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스테판 연구원들은 연구를 즐긴다
[슬로베니아 기초과학 현장-① 연구자 생활편]

최근 과학기술 논문 피인용지수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보이는 동유럽의 한 연구소가 있다. 인구 200만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에 있는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Jozef Stefan Institute)가 바로 그 연구소다.

물리·신소재 등 자연 기초과학이 강하기로 매우 유명한 연구소다. 갈수록 기초과학이 국가의 화두로 떠오르는 가운데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소와 규모가 엇비슷하면서 기초과학에 충실한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를 취재했다. 현장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보도 순서는 1-연구자 생활 2-연구연속성 3-신뢰 연구 공동체 [편집자의 편지]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 입구(좌)와 본관(우). ⓒ2009 HelloDD.com
과학기술자들이 매일 오후 5시에 퇴근해 여유를 즐기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또, 매월마다 연구소 곳곳에 아름다운 미술작품들이 교체되면서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면? 동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를 아는가?

슬로베니아의 대표 연구소 요제프 스테판의 연구원들 삶이 그렇다. 수도 루블라냐 시내 중심 외곽에 위치한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는 인근 주택과 밀집해 있어 특별히 연구소라는 느낌이 없다. 겉보기에 일반 고등학교 건물같다. 역사가 오래돼 낡은 구석도 보인다. 비록 겉은 우리나라 연구소처럼 크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속은 꽉찼다.

조그만 건물들이 옹기종기 이웃해 있는 실험 현장에서 850여명(650명 연구자/200명 기술·연구지원 인력)의 연구원과 직원들이 함께 호흡하며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 연구소에서 내놓은 논문과 연구 개념들이 세계 과학자들 사이 인기다. 피논문인용 수치가 증명해 준다. 2004년 4300회 정도 인용되던 것이 최근에는 연간 1만회를 넘어섰다.

보통 노벨상을 받으려면 3000회 정도 요구된다는 정설이 있다. 연간 1000억원 예산 투입 대비 기초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논문피인용지수를 보이는 성과를 보여 유럽에서 최고 수준의 효율성있는 연구소로 통한다.

◆ 슬로베니아 과학자의 일과‧‧‧5시간 연구하고 5시간 강의·행정

논문작업 후 매일 아침 오전 9시 커피를 마시며 업무 개시<사진=대덕넷>
논문작업 후 매일 아침 오전 9시 커피를 마시며 업무 개시<사진=대덕넷>
야니 돌린섹(Janez Dolinsek·53세) 요제프 스테판 응집물리연구부 박사는 매일 새벽 4시30분. 잠에서 깨어나 연구소 출근 준비를 한다. 응집물리부서를 책임지는 프로젝트 리더라서 동료·후배 연구자들보다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연구소 도착 시간은 대개 6시 30분. 가장 조용하고 두뇌회전이 상쾌한 시간에 실험실에서 논문을 쓴다. 같은 시간대에 나와 연구하고 논문쓰는 동료 연구자들도 꽤 된다. 2시간여 정도 논문 작업에 집중하다가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며 실험실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서로의 안부에 대해, 때로는 연구 진척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오전 9시경. 본격적인 업무 돌입 시간이다. 야니 박사는 연구자이자 류블라냐 대학의 교수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강연을, 강연이 없는 날에는 연구에 임한다. 주 6시간 루블라냐대학 학생들에게 자신의 물리학 연구 노하우를 전달한다. 야니 박사처럼 책임급 연구자들은 보통 루블라냐대학이나 슬로베니아 소재 대학에서 후학 양성을 위한 교수로 활동한다.

▲야니 박사의 현장감 있는 강연은 항상 루블라냐대학생들에게 인기. ⓒ2009 HelloDD.com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 연구자들은 주중 근로시간 개념이 살아있다. 주 40시간을 대부분 지킨다. 야니 박사처럼 남보다 열성적인 연구자들의 경우 주 50시간도 일하지만 무리하게 일과를 보내지 않는다. 매달 한 번씩 연구소 중앙 홀에 교체·전시되는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쉬는 시간을 보내는 여유도 연구소 생활의 작은 즐거움이다.

▲연구소 본관 중앙 복도에는 유명 화백들의 전시공간으로 꾸며진다. ⓒ2009 HelloDD.com
야니 박사는 오후 5시경 퇴근 한다. 퇴근 후 연구나 실험 관련 일을 하지 않는다. 내일의 연구를 위해 쉬는 시간을 갖는다. 대개 책을 읽는다. 물론 집안 청소같은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한다. 얼마 전까지는 퇴근 후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7년 동안 꼬박 작업 끝에 직접 벽돌로 쌓은 집을 지었다. 두 딸과 아내와 함께 지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연구소를 출퇴근하고 있다. 야니 박사는 평균치로 따지면 하루에 5시간은 연구하고, 5시간은 행정업무나 강연, 회의에 소비한다. 회의는 연구 추진을 위한 회의가 많다.

연구생활 20여년 동안 야니 박사는 응집물리 분야에서 SCI급 논문을 포함, 총 200여편의 논문을 냈다. 관련 분야에서 석학 대접을 받는다. 최근에는 오로지 온도에 따른 열 조절만 가지고 메모리 소자 기능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학으로부터 교수 제안을 받았지만, 슬로베니아에서의 연구자 삶이 좋아 거절했다.

야니 박사에게 '한국 과학기술자들은 대개 연구 프로젝트 수주와 연구, 매년 평가작업 등의 행정으로 밤낮으로 바쁘다'는 동향을 건네자 자기 같았으면 심장 발작(Heart Attack)이 걸렸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야니 박사는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정말 고생 많이해 지금의 한국이 과학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는 창의성을 기반을 둔 연구환경 조성에 신경을 좀 더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야니 박사는 "살기 위해 연구하느냐 삶을 즐기기 위해 연구하느냐의 문제"라며 "살기 위해 연구하다 보면 과학기술의 원천인 창의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야니 박사는 한국 과학자들에게 여유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2009 HelloDD.com

※ 우리나라 과학기술자의 일과는? 아래 기사 링크 참조. 30대 K 박사의 '하루 일과'…야근없인 '연구 불가' [10년 후 K 박사①]월·화·수·목·금 '日課 총력기획' 어느 과학자의 '7년 출연연 체험기' [업그레이드 POLL]"과학자는 '보고서' 쓰는데 바쁘다" 
 

연구소 중앙에 위치한 요제프 스테판의 동상. 그는 연구자이자 시인이었다.<사진=대덕넷>
연구소 중앙에 위치한 요제프 스테판의 동상. 그는 연구자이자 시인이었다.<사진=대덕넷>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

슬로베니아 과학예술 학술원의 물리연구소로 1949년 설립돼 초기 원자력 연구에 주력했다. 양자론의 초석을 다진 슬로베니아 물리학자 Jozef Stefan(1835~1893)을 기리기 위해 1959년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로 이름지어졌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연구소로서 약 850명의 종사자가 있고 이중 약 400명의 박사급 연구원들이 물리, 화학, 분자생물학, 정보공학, 핵 반응물리 및 에너지환경 연구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응집물리(condensed matter Physics)에서는 세계적으로 연구능력을 인정받고 있을 만큼 기초과학 분야의 매우 유명한 연구소다.

유럽연합과 정부가 지원하는 예산은 연간 1000억원 수준이다. 현재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 재료연구소와 연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기초연과의 공동 연구 협력이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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