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의 실시간 표정까지 포착했죠"
김유수 교수 "양자 새 지평·산업화 연계 막바지 총력"
日 리켄 연구소 거쳐 GIST로···김유수 교수, 연구-산업 연결에 나서 세계 최초 초고속 관측 기술 개발, 단일 분자의 ‘표정’까지 읽는다 "노벨상보다 중요한 것···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잇는 길"
2025-03-17 홍재화 기자
25년간 일본 과학계에서의 연구 활동을 마치고,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김유수 광주과학기술원(GIST) 화학과 교수(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변환연구단장)의 말에는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난 14일 대덕넷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초로 1조분의 1초 단위로 단일 분자의 양자 상태를 실시간으로 조작 및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우리가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보고 감정을 파악하듯, 분자의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 연구팀은 개발한 기술을 산업화 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표정에는 기대감과 함께 살짝 우려가 엇갈렸다. 그는 "연구가 연구실에만 머무르면 그 연구는 빛을 볼 수 없다. 이번 성과 같은 기초 연구가 산업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연구-산업 간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한국행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체인'은 연구 성과가 산업계로 흘러가는 단순한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기초과학자, 응용연구자, 소자 개발자, 기업 연구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순환적 협력 구조다. 이 체인이 제대로 작동할 때 실험실에서 태어난 혁신적 발견이 비로소 우리 일상을 바꿀 수 있다.
대덕넷은 김 교수를 만나 이번 성과의 의미와 기초연구에서 산업화까지 이어지는 '협력 체인'의 중요성에 대해 들어보았다.
◇ 분자 한 개의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
그는 지난 7일 분자수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변환과 화학반응을 1조분의 1초 수준으로 실시간 초고속 관측 및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과학계 주목을 받았다.
그의 연구팀은 주사터널링현미경(STM)과 테라헤르츠 광원을 결합해 단일 분자의 전자 이동과 광 반응을 초고속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기존에는 개별 분자의 전자 상태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어려웠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전자의 흐름과 양자 상태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분자 내부의 양자 상태 변화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이 기술은 우리가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보고 감정을 파악하듯, 분자의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포착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또 "전에는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면 이제는 무슨 기차를 탔는지, 몇 시에 어디서 정차했는지, 심지어 객차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모두 볼 수 있게 됐다"며 연구의미를 강조했다.
특히 빛과 전자, 분자의 상호작용을 피코초 단위로 분석할 수 있는 이 기술은 유기 태양전지, 양자컴퓨터의 큐비트(Quantum Bit) 연구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 양자 상태를 초고속으로 제어할 수 있는 최초의 시도"라며 "큐비트의 양자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조건에서 오류가 발생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닦았다.이는 양자컴퓨팅의 성능 향상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기초연구에서 산업화까지, '협력 체인'의 중요성
김 교수는 "단일 분자 수준에서 전자의 이동과 빛의 발현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됐으니, 이제는 이를 활용해 새로운 재료를 개발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며 "신소재를 디자인하고, 이를 기반으로 소자를 제작하는 연구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이 이 기술을 제품화하는 마지막 단계를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구 성과를 발표한 뒤, 다른 분야 연구자와 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며 "이는 기초 연구와 응용 연구 간의 첫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또 이번 연구가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김 교수는 일본 리켄 (RIKEN) 연구소, 동경대학, 요코하마 국립대학, 하마마츠포토닉스등과 협력해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연구 장비 개발, 이론적 분석, 데이터 처리 등이 각국의 연구팀, 기업 간 협업으로 이뤄졌다.
그는 "국제공동연구는 자원 공유의 차원이다. 각자의 조직이나 국가의 틀에 갇혀서 자원을 나누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국제공동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서로 나눔으로써 크게 만드는 결합체"라며 "기초 연구에서 산업화까지 이어지는 협력 체인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연구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유수 교수와 함께 한국행을 선택한 이마다 히로시 교수 역시 "과학 앞에서는 국적이나 그룹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개별적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연구팀이 협력하면서 더욱 큰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의 연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 노벨상보다 중요한 연구 생태계
김 교수의 연구는 노벨상을 받기 위한 중요한 조건 두 가지를 이미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최초로 개발된 기술이기 때문이다. 노벨상의 마지막 관문인 파급 효과만 입증된다면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 결과가 노벨상에 한걸음 다가 선 것으로 볼 수 있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 교수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신중하게 답하면서도 더 중요한 목표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연구는 노벨상 수상 조건 중 일부를 충족한다. 하지만 이것이 관련 분야에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미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건 기초와 산업화 사이의 체인이 완성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벨상 자체보다 기초연구가 실제 산업으로 이어지는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 그게 노벨상보다 값진 성과"라고 강조했다.
또 "지금은 첫걸음을 뗀 단계이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연구자들이 이 기술을 활용하고 발전시킬지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며 "새로운 발견이 우리의 일상을 바꾸는 기술로 이어질 때, 비로소 연구의 진정한 가치가 실현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우수한 기초연구와 빠른 산업화 역량이 만나면 세계가 주목하는 혁신이 나올 수 있다며 "앞으로 연구부터 산업까지 이어지는 생태계 구축에 기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