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사이언스코리아]과학 발전 핵심자원에서 '걸림돌' 전락

"과학기술 행정체계는 한국 과학과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체계가 80~90년대 이후 20여년 가깝게 과학자 지배와 관리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이제는 과학계 발전의 큰 걸림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예산 권력을 가지고 과학자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을 뿐, 과학자의 연구를 진정 지원하는 행정체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과학계가 살기 위해선 기존의 과학기술부 행정 개념은 해체돼야 합니다." 한국 과학행정 40주년을 맞아 과학계의 새틀 짜기를 바라는 많은 과학자들의 목소리이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과학계 발전의 필수조건으로 현 과학 행정체계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강조한다. 40년간 한국 과학계가 성장한 만큼, 과학 행정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새틀짜기 작업'을 반드시 벌여야 한다고 이들은 역설한다.

▲각 정부출연연 2006년 예산 투입 대비 기술료 수입 ⓒ2007 HelloDD.com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보면 과학행정의 현주소가 그대로 읽힌다. 매년 유능한 과학인력을 선발해 연구 현장에 투입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창출해 낼 수 없는 행정체계로 전락한 지 오래다.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를 소홀히 해 성과가 안나오는 게 아니다. 한참 연구에 전념해야 할 과학자들이 정부에서 제출하라고 하는 보고서 작업에 시간을 허비하고, 연구비를 수주하러 다니느라 여념없기 때문에 굵직한 성과들을 국민들이 볼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현장 과학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과학기술 행정체제. 과학행정이 오히려 과학자들을 옥죄고 있는 연구현장을 살펴보면, 과학행정이 환골탈태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 관료문화로 옥죄는 사례 사무관보다 힘없는 연구원장…권위 도전하면 "연구비 집행 못한다" 으름장 대덕특구 내 한 출연연 수장인 K원장. 통상 출연연 원장은 '차관급'으로 통한다. 하지만 현장 과학자들은 K원장을 'K주사'란 별명으로 부른다. K원장은 평소 과기부 공무원들과의 미팅이 잦으며,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 마다 직접 관계부처 사무관들을 만나곤 한다.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사무관 보다 직급이 낮은 '주사'가 오히려 더 어울린다는 반응이다. 비단 K원장 뿐 아니다. 특구 내에서는 단장·센터장 등 보직을 맡은 과학자들이 일선 공무원들에게 행정처리 문제로 쩔쩔매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과기부 정문을 열고 들어갈 때 고개부터 숙이고 들어간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잘못 보이면 당장 연구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대 이공계학과 L교수는 "과학계 스스로 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현재와 같은 시스템 아래서는 과학자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밝힐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공무원은 물론 과학자들도 '우리의 본업'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자신의 소회를 풀어놨다. 대덕특구의 Y박사는 지난해 생각을 하면 아직도 화가 가라앉질 않는단다. 과학기술 행정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공개적으로 한 댓가로 과기부 공무원과 예산 집행 문제로 다퉜던 기억이 생생하다. Y박사는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지금까지 과기부로부터 받았던 연구개발 내역을 모두 재검토하겠다. 지금 결재 중인 연구비도 취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사례를 설명했다. 결국 Y박사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연구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아야 했고, 몇 차례의 이유 모를(?) 사죄를 하고 나서야 사태가 일단락 됐다. 특구의 한 과학자는 "잘 알고 지내던 센터장급 과학자가 과기부 사무관에게 호되게 야단맞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공무원은 분명 과학자 위에 있고, 과학자들은 그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이 공무원들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는 '보따리 예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많다. # 예산으로 옥죄는 사례 "보따리 예산, 현장과학자는 눈물"…예산위 결재 끝난 연구비에도 '칼질' 대형연구개발사업을 진행 중인 한 연구개발 사업단. 이 사업단에서는 4월이 다 가도록 연구비를 집행 받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추진중인 연구사업 예산이 지난해 말 국회 예산결정위원회를 순조롭게 통과했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예산안이 확정돼도 넘어야 할 산이 또 있다. 최소 3~4개월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 시행이 결정된 과제에 대해 RFP(실행계획)을 만들어 제출해야 하며, 과기부는 이 실행계획을 통해 다시 사업자 선정과정을 거치며 검토과정을 갖는다. 과기부는 유사 분야의 연구 예산을 통합처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A·B·C 과학자가 각각 10억원씩의 예산을 요청하면 총 액수는 30억원. 과기부는 기획예산처에서 일괄 결제를 받아 30억원의 비용을 확보한 뒤 각 연구책임자와 다시 예산을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RFP 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최초 제안했던 연구비가 하향 조정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구비를 한꺼번에 보따리처럼 싸서 마음대로 분배한다는 의미로 '보따리 예산'이라고 불리는 과기부 예산분배 관행은 연구실행 계획 검토를 통해 '사전 평가'를 강화하자는 의미에서 시행됐지만, 현재는 과기부 R&D 사업비의 '융통성' 확보 및 '과학자 관리'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 과학자들 대부분의 목소리다. 