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출신 거물 정치인을 보고 싶다
정치는 정치인만? 세계 조류는 경제인 및 전문가의 정치 참여 법조 과잉…과학적 합리성과 데이터로 훈련된 인재 정계 진출 사회적 필요 ‘벼락치기’는 한계 노정…AI 시대 맞는 정치 펼치게 훈련,공감력 키워야
2024-12-15 이석봉 기자
어느 직역에 속하던 나라 앞날에 관심 갖는 것은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 애써, 관심 갖지 말고 본업에 충실하자는 직군이 있다. 물론 모든 구성원이 같은 의견은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이 그런 주장을 하면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런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오늘날 번영은 그저 자기 직분에 묵묵히 일해 온 사람들이 실력을 키우고, 중심을 잡아왔기에 가능해진 대목이 있다. 실력은 키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를 구분한 시기는 60,70년대이다. 당시는 살림이 어려웠다. 먹고 살기가 정말 빠듯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100위권이었다. 기술력도 없었다. 배우기 바빴고, 노동집약적 산업에 의해 생산된 제품을 저가에 팔아 외화를 조금이라도 더 가져와야했다.
‘정치 과잉, 경제 취약’의 구조 속에 나름의 역할 분담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경제인이”란 주장이 나왔고 설득력 있었다. 그 구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제인은 정치에 얼씬하면 안된다. 정주영 회장이 선을 넘었다가 크게 당했다. 정치인들의 견제도 있었지만 국민들이 그에 동의하지 않은 영향도 크다.
발전 과정에서 자본이 취약한 사회에서 정경유착은 일반적이다. 아는 사람끼리, 힘 있는 사람끼리의 유착을 막기 위해 정경분리가 강조된 대목도 있다. 정경분리라고 하지만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것이고, 정치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배제되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에 대해 발언이나 관심은 가질수 있어도 지나치면 안된다는 자기검열도 있다. 특히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할 직역의 사람들은 전문가들이다. 특히 이공계는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금기시된다. 반면 변호사나 의사는 예외적 존재로 간주된다. 오늘날 정치가 법조 과잉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정경 분업의 결과 우리는 세계 10위권 국가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 비상계엄과 같은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치를 정치인들에게 맡겼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과학기술계 입장에서 이번 사태가 주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여겨진다. 과연 강 건너 불로 생각하고 신경 안쓰고 내 일만, 내 연구만 하는 것이 중요한지 말이다.
과학기술계 의견은 둘로 나뉜다. 연구 충실파와 관심파이다. 이번 경우 KAIST를 비롯해 연구중심대학의 일부 교수들과 학생회 등은 드물게 의사 표현을 했다. 어떤 입장이든 이번 비상계엄 소동이 주는 메시지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리더십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의 사회 참여와 관련해서이다.
과학자들도 크고 작은 리더가 된다. 이번 사건은 구성원들과의 소통, 상황판단, 공사구분, 권한에 대한 자기검열, 직책에 대한 책임감, 과정에서의 중간 평가, 객관화, 대응방법 선정, 시나리오별 결과 예측 등등 상황이 발생하고, 사건이 수습되기까지 많은 체크 포인트가 있다. 연구실에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주변과 불통으로, 자신만의 확증으로 동료들과 관계가 꼬이고, 문제가 수습불능 상태까지 가며 결국 연구실을 떠나야 하는 일들도 주변에서 더러 보아왔다. 이번 일은 특히 그 전개과정에서부터 수습까지 주된 논란 거리가 무엇인지가 공개된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이지만 실패 사례 연구로 최적일수 있댜.
KAIST가 의욕적으로 실패연구소를 만들었는데, 비상계엄 소동도 충분히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연구소에서 개인적 차원 실수와 좌절 등을 다루었다면 이 일은 시스템상에서의 문제를 비롯해, 국가 전체를 흔들었다는 규모의 차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과학의 사회 참여란 측면에서이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합리적 사회의 구현이다. 상식을 무시하는 비합리나 원칙을 위반하는 불합리가 아니라 상식과 규정에 맞는 합리적 사회의 구현에 과학이 큰 역할을 한다. 과학기술은 합리적 사고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것을 알았기에 인간은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었고, 합리성에 기반해 문명을 가꿔왔다.
과학을 공부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며, 세상에 없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과학 지식에 기반해 미래를 제시해 나갈 때 그 사회는 앞으로 나아간다. 과학기술인들이 도구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것이다.
