박철진(30·가명) 씨는 지난 2014년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2015년 탈북민으론 처음 KAIST에 입학했다. 그는 올해 마지막 두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탈북민들에게, 돈이 아닌 '자기 꿈을 그리고 견뎌내면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진은 박철진(30·가명) 씨 모습. 그에게 자칫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우려해 가명과 모자이크를 썼다. <사진=김인한 기자>
2006년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던 박철진(30·가명) 씨는 지난 2014년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2015년 탈북민으론 처음 KAIST에 입학했다. 그는 올해 마지막 두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탈북민들에게, 돈이 아닌 '자기 꿈을 그리고 견뎌내면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진은 박철진(30·가명) 씨 모습. 그에게 자칫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우려해 가명과 모자이크를 썼다. <사진=김인한 기자>
◆北 상위 1% 학생이었지만···갖은 부정 부패로 환멸, 탈북 감행

박철진 씨는 소위 북한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재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일념으로, 함경북도 청진 시골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으로 편입했다. 그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들만 모인다는 평양 제1고등중학교, 모란봉 제1고등중학교, 금성학원 중 한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리 식으로 과학고에 해당한다.

그런 그가 부정 부패로 찌든 북한 사회에 지독한 환멸을 느꼈던 건 김책공대를 졸업하던 시기였다. 북한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선택지가 두 가지뿐이다. 군 복무 11년 또는 대학교 입학이다. 대학교 선택은 수제들만 가능하지만, 대학 졸업 후는 국가에서 지정해주는 곳에서 평생 일해야 한다. 김책공대에서도 그는 1200명 중 38등으로 졸업하며 희망찬 미래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좌절했다.

"김책공대를 졸업할 당시 상위 3% 학생들이 가야 할 곳에 배치를 받아야 했지만, 결국 뇌물이나 힘 있는 학생들에게 밀려 지방 공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열심히 공부해 출신 성분을 바꿔 가정을 살려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나 혼자 먹고살기도 버거운 곳으로 가게 됐죠. 그때 처음으로 절망했고, 탈북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로 이어지는 북한 사회를 왕족 국가라고 했고, 그곳에선 인맥과 뇌물밖에 살길이 없다고 했다. 그의 탈북 결심은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확신으로 변했다.

"평양에서 과학고, 김책공대를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가 보니깐 말이 아니더라고요. 제 친구들이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친구들인데, 내면이 썩을대로 썩어 있었습니다.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는데, 먹고 살기 힘드니깐 어떻게 하면 도둑질하고, 사기 치고, 마약 할지만을 궁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과연 이 상태로 몇 년을 가겠냐는 생각으로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너비 80cm 쪽배 타고 탈북···"KAIST 졸업해 롤모델 되고파" 

그는 너비 80cm 쪽배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에서 실탄을 겨눈 총구 앞에서도 여러 번 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냉동 창고, 땅굴에서 숨어지내기도 했던 그는 6년 전 많은 시련 끝에 한국 땅을 밟았다. 박철진 씨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와서 공부 하나 못 하고 내 인간 생활 하나 못하니깐 부끄럽다"고 했다.

박철진 씨는 지난해 두 학기를 휴학하고, 지역 기업 두 곳에서 인턴을 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자주적으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지가 커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탈북민 대부분이 경제적 곤궁에 처해 식당,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기 급급하다"며 "탈북민들에게 돈이 아니라 '저 사람처럼 자기가 세운 목표를 위해 어려움을 견뎌내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의 첫 목표는 탈북민 출신 1호 공학 박사다. 북한에서 넘어 온 젊은이가 한국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면 학·석·박사 학위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우리 대한민국, 좋은 사회···뒤돌아보지 않고 모두 꿈 향했으면"

박철진 씨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왔다. 앞으로 KAIST 총동문회가 운영하는 동문학술장학재단(이사장 임형규)으로부터도 일부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예정이다. 재단은 매년 장학 사업은 물론, 형편이 어려운 재학생들이 생활비 걱정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재학생 50여 명에게 각각 장학금 4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철진 씨에게 지난 5년 대한민국과 KAIST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대한민국은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한 환경을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뒤돌아보는 개인이 많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KAIST에 있는 학생들 보면 공부는 정말 잘하지만, 나약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학생들이다 보니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건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무섭게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 친구들이 과거에 한 노력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자기만 잘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훗날 성공한다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고 묻자 그는 망설이더니 이내 답했다. "우리 젊은 사람들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면 절망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습니까. 훗날 나 같은 사람도 삶을 견뎌내고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기 꿈을 향해서 진짜 뒤돌아보지 않고, 절망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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