한 출연연 과학자는 "연구비가 실제로 집행될 때까지는 시키는 일을 대부분 따를 수 밖에 없다"며 "정부는 예산을 확보하는데 주력하면 되는데, 예산의 세부적인 분배문제에까지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비 집행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업을 위해 힘들게 고용한 박사급 연구원(보통 비정규직 형태)을 내 보내는 일도 비일비재 하다. 규정에 따르면 프로젝트 수행을 목적으로 모집된 비정규직 연구원은 2개월 이상 유예기간을 두지 못한다. 결국 연구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힘들게 모집한 인재들을 내보내거나, 사업을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문지상에 가끔씩 터져 나오는 일부 대학교수들이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인건비를 유용했다는 소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연구비가 지급될 때까지 우선 자신의 돈으로 월급을 주고, 그 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감사원의 오해를 사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은 경우들도 있다는 것이다. 한 과학정책 전문가는 이에 대해 "PBS제도는 연구비 및 인건비가 충분한 강대국들에게 적합한 제도"라며 "부족한 연구비 체계 아래 이같은 제도를 도입하다 보니, 과학자들의 관리 행정만 강화되고 있다"고 현실태를 진단했다. # 행정으로 옥죄는 사례 '연구는 뒷전'이 될 수 밖에 없는 젊은 과학자들 2년 전 대기업 연구소에서 정부출연연구소로 이직한 P박사는 지금 직장을 다시 옮길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P박사 뿐만 아니라 주위 민간연 출신 연구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연구활동 제약 때문이다. P박사는 오히려 민간연구소에서 실험에 몰두해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P박사에 따르면 민간연은 연구 아이디어만 내면 연구기획은 기획부서에서 한다. 특허 출원의 경우도 회사에서 특허전문가를 두고 알아서 다 해준다. 보고서도 3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기술보고서만 쓰면 된다. 민간연구소는 연구원들이 말 그대로 온전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반면 출연연은 기획을 연구자가 직접 해야 한다. 또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써내야 한다. 특허가 있어도 시간이 없어서 특허를 못낸다. 특허명세서까지 스스로 작성해야 하는 현실이다. P박사가 처음 출연연에 입사할 당시 놀랐던 것은 연구원이 인사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 비정규직이나 대학원생을 채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회의와 서류 작성도 당연히 연구원 몫이다. 또한 실험재료나 기기 구매도 직접 해야 한다. 직접 견적 받고, 물건 자재 주문까지 한다. 물건하나 주문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2시간 이상이다. P박사가 민간연구소에 있을 때와 출연연에 있을 때를 비교해보면 출연연에서의 연구시간은 민간의 경우와 비교해 20%에 불과하다. 요즘 그가 퇴근 무렵이면 자주하게 되는 푸념은 '오늘도 실험하다 전화오고, 연구 좀 해보려면 회의하고, 그러다보니 퇴근이네'다. 관련분야에서 더욱 깊은 연구를 위해 민간연에서 출연연으로 이직한 K출연연의 L박사는 현재 상황을 참지못해 '과연 현 시스템이 더 좋은 성과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 연구소 성과를 직접 조사해봤다. 그 결과, 원천특허는 거의 없고, 기술료 수익은 예산 투입 대비 100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L박사는 동료들에게 "연구하려고 출연연에 왔는데 실제로 연구는 하나도 못하게 된다"면서 "이정도로 연구성과를 못내고 있는 연구집단은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자조 섞인 울분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 제도로 옥죄는 사례 경쟁위해 만든 'PBS', 실제 경쟁하나?…"하향 평준화만 남는다" PBS가 실제로 '건전한 연구경쟁 체제 육성' 목적으로 이용되는지 해를 거듭할 수록 의문이 남는다. 과학현장에서는 "박사들의 스트레스만 증대될 뿐, 경쟁체제 도입에는 효과가 없다"고 못박아 말한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T연구소. 매년 11~12월. 연구소 내 보직자와 책임자급 박사들 사이에선 비밀스런 회의가 열린다. 보통 팀장이나 부장급 인사들이다. 이들이 모여 처리하는 안건은 주로 인건비 조정. 여유가 있는 몇몇 책임연구원들의 인건비를 부족한 연구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런 가운데 인력이동은 물론 연구팀을 통합하는 등 조직을 개편하는 일이 진행된다. 인건비를 버퍼링(Buffering)하는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A연구소는 최근 몇 개의 연구팀을 통합해 신규 센터를 출범시켰다. 연구개발의 효율성 강화가 목적이라지만 속내는 인건비를 나눠 갖기 위한 체제 변경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다른 연구자가 애써 확보한 인건비를 나눠받는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과학자 사이에서는 이를 '적잖은 수치'로 인식하기도 한다. 인건비를 많이 확보한 연구자는 자신의 이해와 크게 관계없으니 흔쾌히 허락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이런 일이 2~3년 계속되다 보면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인건비를 나눠 받고 겨우 연구활동을 지속하게 됐다는 Q박사는 "빚을 얻어 부도를 몇 년 연장하면 은행 근처도 가기 싫어지는 것처럼 내 심정도 그와 같다"며 "아마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연구소만 출근하면 인건비 문제로 잠재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과학자가 연구능력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사업능력으로 평가 받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이다. R연구소의 L연구책임자는 "책임연구원이 되보니 어느새 내 어깨 위에 5명의 비정규직 연구원이 올라와 있더라"라며 "수억원이 넘는 연구비를 확보해야 살아남는 책임자 입장이 되다보니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대덕의 한 원로과학자는 "현 PBS는 하향 평준화를 양산할 뿐, 결코 경쟁체제 육성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며 "정부가 연구소 예산 자체를 큰 덩어리 예산으로 연구소에 맡기고 운영할 수 있도록 예산권을 위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덕넷 특별취재팀 = joesmy@hellodd.com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