관련해서 재미 있는 기업이 하나 있다. 팔란티어란 미국 기업이다. 이 회사는 각종 데이터를 통해 온톨로지(ontology)란 방식으로 분석한다. 의미 혹은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회사가 가장 빛을 발한 사례가 빈 라덴 은신처 적발과 우크라이나전에서의 활약이다. 빈 라덴 은신처는 세탁물, 쓰레기량, 전력 소모량 등등 여러 요소를 연결해 맥락을 파악해 찾아낼 수 있었다. 연관이 안되는 것들을 연결시켜 찾아냈다. 주거 인원 대비 이례적으로 쓰레기가 없고, 통신량이 적으나 사람의 왕래가 많으며, 주변에 비해 전력 사용량은 많은 점 등 여러 요소를 연결해 맥락을 파악해서 결국 은신처 파악에 성공했다. 러-우크라이나전에서는 위성정보와 드론, 감청, 보급 상황 등등을 종합해 러시아 전차부대의 진격 방향을 예측했다. 그에 따라 선제 조처를 취하며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과학이 발전하며 현상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관련 없어 보이는 데이터들을 모아 의미를 해석하고, 맥락을 파악해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만큼 과학이 생활에 적용되며 우리 사회가 예측 가능하고, 효율적이 되며, 모두가 바라는 공정과 기회 평등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라고 하겠다.
정경분리 상황 속에서 경제와 그에 속한 과학은 수십년간 정말 많이 발전했다. 특히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글로벌 스탠다드가 우리 사회에 적용됐다. 경제와 과학은 다른 나라와 경쟁해야 하는 열린 구조 속에서 세계적 수준이 됐다. K-방산을 비롯해 원자력 발전소 수출이나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 등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SCI 논문이나 특허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에 비해 정치는 닫힌 구조이다.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와의 경쟁은 없다. 충원구조도 불투명하고, 철학은 없고 진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소통은 없고, 구호가 지배한다. 불행한 대통령이란 패턴이 계속 반복돼 왔고, 잘 될 것이란 기대치를 낮출 수 밖에 없다. 이번 비상계엄 소동도 ‘벼락치기 정치’는 안된다는 하나의 사례가 됐다. 그럼에도 정치가 갖는 영향력은 너무 크기 때문에 포기를 할 수도 없다.
과학기술자가 고민하고 참여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계 사람들의 정치 외면 보다는 관심과 더 나아가 참여를 바라게 된다. KAIST를 비롯한 이공계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 나와 정치를 보다 과학에 기반을 둔 합리적 행위를 만들기를 바란다.
흔히 중국 지도부에는 이공계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공계를 우대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부러워한다. 중국 지도자들은 그 자리에 앉혀진 것이 아니다. 권력투쟁을 통해 그 자리를 쟁취한 것이다.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세포 활동을 하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 과정에서 능력을 검증 받고, 지방 등 낯선 현장에도 투입된다. 과정과정에 실력이 입증되고, 유력자에 발탁되며 중용되고, 경쟁을 거쳐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구조가 작동하며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선진국에는 과학자 출신으로 정치인이 돼 국가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 많다. 허버트 후버 미 대통령은 광산 공학 전문가로 대공황 시기 경제와 과학기술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했다. 빌 포스터 미 하원의원은 페르미 연구소 출신 입자물리학자로 과학적 분석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법안을 작성해 과힉기술 및 에너지 정책에 큰 기여를 했다. 영 마거릿 대처 총리도 화학자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해 기술혁신을 통해 경제 개혁을 이뤄냈다. 트럼프 정부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미국병 치유를 공언한 머스크도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KAIST도 여느 국립대나 마찬가지로 국감철과 예산철이 되면 국회로 의원을 만나러 다니며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많다. 국민 세금을 쓰려니 당연한 일이다. 과학을 아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고, 이 사람이 거물로 자라 미래를 내다보며 필요한 예산 배정을 하는 것은 꿈일까? KAIST 관계자들이 평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비상시국에도 정치는 무관하다며 애써 관심 두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은 맞을까? 과학계 내부에도 더 높은 수준의 민주화를 이룰 일들이 산적해 있다.
모두가 과몰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일반인 수준의 관심만이라도 가지며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고, 그 가운데 일부가 과학을 기반으로 정치에도 진출해 이 나라가 공정하고 합리적 사회가 되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AI, 양자컴, 로봇, 우주 등 과학기술 중심시대에 과학자가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면 우리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정치는 여전히 비효율적이고 폐쇄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기술계 참여는 필수적이다. KAIST와 같은 기관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대한민국이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세계적 사례가 보여주듯이, 과학기술과 정치의 융합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연구와 개발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 참여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과학기술계가 행동해야 할 때이다. 우선 관심을 갖고,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KAIST 출신 거물 정치인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끄는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